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형.”
“왜?”
“궁금한 게 있는데… 내 힘은 형이랑 비교하면 엄청나게 부족해. 다리에 힘을 엄청나게 주고도 형한테 질질 끌리고 다니는데… 이건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거야?”
“온몸을 이용해. 수박이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다 도움이 돼. 전신을 사용하기 때문이야.”
현수는 경대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어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반 시진, 한 시진씩은 꼭 수박으로 몸을 풀어라.”
“에!? 그렇게 오래?”
“내가 항상 그렇게 해왔다. 너에게 도움 되는 거니까. 꼭 해라. 발 디딜 때 힘을 주고. 허리, 팔, 다리 전부 다 힘을 주면서 움직여야 한다.”
경대승은 현수에게 다시 한번 더 강조하였다.
“아, 봉술은 얼마나 연습했냐?”
“형이 가르쳐 줬던 대로 다 하고 있어. 근데 형이 가르쳐 주는 봉술… 정말 필요한 무예야?”
“봉술이 그나마 배우기 제일 쉽고, 방어하기 유용하지. 나중에 단봉 하나 사줄 테니까 그걸로 검술 가르쳐 주마. 자, 그럼 슬슬 출발하자.”
“예!”
경대승은 뒷정리를 하며 행낭을 짊어 맸다.
현수도 경대승을 따라 행낭을 짊어 메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형, 여기서 좀 더 내려가면 어디야?”
현수의 물음에 경대승은 지도를 꺼내 보았다.
“대구 현이다.”
“갑시다!”
현수는 말을 타고 속도를 높이며 대구 현으로 향하였다.
* * *
출발한 지 닷새 만에 대구 현에 들어왔다.
대구 현에 도착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팔공산은 정말이지 험난하고 매서웠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여기가 어디인지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또 다른 길을 가면 산속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산속을 헤맬 때 다행히 대구 현 주민을 만나게 되었고, 대구 현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현수는 개운하게 인근 계곡으로 가서 몸을 씻고 주막으로 돌아와 방안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이내 곧 다시 문이 열리며 경대승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거라. 밥은 먹고 자.”
“아, 난 완전 녹초야…….”
“수제비 시켰다.”
수제비라는 말에 현수는 몸을 일으켰다.
“…수제비만?”
“만두도.”
“크… 역시 우리 형.”
“하하하하!”
경대승은 현수의 말에 크게 웃었다.
“국화주도 한 병 시켰다.”
현수는 말없이 엄지를 추어올렸다.
“형.”
“왜?”
“전에 형이 한 말 있잖아…….”
“무슨 말?”
“아니… 합하에 관한 말 있잖아…….”
“아, 그게 왜?”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합하 덕에 지금 고려가 이렇게 안정되어 가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하는 건지 해서…….”
현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왕을 시역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새웠어. 승려들도 죽이고, 사찰을 불태웠고. 수많은 이를 죽인 권신인데… 어찌 그걸 보고 있을 수 있었겠냐.”
“형, 왕을 시역(弑逆)한 건 인정하겠는데… 그때 형이 너무 흥분해서 내가 말 못 했지만, 생각을 잠깐만 바꿔봐. 의종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더 많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찌 폐주라 할지라도! 폐주를 모시던 신하가 황제를 죽이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경대승은 버럭 화를 내었다.
“형, 내가 여기서 지내면서 생각이 든 게 뭐냐면… 지금 이 고려는 합하처럼 철권통치를 하지 않는 이상 다스릴 수 없어. 귀족들은 지금 난리를 치고 있을 거야. 합하는 저 귀족들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
“알면 뭐하냐, 그저 권신일 뿐인데.”
경대승은 올곧은 게 아니라 꽉 막힌 사람이었다.
“그럼 형, 나 하나만 물어볼게. 황제 폐하가 형한테는 어떤 존재야?”
“국가지.”
“폐하는 곧 국가다… 지금 이런 생각 하고 있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폐하가 있어서 국가가 있는 것이다.”
“형이 그렇게 생각한 거면… 백성이 없으면 황제도 없는 거 아니겠어?”
“…….”
현수에 말에 경대승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경대승에게 더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현수 또한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만이 국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없었다.
“형, 혹시나 하는 말인데… 합하를 어떻게 해보겠다… 이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안 그러면 형이 다칠 수도 있어. 진짜 걱정돼서 그래. 그리고 가능하면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마음이 맞든, 안 맞든… 어울리며 다녀봐… 혹시 모르지.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 있을지.”
“그럴 일 없을 거다.”
여전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경대승이었다.
“손님들! 음식 가져왔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현수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잘 차려진 상과 국화주를 놓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현수는 다시 문을 닫고 자리에 앉아 먼저 동치미 사발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었다.
토굴에서 갓 꺼낸 동치미 국물의 간도 딱 맞았다.
항상 동치미 국물을 마시지만, 고추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현수였다.
뭔가 딱 부족한 맛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고려에서 고추를 어디 가서 구해 와야 하는지 몰랐기에 현수는 그냥 아쉽더라도 넘겼다.
“형도 와서 들어요. 다시는 이런 얘기 한마디도 안 할 테니까…….”
“그래. 이런 말 하지 말자. 서로 감정 상하니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경대승과 현수는 주막에서 국밥을 먹고 있었다.
“참나, 현령이 너무 하는구먼… 대체 나라님은 뭐하나… 그런 현령을 안 잡아가고.”
누군가의 원망 섞인 목소리에 현수와 경대승은 국밥 먹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국밥을 먹는 척을 했다.
“나라님에게 고하면 뭐 하나… 이 나라가 왕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황제인 왕씨는 쭉정이야. 황제 역할을 대신하는 자가 이씨라는 거지. 그 이씨가 성격이 포악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다 때려죽인다고 하잖나. 개경의 사찰을 태우고, 약탈하고… 승려들까지도 대부분 때려죽였다고 하던데.”
“그런 자가 황제 역할을 어떻게 하겠나. 그냥 우리 같은 백성은 조용히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살아야지.”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대승과 현수였다.
백성들이 한 평가를 들은 경대승은 그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국밥을 먹고 있었다.
“참 안타까워… 세상에… 혼삿날 쳐들어가서 신부를 뺏어 자기 첩실로 들이는 현령이 어딨나! 그런 짓은 지옥에 있는 야차도 하지 않을 거야.”
“자, 술이나 마시세!”
사람들은 씁쓸한 듯 술잔을 들어 마시었다.
“합하께 서신 하나 보내야겠네. 여기 정리하라고.”
“그럴 필요 없다.”
“응…? 뭐가?”
“우리가 처리하고 보고하면 되잖냐.”
“아무리 그래도… 현령이 무슨 산적 두목도 아니고…….”
“무서우냐?”
“아니, 무섭기보다는 현령을 찾아가서 뭐 어떻게 할 건데. 거기에 군사들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사병들이 얼마나 있을지 알아? 형, 거기다가 겨우 우리 둘이야… 우리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어. 솔직히 말하면 여기는 현령의 땅이야. 여기 개경 아니야…….”
현수는 경대승에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했다.
산적들이면 진짜 해볼 수는 있겠다.
그런데 현은 달랐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경대승은 그런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현령에게로 가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현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탁!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대승이었다.
현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검을 챙겼다.
경대승이 한 손에는 철봉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더니, 철봉을 현수에게 건네었다.
“가자.”
둘은 현령이 있는 관아로 향하였다.
* * *
얼마 후, 주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관아에 도착하였다.
관아를 지키는 군사들은 가만히 서 있는 경대승과 현수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있나?”
“그냥 가라… 도움이 안 되는 관아야.”
관아가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쓰는 군인들이었다.
지금껏 지나온 작은 마을도 이렇지는 않았다.
“와, 제기랄… 얼마나 썩었으면 군인 상태가 이런 거야?”
현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응양군 상장군 경대승, 6위 장군 유현수가 현령을 만나러 왔다고 전하거라.”
경대승은 품속에서 응양군 군패를 보이며 입구를 지키는 군사들에게 말했다.
이에 군사들은 놀라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와, 뼛속부터 군인은 다르구나…….’
현수는 감탄했다.
같이 다니면서 경대승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들어가자.”
“예! 상장군!”
현수는 큰소리로 외치며 경대승의 뒤를 따라 관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 급하게 뛰어나오는 현령이 보였다.
그 뒤로 그의 사병들과 대구 현의 장수, 병사들이 따라 나왔다.
“아이고! 응양군 상장군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허리를 숙이며 묻는 현령이었다.
“내 듣기로는 자네가 혼례를 올리려던 처자를 잡아다가 첩으로 두었다는데… 사실인가?”
“예? 아, 저… 그, 그것이… 고리 빚이 있는데… 그 고리대금 대신에 데려온 것이라… 제가 잘해주고 있습니다!”
현령의 말에 현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강제로 데려와서 잘해주고 있다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었다.
“고리? 현령이 나라의 허가도 없이 개인적으로 고리를 놓았다는 말이냐?”
경대승은 현령의 말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 아닙니다! 그건 제 개인적인 재산입니다! 그걸 고리로 놓은 것입니다. 원래는 고리를 놓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하도 사정을 하는 바람에…….”
“그럼 내가 그 여인을 직접 만나 물어봐야겠다.”
“예? 아… 저… 지금 없습니다.”
“…없다고?”
“마실 나갔습니다. 하하하.”
“거짓말 말게. 어디 있나. 자네 표정이 마실 안 나갔다고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진짜 마실 갔습니다. 안 그러냐! 얘들아!”
“맞습니다. 현령 어른!”
사병들이 일제히 외쳤다.
하지만 사병들 역시 표정이 어두웠다.
“왜… 못 도망가게 다리라도 잘랐어?”
“예!?”
현수의 말에 당황한 현령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다리를 자르다니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왜 언성을 높이나. 아니면 아닌 거지.”
경대승이 옆에서 거들었다.
“유 장군.”
경대승이 현수를 장군이라 부르자,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예. 상장군.”
“자네가 집 안을 좀 살펴보게.”
“예! 상장군!”
현수가 앞으로 나아가자, 현령은 현수를 주시하다가 사병들을 바라보았다.
현령은 사병들에게 신호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