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개경뿐만이 아니라 철원, 남경, 동경, 서경, 보성, 나주, 김제, 제천, 안동 할 거 없이 현령들이 전부 다 잡아서 올려보내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은 현재 조정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귀족들의 수탈이었다.
정중부를 처단함으로써 나왔던 토지 문서들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지역별로 정리하기조차도 너무 버거웠던 토지 문서들을 이름별로 정리하였다.
대부분이 빼앗긴 것이라, 이의방이 호부에 전하여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문하시중, 상장군들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이의민, 박존위, 돈장, 이영령, 최숙청, 김덕신이 안으로 들어와 군례를 올리었다.
“지금의 상황 보고를 듣고 싶은데.”
“예. 각 6위 훈련은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또한 공역 현장에 군사들 파견할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사옵니다.”
“6위의 군사들은 이 나라의 정식군대이니, 절대 소홀히 하면 안 되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문하시중.”
“별다른 일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하던 대로 진행하게.”
“알겠사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고 손짓을 하자, 상장군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중방 최고 권력자가 된 이의방은 할 일이 없었다.
그냥 명을 내리면 알아서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더불어 6부에서도 각 관원들에게 사령장을 내리다 보니, 하급관원들도 꽤나 늘어나 항시 문제가 있던 육부의 일도 일사천리 진행이 되고 있었다.
여기서 이의방이 할 일은 그저 보고, 듣고, 수결하고, 황제의 재가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황제도 이의방의 말이라면 대충 훑어보고서는 어보(御寶)를 찍어서 다 통과시키고 있었다.
“현수야, 너 경대승하고 이의민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거 넌 알고 있지?”
“예? 그건 저 말고도 다 알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 이의민 상장군과 경대승 상장군이 만나지 못하도록 따로 좀 떨어트리신 거 아닙니까?”
“그래. 맞다. 근데 자꾸 불안해. 떨어트려 놓아도 안심이 안 되는구나.”
역사대로라면 이의민은 경대승을 굉장히 두려워해야 했다.
경대승은 황제를 시해한 역적이라고 하여 도방을 설치해 장사들을 모집해서 이의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물론 도방 설치 전에는 장사들을 모아 정중부를 척결하였지만, 현재 이 고려는 이의방이 최고의 실권자였다.
“별일 있을까요?”
“없어야지… 경대승은 나이가 젊어. 너랑도 얼마 차이가 안 나. 그런데… 사람이 너무 올곧아 탈이지.”
“…….”
“지난번에 서북면병마도사가 보내온 것과 동북면병마도사가 보내온 것들 있지?”
“아, 그 예산 말입니까?”
“그래. 그 예산 말이다. 이미 황실에는 가득 채워 놓았어. 이제 그걸 분배를 해서 각 먼저 북방으로 보내야 해. 개경, 서경, 남경, 동경, 안북, 안서, 안변, 안남 도호부 역시나 마찬가지야. 개경의 군기 감장은 내 아우가 맡고 있어서 문제는 없겠지만, 내가 말한 곳에는 군기감이 있지. 그곳에서 모든 보급, 병기, 갑옷이 나오니, 그곳에도 보내도록 하거라.”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분주하게 명을 내리는 이의방이었다.
만일 몽고가 온다고 하더라도 수십 년 후이니, 차분하게 준비해도 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현재의 이의방의 의중을 알 길 없는 현수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만…….”
“그래. 말하거라.”
“고려에서 쓰이고 있는 약재가 대부분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나도 약재나 이런 것에 대해 모른다만… 대부분의 약재는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약초는 몇 가지입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느냐. 그건 전의감에 전의들에게 물어봐야지. 네가 전의인데 내게 물으면 어찌하냐.”
순간 아차 싶었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잠시 잊었어요.”
“젊은 녀석이 정신머리 하고는… 그만 나가봐. 아, 그리고… 혜민국(惠民局) 좀 들려서 살펴봐.”
“예. 문하시중.”
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자, 이의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꿈은 꿈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면 저 북방 쪽이 더 시급해. 남쪽은 현수를 보내어 천천히 살피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차근차근 남쪽 일도 처리를 해야겠군.’
이의방은 홀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거도 그러하고… 정말 복잡하구나…….’
우학유의 말처럼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 알아볼 건 알아보고 들은 건 듣고 있는 이의방이었다.
하지만 분명 한계치가 있었다.
신료들이다.
문신들을 믿지 못하여 주요 관직에 전부 무신들만 앉혀 놓았던 일이 이제 역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육부에 상서들은 한숨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었고, 하급관원들 역시 사령장으로 개개인의 능력대로 각 부서로 보내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이걸 타계하기 위해서는 과거 아니면 음서밖에는 없었다.
음서로 뽑아보자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종 때처럼 이상한 놈들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다.
또 모두 죽여 버린다면 과거고 나발이고 다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문하시중, 천시호이옵니다.”
“들어오거나.”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6위 장군 천시호가 안으로 들어서며 군례를 올리었다.
“문하시중, 시중께서 처리하라고 하신 일들을 마치고 오는 길이옵니다.”
“그래. 애썼다.”
국정을 황제 대신 총괄하다 보니, 이의방은 계속 중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안 부하들은 대부분 알아서 찾아와서 보고하니,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지요.”
천시호의 말에 이의방은 아까 현수가 하고 간 이야기가 떠올라 재차 물었다.
“고려에서 대부분 사용하는 약재가 송나라에서 나오는 약재냐?”
“예. 그러하옵니다만…….”
“그럼 우리 고려에서 사용하는 약재는 얼마나 되느냐?”
“아, 예.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송나라에서 들어오는 약재들은 귀족들이 자주 애용하는 편입니다. 주로 쓰거나 먹는 약재에 들어가옵니다.”
“그럼 말이다… 송나라와 약재 거래가 끊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약재가 씨가 마르고, 다들 흔한 병에 걸려서 약 한 첩 못쓴다는 상황이 된다면… 고려는 어떻게 될까.”
이의방은 아주 진지하게 천시호에게 물었고 천시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답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일 것이옵니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약초들 중에서 말이다. 송나라 약초와 고려의 약초를 비교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송에서 온 약초 대신 고려에서 나오는 약재들을 쓴다면 말이다.”
“위위경, 저는 한낱 약초꾼이라… 전의를 불러 여쭈어보시는 것이…….”
“간단히만 답해 보거라.”
“아, 예… 송에서 들여오는 약재 대신 우리 것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낼 수가 있사옵니다. 물론 고려에서 나는 약재들을 쓴다면 값은 더 저렴해질 것이옵니다.”
“전의들도 아는 사실이냐?”
“예. 시골 촌구석 의원도 아는 사실이옵니다.”
“…….”
송의 약재는 그냥 귀족들의 사치에 불과했다.
“허나, 꼭 송에서 들여와야 할 약재들은 있습니다. 감초나 계피 같은 것이옵니다. 또한 우리 고려에서 나오는 약초라도 맛좋은 것은 아니옵니다. 가끔은 오히려 송의 것이 더 좋기도 하옵니다.”
천시호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말이야… 화살촉에 박히고, 칼에 찔리고, 베이고… 그런 자상을 입었을 때는 송에서 나온 약초를 사용하느냐?”
“송구하옵니다. 소장은 그 부분까지는 잘 모르옵니다.”
“알겠다… 나가는 길에 전의를 부르도록 해라.”
“예. 문하시중.”
천시호는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정말 살펴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국정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처음 느낀 이의방이었다.
최고 권력자가 되면 뭐 하는가.
할 일이 많고 살펴야 할 게 태산인데.
이의방은 내심 속으로 가슴을 쳤다.
죄 없는 문신들을 너무나도 많이 때려죽였다는 것에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는 몰랐다.
문신들만 없으면 자기 세상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정말 미친 짓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알면 알수록 복잡하기 그지없구나. 정말 어디서부터 잡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현수에게 지방 남쪽을 돌아보라고 시켜도 현수가 얼마나 부패를 잡아낼 수 있을지가 문제야… 그것만 어느 정도 잡아낸다고 하더라도 좋을 텐데… 아! 여봐라!”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것인지 이의방은 크게 외쳤다.
덜컹.
방문이 열리며 녹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예. 문하시중. 찾아 계셨사옵니까.”
“형부상서, 호부상서, 공부상서 모두 들라 하라.”
“예. 문하시중.”
명을 내리기만 하면 척척 움직이는 녹사들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 * *
개경 남서문 쪽에 새워진 혜민국.
그곳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아픈 이들이 혜민국을 채웠다.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아이들과 노인들이 먼저 들어가서 진료를 보고, 남녀는 급한 환자가 아니면 들여보내지 않고 있었다.
“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의원들이 밖에까지 나와서 병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급하지 않은 자들을 살피며 응급처치만 할 뿐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혜민국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현수를 알아보는 이들은 대부분이 고개를 숙이었다.
“…어?”
지나가던 의관이 현수를 알아보고서 급히 발걸음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갔다.
현수는 보지 못하였다.
“하아…….”
길바닥에 노인들이 주저 앉아 있었고, 아이들 역시나 힘없이 앉아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혜민국은 환자들로 가득 차버린 상황이라, 더 이상 환자를 눕힐 곳도 없는 그야말로 포화 상태였다.
약을 달이는 의원도 있었고, 아이들에게 침을 놓고 있는 의원도 있었다.
인력 부족한 혜민국을 보니,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혜민국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혜민국 관원이 급히 뛰어와서는 현수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여기 혜민국 관리 책임자입니까?”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현수의 물음에 관원이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웬만하면 현수를 모를 사람은 없다.
현재 최고 권력자이자, 실권자 이의방을 옆에서 모시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혜민국의 인력이 부족한 겁니까?”
“아, 예…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아부하려고 하는지 손을 싹싹 비비는 관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