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50화 (50/159)

050화

“혜민국 관원 인원이 모두 어찌 됩니까?”

“예? 아, 예… 너무 많아서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면 제가…….”

“…되었습니다. 약재 창고 좀 보죠.”

“…예!?”

관원은 순간 당황한 듯 소리를 높였다.

관원의 옆에 있던 의관들도 조용히 눈치를 보자, 현수는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장부 좀 주실래요?”

“아… 저…….”

“왜요? 설마 혜민국에서 장부도 관리 안 하는 건 아니지요?”

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식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현수에 관원과 의관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본래 혜민국 관리는 관원이 하지만, 관원이 종종 상관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상관은 관리 상태를 눈감아 주곤 했다.

그게 벌써 4년 전이었다.

그전부터 신료들은 혜민국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호부로 올려보내면 그만이었고, 호부에서는 혜민국에 맞는 예산을 보내었다.

그렇게만 수년… 아니, 십 년 이상 혜민국을 관리해왔다.

정중부 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이의방은 혜민국에 관심도 가지지 않아서 관원들이 방심한 것이었다.

“저… 장군.”

“말씀하세요.”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저희들이 따로 보고를 올리겠사옵니다. 그러하니 일단…….”

“아… 알겠습니다. 그럼 둘러나 보고 가지요.”

“예! 모시겠습니다!”

안 봐도 뻔한 상황이다.

혜민국은 내부에서 남은 돈을 다 해쳐 먹은 것이다.

‘호부에는 적어 놓았으려나?’

잠시 속으로 생각하는 현수였다.

“이곳이 약재창입니다.”

관원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약재 창고 밖에서 약초들을 의관들이 직접 말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뭐 하는가! 어서 인사드리게!”

관원의 말에 의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현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아니, 약초 관리하는 이는 없습니까? 의관들이 직접 말려요? 밖에는 환자들이 천지인데.”

“그, 그것이…….”

“그럼 여기 관원분들은 대체 뭐 하는 겁니까?”

현수가 인상을 찡그리며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가 살피어 보니 약재 태반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약재는 언제 채웁니까?”

“아, 여기 의관들이 살피어 본 후에 약재를 채우고 있습니다.”

자꾸 뭔가 숨기려고 하는 관원 때문에 더 알아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현수는 아무런 말 없이 창고 전체를 빈틈없이 살펴보았다.

이곳 고려에서 수개월 동안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이야기도 해보고, 형부에서 일도 해보고, 문화를 배워가면서 국자감 일을 맡아 보니, 어느새 사람 보는 눈이 생겨 버렸다.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고,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대충 목소리를 들어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말없이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사기꾼인지, 사기꾼이 아닌지까지 판가름을 낼 정도의 안목을 가진 현수에게 관원의 말은 그저 거짓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약제가 이 정도밖에 없는데… 저들에게 약을 먹인다고?’

매우 의심쩍은 것들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밖으로 나갔다.

관원들 역시 현수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전의감(典醫監)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의감은 의학 전체를 총괄하는 곳이었다.

전의감은 의과 시험을 내기도 하는 등 고려 의학의 전반적인 것을 도맡아 하고 있다.

만약 전의감에서 혜민국의 사정이 이렇다 하는 것을 몰랐다고 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것이라면 당장 전의감부터 뜯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 뭐라도 나올 것이니 말이다.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약을 달이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는 탕약 방에 들어서자, 약을 달이던 시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었다.

“개의치 말고 계속들 하세요.”

“…….”

노비에게 존대하자, 공노비 시녀들은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아 계속 약을 달였다.

관원 역시나 현수를 이상하게 보았다.

대체 왜 노비들에게까지도 존대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현수는 개의치 않고 시녀들이 계속해서 약을 달이는 모습을 보았다.

정성 그 자체인 모습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한쪽에는 벌써 약이 다 되었는지 약탕기를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녀가 보였다.

이에 현수가 천천히 다가갔다.

“약이 다 된 건가요?”

“예…….”

“어어!”

뒤에서 관원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는데 현수가 가로막자 입을 막았다.

“봐봐요.”

현수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발 위에 삼베 주머니를 올리고 약을 따랐다.

주머니에서 약재들이 떨어져 나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것도 약이라고 달인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자에게 주는 약임에도 정확한 중량 따위는 없었다.

그냥 한 모금 마시면 끝이 날 양이었다.

현수는 약사발을 들더니, 관원에게 들이밀었다.

“이것도 약이라고 지은 건가?”

존대하던 현수가 처음으로 관원에게 반말했다.

좋게 말해서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파악한 것이다.

“저… 자, 장군… 그런 것이… 아니오라…….”

빠악!

정말 개돼지에게도 이렇게는 먹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사람이 먹는 약이 아니었다.

나라에서 백성을 치료해 주라고 내어 준 재물이었는데 이를 이용해 온전히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운 관원과 의관들을 당장 형부로 끌고 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왔으니 어찌하겠는가.

현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각오들 해.”

현수는 그렇게 경고를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관원과 의원들은 곧장 현수를 쫓아갔다.

“장군! 장군! 제발… 제발… 넘어가 주십시오… 넘어만 가주신다면… 사례를 꼭 하겠습니다.”

뭐라고 짓거리든 말든 현수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관원과 의원들은 계속해서 애원하며 따라붙었지만, 현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 * *

현수는 저녁이 돼서야 저택으로 들어왔다.

“식사는 하셨습니까요…….”

노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는 안채로 들어갔다.

노비는 고개를 숙이며 신발을 정리 해주고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현수의 저택은 웬만한 정승 집 못지않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얼마나 큰지 노비만 약 30여 명이나 되었다.

노(奴)만 20명, 비(婢)는 10여 명이다.

이 중 대부분의 노(奴)는 무예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각 귀족 집에서 만들어낸 사병, 즉 노군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주인을 잃은 노비들이 다시 팔려 나와 현수에게로 온 것이었다.

“하아…….”

방안으로 들어온 현수가 무거운 경번갑부터 벗어버리고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쿵!

묵직한 경번갑을 벗자, 현수는 기진맥진하듯이 침상으로 가서는 털썩 주저앉았다.

반쯤 누운 채로 비갑과 호갑마저 벗고서 홀라당 침상에 누워 버린 현수가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였다.

“생각보다 개판이네… 개판…….”

심각한 수준이었다.

대체 무신정권이 들어선 후로 대체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현대의 국사책도 이들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권력을 휘둘렀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냥 사건 위주로 요점만 정리한 게 다가 아닌가.

자세히 보고 싶다면 고려사를 읽어보면 되지만, 그 역시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특히나 현재 개경의 내정 상태는 말로 다 표현 못할 지경이었다.

혜민국의 상태도 아주 개판이었다.

그나마 시전 왈자들은 정리를 해서 다행이었지만, 개경 귀족들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는 백성들도 있었으며 개경을 떠나려고 하는 백성도 있었다.

끝내 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개경을 떠나 산으로 가는 백성들도 있었다.

특히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족 중 하나가 판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소문이 안 좋냐면 그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매번 저잣거리의 물건들을 가노(家奴)를 보내어 억지로 빼앗아오게 하고 값을 치러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화가 난 장사꾼과 시전 상인들이 값을 받으러 가면 오히려 매타작을 해 쫓아낼 정도라고 하였으니.

황족이 이러한데 귀족은 또 어떻겠는가.

현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탁상으로 가서는 갑옷을 제자리에 걸쳐두고, 다시 자리에 앉아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제일 개경의 제일가는 쓰레기들의 이름을 말이다.

[소성백 왕공 부인은 인종의 딸 영화 궁주. 성품이 좋지 않다. 가노를 시켜 매번 저자에 장사꾼들과 시전 상인들의 물건을 빼앗아오게 하는데 땔감, 과일, 채소부터 시작해서 돼지까지 가져오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시전 상인들은 소성백의 가노들이 나올까 매일 같이 불안에 떨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대장군 정존실. 성품이 포악하고, 제 마음대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다. 또한 뇌물을 받아 음서로 들어오지 못할 귀족 집 자제들을 제 마음대로 관직을 주어 제 세력을 키우는 데 급급해 있다.

장군 정세유.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정식으로 허가를 낸 개경 시전 상인들을 핍박하여 강제로 내쫓았다. 돈을 준 상인을 그 자리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하니, 기존 시전 상인들에 원성이 자자하다.

전중시어사 김시준. 소성백 왕공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현수는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들은 대로 적어나갔고, 옆에 그들의 행실 역시 적어나갔다.

마치 살생부를 적어 가듯이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현수는 중방에 들려서 이의방에게 어제 써놓은 것을 전달해 주었다.

명단이 이들의 행실이 어떠한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혜민국 관련된 내용까지 모두 적어 알렸다.

점점 내정의 관한 문제들이 속속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새끼들이… 현수야!”

“예.”

“이 새끼들 전부 다 공역장으로 보내버려!”

이의방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조사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한 이의방이었다.

“그리고 음서가 안 되는데 관직에 올라간 놈들도 전부 다 잡아서 공역장으로 보내버려! 알겠느냐!”

“예! 문하시중!”

현수는 목례를 한 뒤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뭘 해!”

꼭 말썽을 부리는 놈들이 있다.

이의방의 말 한마디에 한 번 더 정리될 순간이었다.

“저… 혜민국은…….”

“혜민국은 어사대와 전의감에 전하여 샅샅이 살피라고 해라.”

“예. 문하시중.”

“여봐라! 당장 돈장, 박존위를 들라 하라!”

이의방의 외침에 밖에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내정은 반드시 잡아 놔야 한다.”

내정부터 바로잡겠다고 굳은 의지를 보이는 이의방이었다.

이의방은 현재 모든 것을 제대로 잡아보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처리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인력 부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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