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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44화 (44/159)
  • 044화

    “또한 이의방은 짐을 위하여 많은 공을 세운 공신이다. 짐의 명으로 이번 사태가 무사히 끝이 났으니, 대역죄인이 아닌 이상 모두 사면령을 내릴 것이다. 폐주이자, 선황을 시해한 이의민은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해 짐에 대한 충심으로 인하여 선황을 살인하였다. 따라서 이의민을 동벽상공신에 봉하고, 문하시랑평장사라는 교지를 내릴 것이니… 이의민의 반신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올리도록 한다. 두경승을 쪼한 서벽상공신에 봉하고 상서성 우승선 교지를 내릴 것이며 역시나 반신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올리도록 하라.“

    황제의 말을 받아 적은 학사 승지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 모든 권력이 황제가 아니라, 이의방에서부터 내려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황제는 진짜 허수아비나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내관이 승지가 쓴 것을 들고서 황제에게 보여주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경부터 시작해서 고려 전역에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승지가 알아서 적어 가져오라. 어보(御寶)를 찍어 알릴 것이니.”

    “예… 폐하.”

    승지는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관이 어지(御旨)를 적은 것을 다시 승지에게 건네어 주자, 고이 접어 품속에 넣고는 뒤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폐하.”

    “하아…….”

    승지가 나간 것을 확인한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의방의 걸림돌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어찌할꼬… 어찌…….”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위위경과 폐하는 사돈지간이온데 어찌 폐하를 위해(危害)할 수 있겠사옵니까.”

    내관의 말에 황제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폐하…….”

    “벼슬을 높여야겠지?”

    “…예?”

    “이의방의 수하도 벽상공신인데… 이의방의 더 벼슬을 높여야 하지 않겠느냐.”

    * * *

    한편 중방에서는 이의방과 조원정이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랏줄에 묶인 채로 들어온 조원정은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풀어줘라.”

    “하오나!”

    이영령이 이의방의 말에 까무라쳤다.

    그럼에도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자, 이영령은 어쩔 수 없이 오라를 풀어주었다.

    “가봐.”

    “위위경.”

    “어허! 가보라니까!”

    “예…….”

    이영령은 고개를 숙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술 한잔하겠느냐?”

    이의방이 술잔을 건네며 묻자, 조원정은 고개를 숙이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술잔에 잔을 채워지자, 조원정은 고개를 돌리며 술을 들이켰다.

    “한잔 더 주시오소서.”

    조원정의 말에 이의방은 다시 술잔을 채워주었다.

    조원정은 한 잔 더 마신 후에 잔을 내려놓았다.

    “미련한 놈… 나를 배신하면 상장군의 공부상서 그걸 준다 했다지?”

    “…….”

    “그래서 받았느냐? 공부상서는 무슨… 넌 평생 정중부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졌을 것이다! 이 한심한 놈아!”

    이의방은 크게 소리쳤다.

    “형님! 압니다! 알아요!”

    “뭐…? 알아…? 알면서도 나를 배신했다는 거냐?”

    이의방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형님 옆에서 이의민보다 오래 형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의민만 대장군이 되고, 저는 왜 대장군이 되지 못하는 겁니까. 형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전 이의민 못지않게 해왔습니다. 승려들 잡아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귀족들 때리라고 하면 때리고! 그렇게 개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짝.

    이의방은 조원정의 따귀를 때렸다.

    “내가 너를 개처럼 이용만 하였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개처럼 짖으라고 한 적이 있더냐. 이의민에게 대장군을 준 이유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하였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들 장군에서 대장군으로 승격시키려고 하였는데 왜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정중부와 손을 잡은 것이냐!”

    이의방의 말에 조원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본래 경군에 먼저 들어오게 된 건 조원정이었고, 조원정을 필두로 하여 지금 이의방의 측근들이 모여들었다.

    이의방은 마음 맞는 이들과 술도 마시고, 장난도 치면서 친동생처럼 대해 주면서 지내었고, 이들 모두가 이의방을 형으로 모시면서 살았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할 것 같았던 믿음은 조원정 때문에 무너져 버렸다.

    “죽여주십시오.”

    끝내 조원정은 죽여 달라는 말을 하였고, 이의방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원정아, 흥화진으로 가거라. 석린, 이영진… 이 둘과 함께 흥화진으로 가서 군사들도 정비하고 목책도 세우고 국경을 강화하거라. 그게 네가 사는 길이다.”

    “왜 저를 살려 주시려는 겁니까.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까.”

    “배신자이기 전에 넌 내 아우다. 형이 아우를 어찌 죽여.”

    이의방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조원정은 그런 이의방의 표정을 보자,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그러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 말을 건넸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조원정은 이의방에게 마지막 군례를 올리더니, 중방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술잔을 쥔 채 그날 하염없이 중방에서 눈물을 흘렸다.

    * * *

    며칠 후.

    모든 게 정상화가 되어 가고 있다.

    개경 시장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다시 장이 열리었고 불에 탄 민가 들은 군사들이 빠르게 수습하여 집을 지어 주었다.

    죽은 백성들에게는 이의방이 직접 위로를 하며 재물과 쌀을 내렸다.

    이러하다보니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은 덜어낼 수 있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것들 기억합니까?”

    “아… 예. 관문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내가 볼 때는 그곳에 관문을 짓는다면 정말 좋아 보일 듯해서 그러오. 서경으로 들어오는 곳에 관문을 설치하면 방어에도 유용할 듯하여 그러는 것이니, 그건 몰수한 정중부의 재물로 지을까 하오. 물론 부족한 비용은 황실에서도 충당도 하고 말이요. 어찌 생각하시오?”

    이의방의 말에 추밀원부사 한문준이 말하였다.

    “위위경, 말씀을 알겠사옵니다만… 인력은 어찌하실 것인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아, 그리고…….”

    이의방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어 펼치었다.

    “…….”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자요.”

    “예!?”

    “위위경?!”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신료들이었다.

    우리의 문자라니.

    “우리 고려의 문자라는 말이오. 한자가 어려워 알기 쉽도록 문자를 만든 것이오. 나 역시 이 문자를 만든 사람에게 다 배웠소이다. 이 문자를 고려에 반포한다면 글자도 모르는 백성들도 다 배울 수 있을 것이오. 나 또한 이걸 공부하는데 한 시진 밖에는 아니 걸렸소.”

    “…….”

    “저… 위위경… 아무리 문자라는 것이…….”

    “한번 배워보시오. 배워보면 그 답이 나오니까.”

    이의방의 말에 나설 자가 없었다.

    지금 이의방의 말은 곧 황명이나 같았으니 말이다.

    정중부를 끌어 내리고 현재 실권자는 이의방.

    즉 이의방에게 덤빌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국자감 학사, 한림원 학사들을 데리고 먼저 가르칠 것이고, 가르친 것을 학생들과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할까 하오. 따라서 공들이 좀 도와주어야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문준이 답하였다.

    “그럼 이 문자가 어떤 문자인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 이 문자가 한글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걸 쉽게 써 내려갈 수 있소이다. 이걸 배우면 사관들도 적어 내려가는 데 있어서 편해질 것이고, 또 이걸 배우면 글자 하나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니 좋은 거 아니요.”

    미소를 지으며 이의방이 말하였다.

    “한자라는 것은…….”

    “사돈, 한자가 송나라 글이지 우리 글이오? 물론 우리가 지금도 쓰고 있지만, 우리의 글은 없지 않소이까. 저 아랍에서도 지들끼리의 나라의 말과 문자가 있는데… 왜 우리는 가지면 아니 되는 것이오?”

    “한자는 다 그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 역시…….”

    “그럼 둘 다 배우시오.”

    “학자는 배움에 끝이 없다고 늘 말한 게 사돈이었소. 형님도 그랬으니, 형님도 배우시오.”

    “…나도?”

    “예. 설마 나도 배웠는데 안 배우겠다… 이 말이오?”

    “아, 아니네! 배우겠네!”

    이의방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이 한글을 가르쳐 준 이를 소개해줄 테니, 잘 이야기들 해보시오. 그럼 난 이만.”

    이의방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극겸이 말하였다.

    “위위경.”

    “왜 그러시오?”

    “개경뿐만이 아니라, 가능하시면 지방도 살펴 주심이 어떠하십니까? 곳간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지방의 민심이 심상치 않으니, 세금을 좀 면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중방에서 의논하여 폐하께 윤허를 받으시오.”

    이의방의 말에 문극겸은 고개를 숙이었다.

    “병부로 가자.”

    “예! 위위경!”

    그렇게 이의방은 중방을 나가 병부로 향하였고, 중신들은 한글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논하였다.

    “허… 이 거참…….”

    매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 문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오랫동안 한자를 써온 학자들 역시나 이 문자에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모른 채 한글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우가… 이걸 한 시진 만에 배웠다고?”

    이준의는 이의방이 한 시진 만에 배웠다고 하는 문자를 관심 있게 보았다.

    물론 어떻게 쓰고 읽는지 모르지만 한자에 비해 정말 간단하게는 보였다.

    “이걸 만약에 고려에 적용이 된다면 여파가 얼마나 클까요? 아시다시피 위위경이 일자무식 아닙니까.”

    이준의가 솔직하게 까놓고 이야기하자, 문극겸과 한문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파라고 한다면 글쎄요… 감이 잡히지를 않습니다만… 이 나라의 태반이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겠지요.”

    “아이고, 나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방에 일이나 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안 그래도 전라도와 경상도 민심이 혼란스러워요.”

    “아, 그건 맞는 말입니다.”

    이준의 역시 이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방 일에 대해 의논에 들어갔다.

    * * *

    “네. 고맙습니다.”

    옷을 넙죽 받으며 고맙다고 대답하는 현수였다.

    “우리 위위경을 살려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씨와 임씨의 감사하다는 말에 현수는 고개를 몇 번씩이나 다시 숙이었다.

    “아, 예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시오. 내가 다 챙겨 줄 테니.”

    “예!?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현수는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지금 뒤에 쌓여 있는 것들만 봐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아직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며칠 동안 살피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웬만한 가정집 이삿짐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그런 저는 이만…….”

    현수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최씨와 임씨는 현수가 들어간 것을 보고 함께 어디론가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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