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53화 (53/159)

053화

“합하, 부디 생각해 주십시오.”

“하아…….”

이의방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이미 정한 것을 자신이 바꿀 도리는 없었다.

“네가 말한 것은 일리가 있지만…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매몰차게 말한 이의방에 현수는 다시 말하였다.

“현재 이 고려, 천하의 주인은 합하입니다. 합하의 명 한마디면 국법도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가장 불쌍한 것은 고려의 지방 체제인 군이나 현으로 편제될만한 인구수를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 태어난 향, 부곡, 소의 백성들이 아닌지요. 그리고 애초에 향, 부곡, 소에서 살던 이들은 양민이었지 절대 천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볼 때는 태조 황제께서 크게 실수를…….”

“이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야!”

현실적인 말을 하는 현수였으나, 이의방은 듣기 싫은지 매몰차게 말을 끊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 같아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의방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말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네가 말한 일은 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 나가봐라. 나도 이걸 쭉 보고 수결(手決)해야 하니.”

“예… 알겠습니다.”

현수가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 *

개경에서 지내면서 일한 지 벌써 일 년이 흘렀다.

현수는 완벽하게 고려의 생활에 적응 해버렸다.

현수는 이의방의 명령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덕분에 개경 내의 비리 사건들을 모조리 종식시킬 수 있었다.

혜민국에서 관원과 함께 하였던 의관들을 삭탈관직하였고, 관원들은 모두 교형에 처하였으며 재산 역시 모두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토록 하였다.

많은 약재들을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운 결과는 참으로 비참하였다.

전의감에서는 태의와 어의가 함께 의논하여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웠고, 그 결과를 현수와 이의방에게 보고하였다.

결과는 이러하였다.

삼사에 판관이 있듯이, 전의감 역시 판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살피게 하는 것이었다.

판관은 주부급들로 하여금 관직을 승격시켜서 혜민국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더불어 개경의 혜민국뿐만이 아니라, 삼경, 사도호부, 8목에 있는 혜민국도 살피게 하였다.

지방에 있는 혜민국에서도 역시 비리가 있다는 보고를 받아든 이의방은 중신들과 이를 해결할 처리 방안을 의논하였다.

그렇게 회수한 재물들이 억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토지문서, 은병, 금병, 장신구, 비단, 서역에서 들어온 사치 장신품까지 모두 값나가는 것들 천지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회수하다 보니 이 수가 2군 6위의 군사들을 충분히 재정비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심지어는 안주, 안변부, 동주의 군사들까지 재정비를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재물을 착복하고 쌓아 두었는지 알 수 있을법한 전횡이었다.

이의방은 이것들을 군비에 충당하였고, 충당하고 남은 금액은 낡은 무기들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호부에서 이 일을 맡아 시작하였다.

각 부서에서 이것저것 주문요청이 들어오는 통에 호부는 지금 업무 마비까지 오고야 말았다.

현재 고려의 조정은 하급관원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음서로 뽑자며 중신들이 계속해서 말을 하였으니, 이의방은 계속해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과거가 열린다.

두 달 전 고려 전역에 소문을 냈더니, 곳곳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오고 있었다.

고려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주어진다.

그렇다 보니 평생 읽고 쓰고 배워왔던 것을 뽐낼 수 있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의관들이 모두 현수에게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현수는 갑옷 대신 관복을 입었고, 관복 겉에는 하얀 직령을 걸치고 건을 썼다.

양팔에는 관복이 더럽히지 않게 소매를 잡아 주었다.

펄펄 끓고 있는 가마에 다가선 현수는 의관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나 된 것이냐?”

“예. 장군 오늘까지 닷새이옵니다.”

“음… 곧 다 되겠구나. 아무튼 여기서 계속해서 관리해야 할 것이니, 절대로 습한 곳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 탕약보다 더 까다롭게 관리가 되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의관들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현재 혜민국으로 보낼 환약들을 만들고 있는 탕약 방이었다.

한약방을 좀 더 크게 중축하여, 탕약을 먹기 전에 급한 이들에게 먹이기 위하여 미리미리 환약을 제조하고 있었다.

환약을 만들면 오래 보관하기가 어려웠기에, 즉석에서 만들어서 바로 먹였다.

하지만 현수가 만든 환약은 건강보조식품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다른 약재에 비해 보관성도 굉장히 좋았다.

물론 시행착오를 수십여 번 겪었지만, 상약국의 의관들은 현수와 함께 어떻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며 의논을 한 끝에 완성된 것이다.

“장군, 이번에 나온 환약입니다.”

완성된 환약을 가지고 온 상약국 주부가 환약을 보여 주었고, 현수는 환약 몇 알을 집어서 살피어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만족하였다.

“아주 잘 나왔구먼. 고생했네.”

“어인 말씀이십니까. 다 장군의 덕이옵니다.”

“하하하하, 아무튼 환약들이 나오는 대로 옹기에 잘 보관하고 빙고(氷庫)에 잘 두어야 하네.”

“여부가 있습니까.”

상약국 주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환약과 구증구포를 이용하여 수삼을 홍삼, 흑삼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처음 고려의 홍삼을 내놓았을 때 금나라, 송나라는 거부감을 보였다.

인삼을 주로 수출하는 상인들 역시도 거부감을 보이게 하였다.

하지만 현수는 이걸 이용하였다.

홍삼은 인삼의 배의 효능을 내고 있으며, 홍삼을 꿀에 절여 황제 폐하와 합하에게 매일 올리고 있다는 현수의 한 마디에 상인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사겠다며 난리를 쳤다.

상인들이 홍삼을 잔뜩 구매하고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가자, 이제는 귀족들도 홍삼, 흑삼을 사겠다면서 지방에서까지 올라왔다.

이렇게 쉽게 홍삼, 흑삼을 고려 전역부터 송, 금에까지 널리 알리게 되다 보니, 이제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어버렸다.

부르는 게 값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홍삼, 흑삼 제조법을 상약국에서 상인들에게 시원하게 가르쳐 주었다.

인삼 수출을 할 때 계속해서 막대한 수익금이 들어왔으니, 나라에서 직접 홍삼을 안 팔아도 자연스럽게 세금이 들어오니 말이다.

역시나 이 부분에는 이의방과 황제의 재가가 필요하였으나, 일은 일사천리로 쉽게 풀렸다.

이렇게 하여 홍삼, 흑삼의 세금은 인삼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세금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점차 무역 품목은 인삼에서 홍삼, 흑삼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특히 흑삼은 외국에서 가장 귀한 삼으로 인식이 되어 귀족들만 찾는 고려 제일의 효자상품이 되어버렸다.

이렇다 보니 농사를 짓는 이들까지 농사를 안 짓고 홍삼을 재배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고, 이의방은 이를 방지하고자 허가를 받은 이들만 장사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 버렸다.

그래도 생계 문제 때문에 홍삼 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어 인삼을 작게나마 재배하는 것은 묵인해 주었다.

“홍삼은 넉넉하게 준비해 놓게. 흑삼이 효능이 더 뛰어나지만… 급하게 탕약을 달일 상황이 오면 홍삼을 사용해야 하니 항시 남겨 두어야 하네.”

만들 거면 그냥 흑삼을 만들겠지만, 흑삼을 만들기엔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그래서 그냥 홍삼을 주원료로 쓰려고 하는 것이다.

“예. 장군 그렇게 하고 있사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쑥, 도라지, 천마, 울금, 강황, 오미자, 복분자, 구기자, 익모초, 당귀, 국화, 청국장 등이 환약으로 탈바꿈하며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이 혜민국을 찾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환약들이었다.

현대에서는 건강보조 식품정도에 불과했지만, 현재 고려의 기술로는 식품이라 할 수 없는 전형적인 약이었다.

백성들에게 환약을 쥐여보낼 때 이리 말하고는 했다.

하루에 한 번만 먹으라고.

아니면 간단하게 환약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렇게 하면 개개인의 몸은 혜민국을 찾아오지도 않을 정도의 수준이 될 수 있을 거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교적 만들기도 굉장히 쉽다.

씻어서 바짝 말린 다음 가루로 내어 그 후에는 밀가루 반죽하듯이 잘 만들어서 꾹꾹 눌러서 작게 돌돌 만 후에 다시 바짝 말려주면 끝이었다.

얼마나 쉬운가.

이렇다 보니 혜민국을 찾아오는 백성들은 태반이 많이 줄어들었다.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니 환약으로 만들고 싶은 게 있으면 만들어 먹으면서 건강을 챙기니 혜민국에 올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현수는 상약국을 쭉 둘러보면서 살피었다.

부족한 게 없는지 일일이 살피어 보고 직접 솥을 열어서 살피고 냄새도 맡아 보았다.

냄새에 따라서도 약효가 달라질 수 있기에 신경을 쓰는 부분이었다.

물론 상약국 의관들도 아는 부분이었지만, 이걸 시작한 게 본인이니 특별히 더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 * *

얼마 후.

현수는 전의감에 있는 장서각으로 들어와 의학 서적들을 살피었다.

당연하게도 동의보감보다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동의보감은 조선 중기에 쓰여 21세기까지 연구를 토대로 계속해서 발전해왔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딱히 현수에게 눈에 들어오는 서적은 없지만, 그래도 황제내경태소만큼은 읽었다.

수나라 양상선이 편집한 의학서적의 원서를 고려에서 보게 될 줄 몰랐다.

아버지의 말로는 원서는 소실되어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확실치가 않다고 한 의학서적을 전의감 장서각에서 보게 될 줄이야.

현수는 황제내경태소를 계속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과연 동의보감 못지않은 의학 서적이었다.

증세에 따라 어떤 약을 써야 하고, 침을 어떻게 써야하며, 뜸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사람의 체형에 관한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동의보감 나오기 전에 이 의학서적은 백과사전 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현수가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고 이 책을 통해 계속 공부를 해 나아갔다.

약방문도 보고, 송의 황실에서 쓰는 비방이 담긴 약방문까지도 세밀하게 보며 공부를 해나갔다.

또한 손사막의 천금요방, 익방 등을 두루 살펴보며 고려 의학과의 차이를 느끼고 지식을 섭렵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장군,”

현수가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부장이 와 있었다.

“무슨 일이냐?”

“합하께서 찾으시옵니다.”

“하아…….”

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왜 이럴 때 찾을까.

현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서각 밖으로 나갔다.

서고 관리인은 곧장 현수가 앉았던 자리를 빠르게 정리하면서 현수가 어디까지 보았는지 세세히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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