061화
다음 날 아침.
“합하! 합하!”
어느 한 서리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헐레벌떡 뛰어온 서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있었고, 침을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삼키더니 이내 이의방에게 고하였다.
“괘서(掛書)이옵니다… 개경 전역에 이런 괘서가…….”
“괘서라니? 이리 가져와 보거라.”
갑작스럽게 괘서라며 문서를 가져온 서리는 바로 이의방에게 올리었다.
이의방은 놀라 괘서를 펼쳐 들었다.
[경인년, 보현사에서 난을 일으킨 삼인방 중 하나.
이의방은 천하의 둘도 없는 역적이며, 황제를 수없이 겁박하였다.
또한 황명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재물 불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개경에 사는 백성만 사람 취급하고, 개경 밖에 있는 백성은 짐승 취급하니… 이 얼마나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이에 백성들은 들어라.
천하의 둘도 없는 역적의 쌀가마니를 받지 말고, 널리 앞날을 보라.
이의방은 훗날 그대들의 고혈(膏血)을 짤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백성들이 참으로 불쌍하도다.
이에 내 친히 벽서를 붙여 백성들에게 알리는 바이니, 부디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이의방을 경계할지어다.]
이의방은 계속해서 괘서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괘서를 쓴 이를 죽여 버릴 듯한 이의방의 눈매는 매서웠다.
“이런 우라질 놈을 봤나! 뭐가 어쩌고 어째! 나중에 되면 백성들의 고혈을 짠다고!? 내가?!”
콰앙!
탁상을 내리친 이의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어떤 놈이 이런 글을 썼느냐!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씩씩거리며 이마에 핏대가 설 정도로 이를 갈았다.
지난 수년간 백성들을 위해서만 일하였던 이의방이었다.
이 괘서를 쓴 놈은 분명 지금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고만장한 놈인지 얼굴도 보고 싶었다.
물론 잡는 순간 죽여 버릴 것은 자명하지만 말이다.
“서리.”
“예. 합하.”
“이 괘서가 언제 발견된 것이냐?”
“예… 백성들에게 듣자하니, 금일 광대들이 놀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 그 괘서를 붙였다고 했습니다. 합하.”
이의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당장 개경에 있는 광대란 광대들은 모조리 잡아들이라 6위에 명을 전하라!”
“예! 합하!”
서리는 이의방의 명을 받들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촤악.
종이를 찢어버린 이의방은 자리에 다시 앉아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합하, 좌복야와 우복야께서 합하를 뵙기 청하옵니다.”
“들라!”
이의방이 크게 고함치며 말하자,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좌복야 문극겸과 우복야 이준의가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합하… 혹…….”
“괘서 말이오? 내 읽어 보았소. 소문을 듣자 하니, 광대들이 오고 간 후인 듯하여 개경에 광대란 광대는 모조리 잡으라고 명을 내렸소.”
“그건 아니 되옵니다!”
“뭣이?”
문극겸이 크게 소리치자, 이의방은 인상을 썼다.
“합하, 개경의 모든 광대를 잡아들이시면 아니 되십니다. 가뜩이나 괘서 때문에 민심이 불안정하온데 광대들까지 모두 잡아들이라 하시오면…….”
“그럼 내가 이 개 같은 벽서를 보고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요!”
“합하, 정녕 모르시겠사옵니까. 이 괘서는 합하를 흔들어 놓기 위함입니다.”
“뭐라?”
“지난날 합하께서 해 오신 일을 생각해보시옵소서. 이번 일로 합하의 심기를 건드려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누군가의 수작이옵니다. 어찌 그런 수작에 말려들려 하시옵니까.”
이의방은 잠시나마 문극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였고,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계속해보시오.”
“민심이라는 것은 한 번 불붙으면 쉽게 타오르지만, 그 불이 꺼지고 다시 불을 피우기는 어렵사옵니다. 이 괘서를 쓴 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합하의 성정을 알고서 도발을 한 것이니, 절대 말려드시면 아니 됩니다. 합하께서 이루어 놓은 것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 위함을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아우님, 부디 마음을 좀 가라앉히게. 차근하게 하나씩 일을 풀어나가면 되네…….”
이준의 또한 이의방의 화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말하였다.
“합하, 보이지 않는 적들이 많습니다. 이건 그들이 노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라는 것이오?”
“그들을 이용하십시오. 잡아들이라 하신 광대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합하의 눈과 귀로 이용하십시오.”
“…눈과 귀로?”
이의방은 솔깃하였다.
광대들은 정처 없이 돌아다니니, 그들을 이용한다면 고려 전역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거기에 소문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찌하면 좋겠소?”
“그들을 불러 위로하시고, 재물을 나누어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그들은 합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지 않겠사옵니까.”
“오, 좋은 생각이오. 아우님. 좌복야의 말에 나도 동의하는 바이오.”
“우선 그건 알겠고… 이 괘서를 쓴 이들을 알아낼 방도는 없겠소이까? 사람들이 있을 때 붙이다니… 간 큰놈이 아니오.”
“그걸 이용한 것이지요. 백성들의 눈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여 벽서를 붙인 거지요.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하였겠습니까.”
“아니, 그럼 대체 누가 붙였단 말이오? 좌복야?”
이준의는 문극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도 합하를 곱게 보지 못하는 이들이겠지요.”
“그럼 그놈들을 잡아다 치면 답이 나오겠소?”
“합하, 그건 더욱더 아니 됩니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오.”
이의방이 말하였다.
“합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합하께서 이런 벽서에 휘두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 벽서를 내건 이들은 당황해할 것이며 그 누구도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
벽서 하나로 잠시 휘둘렸던 이의방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 * *
“합하, 합하의 명대로 광대들을 모두 잡아 왔습니다.”
현수는 이의방을 바라보며 말하였고, 현수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하였다.
“그래?”
“예. 합하.”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개경에 모든 광대란 광대들은 잡아들인 듯 보였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의방의 말 한마디면 바로 베어버릴 준비를 마친 6위의 군사들은 모두 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두려워하지들 말아라! 이번에 너희들을 잡아 온 것은 괘서 때문이니라.”
광대들은 대답 하나 없이 그저 이의방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늘 저자에서 놀던 광대 패가 누구냐. 일어서 보거라.”
두려워서 단 한 명의 광대도 감히 함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네 이놈들! 합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느냐! 썩 일어나지 못할까!”
천시호가 고함을 치며 말하였으나, 서로의 눈치만 볼뿐 이었다.
“이놈들이…….”
촤아앙!
천시호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되었다.”
“합하…….”
“되었다. 물러나라.”
이의방의 명령에 천시호는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너희들 중에 본 자가 있든, 아니 본 자가 있든… 나는 너희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너희들을 잡아 오라고 명하였지만,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
광대들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에 어리둥절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재차 말하였다.
“잘 들어라. 괘서는 나를 음해하기 위해서 써 붙인 것이나, 나는 이 괘서를 신경 쓰지 않느니라. 이 괘서를 붙인 놈이 누구인지, 혹 너희들이 보았다면… 내게 말만 하거라.”
어째 말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다 죽여 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죽인다는 건지 보내준다는 건지.
현수는 이의방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저…….”
그때 광대 하나가 눈치를 보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이야기해 보아라.”
“저는 오늘 장터에서 놀던 광대 패의 주인입니다. 괘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노는 것에 정신 팔려있다 보니…….”
이의방은 광대 패의 말에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알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희들에게 죄를 물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그만 모두 나가보거라. 또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거들랑 내 집에 와서 소식이나 전해주면 좋겠구나. 내 그 값은 후하게 쳐줄 것이다.”
이의방은 그렇게 이야기만 하고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합하께서 풀어주라 명하시니, 모두 풀어주거라!”
“예! 장군!”
군사들은 속속히 광대들의 오라를 풀어주기 시작하였다.
광대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호랑이의 굴속에서 나간 광대들은 나가자마자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이에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현수야!”
“예! 합하!”
현수는 이의방의 목소리에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부르셨습니까. 합하.”
“들어오거라.”
덜컹.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현수는 이의방에게 인사를 하였다.
“합하, 무슨 일이시온지…….”
이의방은 현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사병이 있는걸 너도 들었겠지?”
“아, 예. 합하. 들었사옵니다. 수가 엄청나시더군요. 하하하.”
“그래. 앞으로 그 사병을 네가 이끌 거라.”
“…예?”
갑자기 그 사병들을 이끌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엄연히 사병들의 우두머리가 있는데, 그 우두머리까지 자신이 지휘하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저… 합하… 그건 사병 대장이 할 일이 아니옵니까. 어찌 소장에게 그런…….”
“네가 6위에서 할 일이 있더냐?”
“예?”
“6위에서의 모든 일은 내가 관장하는데… 네가 할 일이 있느냐 물었다.”
“아, 없사옵니다. 합하.”
“저쪽 장을 열어보면 파란색과 붉은색 실로 감겨진 두루마리가 있을 것이다. 가지고 와라.”
“예. 합하.”
이의방이 가리킨 곳으로 가니, 작은 장이 보였다.
현수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수많은 두루마리 중에 파란색 실과 붉은색 실을 찾아 둘러보았다.
금세 두 개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이의방에게 가져가려 하자, 되었다며 이의방은 손사래를 쳤다.
“네 것이다. 하나는 추밀원부사겸육위대장군으로 너를 임명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두루마리는 네가 가질 토지문서와 같은 것이지.”
“…예?”
“네가 말한 대로 살피어 보았는데… 정주는 지금 황실에서 관장하여 돌본지가 백여 년이나 흘렀다. 애초에 그 땅은 주인이 있던 땅이었고, 이제 주인이 돌아왔으니 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한 것이다. 이는 이미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합하, 제가 정주의 주인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제가 정주 유씨가 맞기는 하오나…….”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리고 본래 정주 가에서 강화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너를 공에 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