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그럼 이리 하십시다. 중서시랑평장사, 좌승선, 우승선, 추밀원사, 부사들이 주체하여 이번 일에 공이 있는 자들을 살펴 내게 알려주십시오. 추가할 부분이 있으면 추가하여 황제 폐하께 재가받는 거로 합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위위경, 하옵고… 문신들의 인사에 대해서는…….”
“그것도 올리시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중방에서 의논하여 올리고 다 같이 상의를 해봅시다.”
윤인첨은 이의방의 말에 고개를 숙이었다.
“그나저나… 재물들은 지금 얼마나 있소? 정중부에게 회수한 재물들 말이오. 아직도 많다고 들었는데.”
“아, 예. 호부에서 조사하여 올릴 것입니다. 위위경.”
“이참에 올릴 거 있으면 다 가져와 보시오.”
“예…….”
윤인첨의 말에 이의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중방의 신료들은 의논에 들어갔다.
* * *
중방에서 회의를 마친 후, 저택으로 돌아온 이의방은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가려워 죽겠구나.”
“나으니까 간지러운 겁니다. 그리고 긁지 마세요.”
현수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도 적당히 하세요. 상처 곪습니다.”
“하하하, 오냐. 알았다. 그나저나… 양수척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면서. 왜 그리 한 게냐? 양수척뿐만 아니라, 개경에 있는 거지들한테도 나누어 주었다고 들었다.”
“너무 많이 주셔서요. 제가 쓸건 따로 빼놓았거든요.”
“허, 싱거운 녀석… 물론 내가 준 거고, 네가 알아서 쓰는데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아니, 그러… 으억!”
천의 매듭을 꽉 조여 버리자,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아! 살살해.”
“아… 죄송합니다.”
현수는 살짝 천을 푸르고서 다시 천천히 천을 감았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느냐?”
“앞으로… 한 달 정도요.”
“그, 그리 오래 걸려?”
“예.”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현재의 상처로 보면 한 일주일, 늦어도 이 주 정도면 아물 것으로 보였지만, 혹시 모르니 넉넉잡아 이야기한 것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면 이의방의 성격상, 술은 계속 먹을 것이고 그러면 상처는 곪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래도 권력자는 권력자인지 개경에서 내로라하는 전의(典醫)들도 와서 이의방의 상태를 확인하고 갔으나, 이의방은 전의들의 치료를 뿌리치고 모든 치료를 현수에게 맡기었다.
“조만간 논공행상이 있을 것이다. 너에게도 상응하는 자리가 내려갈 것이다.”
“아, 네…….”
대한민국 고삐리 인생에서 벼슬을 탄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나 어쩌겠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응해야 했다.
현수는 차라리 고려라는 나라로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잘못되어 조선으로 떨어졌을 걸 상상하니 정말 소름이 돋았다.
완전 꽉 막힌 선비들은 사대(事大)가 어쩌니저쩌니 할 것이고, 유교부터 시작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이어 나갈 것이었다.
자유라는 것은 눈곱만큼 찾아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 아닌가.
그에 비해 고려는 정말 천국이었다.
천국 고려, 지옥 조선.
대한민국을 왜 헬조선이라고 했는지 고려 시대에 와보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제가 할 일은 뭔가요?”
“글쎄다. 일단은 그… 네가 말한 글자 말고, 한자는 아느냐?”
“아… 네. 알죠.”
“그럼 되었다. 조만간 논공행상이 끝난 후에 중신들 앞에서 네가 만든 글자를 알려주거라. 그리고 혹시나 반대하는 놈 있으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니, 신경 쓰지 말고.”
역시 권력자는 달랐다.
확실히 이의방에게 덤빌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네가 정주 유씨라고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이의방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족보라도 찾아보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현수는 족보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궁금하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의방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현수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라면 이의방은 죽고, 실권자는 정중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역사가 뒤바뀌었다.
그러니 이의방이 앞으로 어떻게 나갈지 궁금한 것이었다.
“글쎄다. 우선 두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일단 저 북방이 걱정이라… 북방부터 안정되게 해야 하는데 말이다… 서북면병마도사가 소식을 전해오는 대로 준비할 것이다. 동북면도 마찬가지고.”
“그럼 남쪽은요? 북방은 관리하고, 남쪽은 관리 안 하세요?”
현수가 말하는 남쪽은 전라도, 경상도였다.
고려는 무역 국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군사력도 강하고, 무역도 왕성해서 평화로운 나라였다.
다만 중간중간 왜구의 침입 때문에 전라도, 경상도에 문제가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수척이 왜구를 가장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일까지 있었으니 조정에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네가 가거라.”
“…네?”
“생각해보니… 네가 가는 게 좋을 듯싶구나. 논공행상이 끝나고 정리가 되는 대로 내려가거라.”
“설마 저 혼자요?”
“그럼 누구랑 가려고? 오히려 많이 내려가면 좋지 않아. 현수야, 내 말 잘 들어라. 내려가서 남쪽의 귀족들을 잘 살피거라. 귀족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나에게 보고해라. 여차하면 귀족들을 잡아들여도 좋다. 그렇게 해서 남도 백성들의 불만을 재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이다. 남도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생활을 하는지도 모두 보고하고.”
남쪽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의방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이 있어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 하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을지가 모르겠는데요…….”
“그런 생각 말아라. 북방이 점점 심상치가 않아… 그래서 북방에 내 측근을 몰아넣을 생각이다. 남쪽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온다면 나는 이제 네게 중책을 맡길 것이다.”
“…….”
현수는 이의방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북방이 심상치가 않다.
그건 몽골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몽골이 쳐들어오는 건 빨라도 40~50여 년 후였다.
뭔가 맞지 않았다.
“저 북방이 심상치가 않다니요?”
“불안해서 북방의 경계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고만 있어라.”
“…예.”
* * *
“황제… 정말 위위경에게 모든 걸 맡긴다고 하셨소?”
태후의 말에 명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태후마마.”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지르신 것이오!”
“이미 이 나라의 실권은 위위경에게 갔습니다. 반대했다간 어찌 되겠습니까.”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황제!”
태후는 노발대발해대었다.
정말 자식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따귀라도 날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위위경의 말대로 하라는 건 황제가 그저 완전히 허수아비라고 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태후마마, 왜 그리 보시옵니까? 소자가 마음에 안 드시옵니까? 그럼 왜 소자를 이 자리에 올라오게 하셨사옵니까.”
자신을 정말 한심하게 보고 있는 태후에게 황제가 하소연하듯 말하자, 태후는 두 눈을 감고서 몸을 돌아섰다.
“다 부덕한 내 탓이오. 황제를 원망하지는 않소이다. 이렇게라도 황실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열성조의 은덕이지…….”
태후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황제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것을 펼쳤다.
그건 태조가 죽기 전에 남긴 유훈(遺訓)이라 할 수 있는 훈요 십조였다.
역대 황제들이 틈만 나면 이 훈요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마음가짐을 다잡아 왔으나, 의종은 그렇지 못하였다.
초반에만 잘하다가 결국 끝이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아… 태조의 유훈을 본받지 않아 받은 벌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슬프고 슬픈 일이로다…….”
명종은 훈요를 들여다보며 작게 읽어 내려갔다.
─태조께서 박술희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들으니 순임금은 역산에서 농사짓다가 마침내 요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이었고, 고제는 패택에서 몸을 일으켜 한의 황제가 되었다. 짐도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몸을 일으켜 외람되게 여러 사람들에게 추대를 받아 여름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면서 몸을 태우고 생각을 수고롭게 한 지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고…… 이제는 병이 들어 내가 죽어 가는데 짐의 대를 이어받을 후사가 마음대로 정사를 보고 어지럽혀 세상의 민심과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그것이 근심과 두려움으로 남아 아직 눈을 감지 못하니, 지난 날의 나의 가장 충직한 신하인 술희를 불러 훈요를 할 것이니, 술희는 받아 적도록 하라. 짐이 후세에 전하니 바라건대… 밤낮으로 읽고 또 읽어 귀감이 되도록 바라노라.
태조의 글귀가 가슴을 울리었다.
마치 후대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십조를 마저 쭉 읽어 내려갔다.
─첫째,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수도하게 함으로써 각각 자신의 직책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의 청탁을 받아 각자의 사사를 경영하며 서로 싸우며 바꾸고 빼앗는 일을 결단코 금지해야 한다.
─둘째, 여러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미루어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이르기를 ‘내가 점을 쳐 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덧붙여 창건하면 지덕이 줄어들고 엷어져 조업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이나 공후, 후비, 조신이 각각 원당이라 일컬으며 혹시 더 만들까 봐 크게 근심스럽다. 신라 말에 다투어 사원을 짓다가 지덕이 쇠하고 손상되어 결국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도록 하라.
정말 맞는 말이다.
신라에서는 수없이 수많은 절을 세웠다.
훈요십조의 벗어나는 행위를 계속해왔다.
나라에서는 선종, 교종 승려들의 청을 받아 이곳저곳에 절을 지어 주었고 당시 권신이었던 이자겸은 더욱더 승려들의 청탁을 받아들였다.
결국에는 선종, 교종이 크게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
─셋째, 적장자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 비록 상례이기는 하나…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은 참으로 공정한 마음이었다. 만약 맏아들이 불초하거든 그다음 아들에게 주고, 그다음 아들이 또 불초하면 그 형제 가운데 뭇사람들이 추대하는 왕자에게 물려주어 대통을 잇도록 하라.”
‘내가 황제가 될 위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받으면 아니 되는 것이었어… 받아야 했다면 대녕후가 받았어야 하였다.’
황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훈요를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