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45화 (45/159)

045화

“와…….”

선물을 풀어보니,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특히나 금덩이, 은덩이, 옥, 비단 등은 산만큼 쌓여 있었고, 상자에는 뭐가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이의방의 두 처는 자신을 남편의 은인이라 생각하면서 손수 수발까지 해주고 있었다.

부담스러움에 당장 이곳을 탈출하고 싶을 정도였다.

손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도 못 할 정도로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갑이 형도 집으로 돌아갔고… 이거 진짜 혼자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뛰겠네. 할 것도 없고 더군다나 저거 다 어떻게 정리를 해…….’

현수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저것들을 어디에다가 쓴다는 말인가.

이의방 쪽에서 일단 먹여주고 재워주니, 돈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었다.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챙겨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현수는 가방만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래 X발… 어차피 여기서 살 거 나 잘되면 되는 거 아니야?’

현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고서 소은병 몇 개와 금병, 화폐를 가방 속에 넣었다.

은병 20개, 금병 20개, 화폐 두 주먹을 가방에 넣으니 가방이 꽤 묵직해졌다.

“이 정도면 좋고.”

현수는 가방을 다시 닫고서 방안에 놓았다.

이제 현수가 주위에 노비들을 손짓하며 부르자, 노비들이 왔다.

“이거 다 옮길 건데 도와주세요.”

“예!?”

처음으로 들어본 존대에 노비들은 넙죽 허리를 숙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 이놈의 나라… 진짜 적응 안 되네……….’

“수레… 수레! 가져와서 옮기자.”

“아, 예예!”

노비들은 현수의 말에 바로 움직였고, 현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 *

얼마 후.

노비들이 수레를 가져와 짐을 모두 싣자, 현수는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의 저택의 노비들은 의아한 얼굴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조씨와 임씨 역시 현수를 붙잡으며 물었다.

“아니… 이걸 어디다 쓰려고 하는가. 필요하면 내게 말하시면 되는데요…….”

“저는 이게 다 필요가 없으니, 나누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뭐, 뭐라고요!?”

조씨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그래도 이의방께서 주신 재물인데…….”

“하하하하하”

현수는 웃으면서 당당하게 나아갔다.

“자, 저기로 가자!”

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소리치면서 수레 위에 올라탔다.

‘살아야 한다. 재물 따위 필요 없어. 하하하하하!’

속으로 웃으면서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자! 모이시오! 여기 있는 것들을 다 나누어 줄 테니! 모이세요! 모여!”

짝짝짝!

현수가 박수까지 치면서 계속 외치자, 사람들이 천천히 수레로 다가왔다.

제일 먼저 온 아이에게 현수는 수레에서 옥을 하나 집어서 주었다.

“자, 받거라. 이걸로 맛있는 거 사 먹어라!”

“네…….”

옥 하나를 받자, 아이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옥을 자랑했다.

이에 주위 사람들의 눈이 뒤집어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수레로 달려 들어왔다.

“자, 가져가세요! 가져가요! 전부다 가져가! 하하하하하하!”

“어머… 세상에…….”

조씨는 멀리서 현수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구만… 어떻게 저 많은 재물을 백성들한테 다 줘 버린다는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위위경의 인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씨 또한 현수의 욕심 없는 모습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현수에게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겨 갔다.

미어터지던 사람들은 점차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재물들은 현수가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며 나누어 주었다.

거지들에게 말이다.

“자, 이걸로 밥이라도 드세요.”

“고, 고맙습니다.”

거지 노인은 화폐를 냉큼 받아 들었다.

다른 거지들도 연달아 달려왔고, 현수는 한 상자 가득 담겨 있던 화폐를 땅에 뿌려 버렸다.

이에 거지들은 미친 듯이 화폐를 줍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나… 보자…….”

아직도 은병과 금병이 남아있었다.

현수는 금병 2개와 은병 2개씩 총 4개를 자신을 따라 나온 노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

“아,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받아!”

손에 꼭 쥐여주는 현수였다.

노비들은 금방 울음을 터트릴 듯 보였다.

평생 돈 한번 모아보지 못한 노비들이었다.

그런 노비들에게 망설임 없이 재물을 그냥 줘 버리는 현수는 부처 같은 존재였다.

정말 끝이 없다.

이의방이 준 재물들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았다.

그 많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남아 있는 재물들.

현수는 노비에게 물었다.

“여기 말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또 있더냐?”

“양수척이지요.”

“양수척?”

“예. 천하디천한 양수척이요.”

“…….”

양수척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양수척… 그게 백정이지… 아마?’

양수척은 본래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으로서, 일반 양민들과 섞이지 못한 채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따로 살아왔다.

이들은 자유분방함을 좋아하여, 양민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양수척은 고려에 발을 디딘 첫 세대부터 고리를 만들어서 팔거나, 사냥을 나가서 얻은 고기를 도축, 도살하며 살고는 했다.

훗날에 양수척을 양민화 하면서부터 백정이라 불렀는데, 본래 이 백정이라는 것도 본래 양민을 뜻하던 것으로 대부분이 농민들을 불렀던 용어였다.

헌데 양수척을 양민이라고 인정해 준다고 하니, 다들 이에 반대했다.

반대한 이들의 대부분이 양반이 아닌, 양수척과 같은 신분을 갖게 된 백성들이었다.

‘에이씨…….’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차별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느낀 현수는 몸을 파스스 떨었다.

“자, 그럼 양수척이 있는 곳으로 가자!”

“예!?”

“…….”

“양수척이요? 아니…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가신다니요… 설마 이걸 주려고 말씀이십니까?”

“거지들에게도 주는데 그들에게 못 줄 게 뭐 있어? 가자.”

“아… 예…….”

현수의 말이 옳다고 여긴 노비들은 현수에 말대로 양수척들이 사는 마을로 향하였다.

* * *

“뭐라고?”

그날 저녁, 저택으로 돌아온 이의방이 놀라 다시 물었다.

자신이 준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다녔다는 현수의 행동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그래서 어찌 되었소.”

“난리가 아니었지요. 백성들은 고맙다면서 허리를 넙죽넙죽 숙이면서 환호했습니다. 백성들한테 나눠주고 남은 건 거지들에게도 주었습니다. 하다 하다 양수척이 사는 곳까지 가서 재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조씨의 말에 이의방은 헛웃음이 나왔다.

“간땡이가 큰 놈이구만… 재물도 싫어해? 허허허.”

이의방은 허탈하게 웃었다.

“위위경, 그 양반 꼭 데리고 있으세요. 후원에 있는 사람이 그러는데… 위위경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리 말했나?”

이의방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조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하”

이의방은 좋다며 다시 웃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후원에 가세요, 심적으로나마 위위경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본처가 이리 말하니, 이의방은 살짝 미안함이 들었다.

“흠흠!”

이의방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자, 부인 조씨는 피식 웃었다.

“전 어디 도망 안 가니 다녀오세요…….”

조 씨의 말에 이의방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였다.

“고맙소. 부인. 내 그럼 다녀오리다. 하하하하.”

좋다고 또 웃으면서 밖으로 나가는 이의방의 모습에 조씨는 피식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의방은 중방 회의에 참석하였다.

정중부와 그의 일가를 어찌 처리할 것인지 결론을 내리는 자리였다.

더불어 이번 일에 공을 세운 이들의 논공행상(論功行賞) 역시 의논하는 자리였다.

“일단 정중부부터 정균까지 모두 공역장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나를 죽이려 하였는데 곱게는 못 죽이지.”

둘을 공역장으로 보내 고생을 시키다가 천천히 죽여 버리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이의방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의 공이 큰 이들을 벼슬을 올릴까 하는데… 이의민을 좌우위 상장군, 돈장을 신호위 상장군, 이영령을 흥위위 상장군, 박존위를 금오위 상장군, 최숙청을 천우위 상장군, 그리고 남은 자리는 서경 출신들로 해서 앉히든지 합시다.”

조위총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팠다.

그날 정말이지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러하니 서경 출신들을 상장군에 올려서 서경의 위세를 좀 더 올려주고자 하는 생각이었다.

“저… 위위경.”

“아, 말씀하시오.”

“폐하께서 모든 일은 위위경께서 직접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한문준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제가 재가(裁可)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를 한다는 말인가.

이의방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위위경이 모든 일을 직접 처리를 하면 재가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의민 대장군을 동벽상공신에 올리고, 문하시랑평장사 교지를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더불어 두경승 용호군 상장군 역시 서벽상공신에 올리고 우승선 교지를 내린다고 하였사옵니다.”

“아, 그건 아침에 들어서야 알았소이다. 그럼 추밀원부사가 말한 일 역시…….”

“예. 위위경의 뜻대로 하라는 폐하의 명이옵니다.”

이의방은 침을 꿀꺽 삼키었다.

황제의 말은 본인이 모든 국정을 운영을 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벼슬도, 세금도 전부 다 알아서 해서 가져오면 재가를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중서시랑평장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이의방은 윤인첨을 바라보며 물었다.

윤인첨은 현재 문신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다.

문신들을 대표하는 자가 윤인첨이었고, 신료들이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할 때는 윤인첨이 대신하여 말을 하고 있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신하가 된 도리가 아니올런지요.”

뭔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태후가 노발대발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황제가 이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니,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의방도 권력을 잡고 있지만, 사돈지간인 황실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는 싫었다.

집안이 개판 5분 전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정말… 매제의 말대로 해야 하는 것인가?’

순간 우학유의 말이 떠올랐다.

정치하라고 했던 말.

하지만 이걸 정치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정말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이준의 역시나 황제의 의중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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