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물론 웅담에는 많은 효능이 있지만, 국가에서 운영하는 혜민국에 쓸 정도면 고려가 아직까지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는 나라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백성들은 영 꽝이지만 말이다.
“저 그러면 말입니다… 혜민국에 오지 못하는 노인들이 있다면…….”
“당연히 젊은 의관들이 가서 살피지요. 아니, 근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하하하.”
현수는 웃어넘기며 말하였다.
“그럼 저는 계속해서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하십시오.”
현수와 태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각자 맡은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하… 쉽지가 않겠네.”
고려의 내정 구조를 보면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정말 다 복잡했다.
역사, 이론상으로는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고 설명은 들어봤다만, 실제로 겪어보니 쓰러질 거 같았다.
왜 농민반란이 주구장창 일어났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이 모든 게 바로 나라가 아니라, 귀족 탓이라고 느껴졌다.
그나마 이의방이 이렇게 권력을 잡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의방이 역사대로 죽었더라면 최고 암흑기를 맞이하며 무신정권이 최충헌 대에서 자리가 잡히니 말이다.
현수는 이곳에서 배울 게 많다고 느꼈다.
조선, 심지어 당장 대한민국과 비교하더라도 고려의 백성들은 어마어마한 복지를 누리고 있었다.
쌍둥이 낳았다고, 국가에서 쌀 두 섬, 은병 5개, 명주실을 하사했다.
쌍둥이가 아니더라도, 자식을 낳으면 쌀 한 섬과 비단 한 필을 하사했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하사품이 더 많았다.
그게 바로 고려의 법이었다.
고려의 국민이 가져야 할 특혜와 권리는 그야말로 다른 국가보다 탑 중의 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귀족들의 수탈만 뺀다면 말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군!”
그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현수가 시선을 돌리었다.
다름 아닌, 자신에게 급하게 뛰어오는 부장이었다.
“뭔데?”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동생 같은 녀석이었다.
음서로 일찍 관직에 올랐다.
경대승처럼 말이다.
경대승 역시 15세의 관직에 올라 견룡군이 되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합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어…? 합하……?”
“예.”
문하시중이라 부르다가 부장에게서 합하 소리가 나오니, 조금 기분이 이상하였다.
하지만 이의방은 합하라 불리는 게 맞았다.
정1품의 모든 관직을 가지고 있고, 이의방보다 품계가 높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알았다.”
현수는 빠르게 중방으로 향하였다.
* * *
“합하, 유현수 장군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안에서 이의방의 목소리가 들리며 중방문이 열렸다.
현수는 신발을 벗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
“어떠하냐?”
안 본새 중방의 구조가 바뀌어 있었다.
“폐하께서 정무를 편안히 보라며 내게 만들어 주신 자리다. 구조도 조금 바뀌었고 말이야.”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이게 그 중방 맞나 싶었다.
이의방은 마음에 드는지 좋다면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만큼 이의방에게 신경을 쓰는 황제였다.
투박한 상은 없어졌고, 깔끔하게 옻칠을 한 두툼하고 예쁜 상과 탁보가 올라와 있었다.
의자들도 12개나 놓여 있었다.
이의방이 앉아있던 상석도 달라졌다.
화려한 상과 화려하게 장식과 무늬가 들어간 자리에 앉아있는 이의방이었다.
“멋지십니다.”
“하하하하하!”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중신들과 이것저것 의논을 하고 다들 돌아갔는데… 글쎄 폐하께서 내게 이런 것을 내렸다.”
“축하드립니다.”
“고맙구나. 그나저나 혜민국 일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잘 처리되고 있습니다. 장부 역시 발견하였습니다. 전의감에서 수사 어사대를 거쳐 형부로 옮겨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부에 문하시중의 이름도…….”
“뭐? 내 이름도 적혀 있더냐?”
“아, 예…….”
“그래… 뭐… 나도 거기 관원들에게 약을 받은 사실은 있지.”
이의방은 부정하지 않았다.
약을 받은 것을 말이다.
장부에도 쓰여 있지 않았는가.
녹용, 웅담 각 몇 근씩 말이다.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조심히 물어보고자 입을 열었다.
“문하시중… 왜 그렇게 북방 군사 관련된 것에 집착하시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내정을 보면서 계속 북방 일을 신경 쓰시는 듯해서 그러합니다. 지난 석 달간 묵묵히 시키는 대로 해왔지만, 북방은 아직까지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리 북방 군사력을 증강시키려 하시는지 궁금해서 그러합니다.”
지금의 고려는 군사력을 키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강하였다.
몽고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 후의 일이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미리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급하게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물은 것이었다.
“북방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그렇다. 아무래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국방력에는 문제가 없어도 후가 문제가 아니냐. 그래서 미리 준비하려는 것이다.”
“내정일은 어찌하려 하십니까? 귀족들의 재산으로는 부족할 것이고…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하하, 그래. 네가 제대로 보고 있다. 하지만 비리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그 비리를 청산하면 막대한 자금이 나올 것이고. 아니 그러냐?”
이의방은 생각보다 계산적이었다.
우매하지도 않다.
석 달간 이의방을 겪어본 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다혈질 성격의 의리파이지만, 배신의 대가는 가혹하게 다루는 이의방이었다.
그래도 분명 정이 많은 남자였다.
조원정, 석린, 이영진에게 벼슬을 주고 귀양을 흥화진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현수야.”
“네.”
“송나라 약제 말이다. 계속해서 들여올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너도 뭐 알아볼 건 알아봤을 거 아니냐.”
“아…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약재는 최대한 비싼 약재들로 해야 합니다. 웅담, 쓸개, 사향, 침향 이런 거 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약초는 고려 전역에서 나는 약재를 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가격도 그렇지만 나중에 송나라와 교역에 차질이 생겨 약재가 제대로 들어오지 못한다면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병사들에게 약 한 첩 못 쓰는 상황이 초래하면 그게 후에 더 문제가 될 것입니다.”
현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보는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역이 끊어지면 어떻게 해서든 국내에서 구해서 사용해야 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있느냐?”
“개경의 내정이 잡히는 대로 전의감 태의, 어의와 함께 상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수는 고려의 한의학 지식과 현대의 한의학 지식을 나누어 볼 생각을 하였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이 보이느냐?”
“예.”
수십여 개의 두루마리들.
그중에 이의방이 두루마리를 하나를 들었다.
“전부 다 비리에 관련된 것이다. 혜민국뿐만이 아니야. 물론 이리된 것에 내 탓도 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파헤쳐 나온 것들이 이 정도다. 계속해서 한 곳을 뜯어보면 비리가 상상 그 이상이니… 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개경에서만 올라온 것들이 이 정도인데 내일이나 내일모레는 얼마나 쌓여있을지가 참…….”
이의방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개경에만 계속해서 비리가 보고가 되어 들어오고 있다.
“현수야…….”
“예. 합하.”
“혜민국 일을 처리 하는 대로 남쪽으로 내려가 살피어 보거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그동안 나는 여기서 일을 처리하며 잡아 놓을 만큼 잡아 놓을 것이니… 너는 내가 말한 대로 좀 다녀오너라. 그리고 남쪽에서 조사할 때 반드시 뒤를 조심해야 한다.”
이의방의 말에 현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답하였다.
“알겠습니다. 합하.”
“생각보다 힘들 것이다. 귀족들은 사병을 데리고 있지. 마음만 먹으면 지방 관리도 죽일 수 있는 놈들이야. 특히나 경상도에 있는 삼한갑족은 태조 성조 때부터 권세를 누리던 집안이다. 나도 그 내력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듣기로는 김부 쪽이라 하던데. 부디 조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합하.”
삼한갑족 김부라고 하면, 신라의 마지막 황제 경순대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침으로써 왕건이 자주적 삼한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도왔다.
그로 인해 삼한은 마침내 자주 통일이 되었다.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말이다.
“합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적들은 어떻게 하실 요량이신지요. 제가 듣기로는 왜구뿐만이 아니라 양수척들까지 해적질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왜구로 변장하여 약탈을 일삼는다고 하옵니다. 그뿐만이 아니오라, 향, 부곡, 소 의 백성들은…….”
쾅!
“누가 백성이냐!”
이의방은 화를 내자, 현수는 고개를 숙였다.
“향, 부곡, 소… 이들은 고려의 백성이 아니다! 양수척에도 못 끼는 놈들이란 말이다. 고려가 세워질 때 나라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태조 성조께서 통일을 이루시려고 했을 때도 끝까지 저항하여 태조 성조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한 장본인들이다! 마땅히 이 나라의 역적의 자손들인데 그런 집안을 어찌 백성이라 하느냐!”
“그 조상이 죄가 있는 거지… 그 후손이 무슨 죄이옵니까?”
“어허, 그 뿌리가 역적의 뿌리인데 그 뿌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하다! 그게 나라의 법이야!”
“그럼 향, 부곡, 소에 있는 백성 모두가 역적이라는 겁니까?”
“…대체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그들도 백성이자, 양민입니다. 그들도 생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합하.”
“아니, 왜 그토록 그놈들을 생각하는 것이냐?”
이의방의 물음에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걱정하시는 북방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만약 외세가 남쪽까지 내리쳤을 때 향, 부곡, 소의 백성이 길잡이를 하면 정말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닙니까.”
현수는 북쪽의 일을 예로 삼아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망이, 망소이의 난 때문이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1년 이상을 조정과 싸운 민란이다.
망이, 망소이는 소의 곡민 출신들이고 이 난으로 인해서 고려는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사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 현수였다.
이의방은 현수의 말에 역시나 깊이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본래 향, 부곡은 통일 신라 시대 때부터 존재하였다.
마을단위가 큰 죄를 범하였을 때 군, 현에서 격하시켜 버린 것이 바로 향, 부곡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소는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야 만든 것이었다.
이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양민이라고 해도 혜민국의 혜택은 물론, 어떤 것도 받을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