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위위경.”
황제를 보자마자 주먹이 불끈 쥐어 졌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 이의방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가서는 허리를 숙이었다.
“위위경 이의방,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오, 어서 오시오. 정중부… 정중부는 어찌 되었소?”
“생포하였사옵니다. 정중부의 처결을 신이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윤허해주시겠사옵니까?”
“물론이오. 경의 뜻대로 하시오.”
실권 없는 황제의 말에 이의방은 좋아하기는커녕 그냥 고개를 숙이었다.
“하옵고. 폐주의 복권은…….”
이의방이 폐주의 복권을 이야기 꺼내자, 황제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신도 동의하옵니다. 허나, 신은 황제 폐하와 고려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황제를 죽인 것이옵니다. 선황제가 살아 계셨다면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을 때보다 더욱더 혼란스럽고 복잡한 고려가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폐하께서 잘 살펴주시어 잘 마무리를 지어 주셨사오면 하옵니다만.”
“여부가 있겠소이까… 이참에 난을 진압하였던 용호군 대장군 이의민에게 벽상공신 작위를 내리는 게 어떻겠소이까?”
“폐하, 그리 해주시오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의방은 고개를 숙이었다.
“더불어 신의 목숨을 구한 이들도 있사오니, 논공 행상 때 신이 직접 폐하를 대신할까 하옵니다만… 그리해도 되겠사옵니까?”
“위위경의 뜻대로 하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의방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원하던 요구에 대한 답을 들은 이의방은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서 밖으로 나갔고,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리 쉬었다.
이의방은 행보를 계속 이어 나갔다.
대전에 들렀으니, 다음으로는 태후전을 들렀다.
태후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얼굴을 비춰 주고서 다시 태비전으로 갔다.
태비와 태자비 그리고 가족들을 만나고서야 이의방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제 이의방에 세상이 왔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이의방이 중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준의, 문극겸, 한문준, 조영인, 두경승, 이의민이 함께 자리하였다.
이제 정중부 쪽 사람들과 전투로 인해 저버린 민심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의논에 들어갔다.
일단 정중부, 송유인, 정균.
이 세 사람은 산 채로 잡아 옥에 가두었고, 그의 수하들 역시 모두 가두었다.
남은 건 그들에게 내릴 형벌뿐이었다.
이준의를 비롯하여 몇 안 되는 신료들끼리는 이제 백성들에게 보상을 어찌해야 할지 의논하였고, 이의방과 장수들은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정중부 일은 이의방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그 이야기는 쏙 빠진 채로 말이다.
“일단 불에 탄 민가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타 죽은 백성들도 생각해야지요.”
한문준이 말하자, 문극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백성들의 일 처리 보다는…….”
“백성 일을 먼저 하세요.”
이준의 말보다는 한문준의 말을 들어 주었다.
“아니, 위위경. 백성들을 먼저 챙기는 마음은 알겠으나, 지금 군부부터 장악해야 하는 게 먼저…….”
“형님, 끝났습니다. 한문준의 말대로 하게 두세요. 내정에 관한 일은 알아서 처리들 하시구려.”
“예… 위위경. 하옵고…….”
추밀원부사 한문준이 말하자, 이의방은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하시오.”
“지난 일로 문신들이 모두 죽어서 하급관원이 부족 하옵니다. 따라서…….”
“다시 음서를 들이자… 이 말을 하는 거요?”
“예…….”
“흐음!”
이의방은 시선을 돌렸다.
음서는 관직 추천 제도였다.
아비가 정5품만 되면 자식은 시험 없이 그냥 관직에 올라설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능력 없는 놈들과 아첨 하는 놈들이 황실의 태반을 이루었다.
그로 인해 결국에 터져 나온 게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아닌가.
이의방은 그걸 잘 알기에 음서를 통해 다시 뽑자고 말하는 한문준의 말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
이의방은 무언가 떠오른 듯 한문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신을 등용할 것이라면… 혹시 과거(科擧)… 그거면 되겠소?”
“예. 그리한다면 관직 상관없이 실력에 따라 뽑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 되니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위위경.”
한문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형님과 문공의 뜻은 어떠하시오?”
“위위경의 말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나 또한 동의하네. 하하하하!”
이준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자감, 한림원 관원과 학생들 역시 부족하기 그지없는지라…….”
“추밀원부사가 알아서 하시오.”
국자감은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고려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지만, 의종 당시에는 그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국자감 학생들은 자신이 국자감을 다닌다는 것이 벼슬인 줄 아는지 온갖 패악질을 일삼고 다녔다.
이는 백성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리하여 무신들은 정변 당시 문신들의 자제들도 봐주지 않고 모두 죽여버렸다.
그 후로 국자감은 거의 폐허가 되듯 버려진 지 오래되었으나, 살아남은 학생들이 아직 있었기에 완전히 폐쇄는 하지 않고 건물을 남겨 두었다.
이리하다 보니 국자감, 한림원에 관원들과 학생들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추밀원 부사가 사람 보는 눈이 있지 않소. 이참에 추밀원 부사와 문공이 맡아서 진행해보시오. 살펴보다가 원하는 인재가 있으면 말만 하시오. 그리고 형님은 형부의 일을 좀 맡아 줘야겠습니다.”
“음… 그래. 그렇게 하지. 그리고 이린을 예부의 시랑으로, 이거를 군기감장으로 보낼까 하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이거는 수문장과 별장에 오래 있었고… 경험이 있으니, 군기감장으로 적합하다고 보는데.”
“그렇게 하시지요.”
문극겸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밀원부사는 어찌 생각하시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린이 예부시랑이 되면 제게도 많은 도움을 줄 듯싶습니다.”
“일 처리 후에 내게 와서 보고하시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문준은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형님.”
“아, 말씀하시게.”
“일단 정중부와 결탁한 이들의 재물을 모조리 회수하고, 정중부 일가를 제외한 이들을 모두 귀향 보내세요.”
“예? 위위경!”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놈들을 살려주자는 말인가?”
“그렇게 하세요. 형님.”
확고하게 말하는 이의방이었다.
이에 이의민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다.
상관이 말하는데 더 이상 대꾸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다시 말하지만… 개경에 있는 일이 제일 시급하니, 하루빨리 정리부터 한 후에 시작합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대장군.”
“예. 위위경.”
“이 대장군이 나서서 재물은 싹 다 정리해버리게.”
“예! 위위경!”
신료들과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의방에게 인사를 하고는 중방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천천히 고민에 빠지었다.
* * *
그날 저녁.
중방에 술상이 차려졌고, 이의방은 술을 홀로 마시고 있었다.
상처 때문에 아직 술을 마시면 아니 되지만, 술을 마실만큼 일이 고됐기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자신을 평생 따르겠다고 하던 이들의 배신.
이의방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위위경… 유 선생이라는 자를 데려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이의방은 현수를 데리고 오라고 부하에게 명을 내렸었다.
현수는 부하의 안내에 따라 중방으로 들어섰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현수가 중방 안으로 들어오자, 이의방이 중방의 상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앉거라.”
“네…….”
현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이의방에게로 가서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 어떠냐? 지금 말이야.”
“아… 저 그게… 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래. 군사들.”
“약과 의사… 아니, 의원들을 보내 주셔서 다들 고비는 넘기고 있습니다.”
“잘됐구나.”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현수에게 건넸다.
“받거라.”
“네.”
두 손으로 잔을 받자, 이의방이 술병을 들어서 잔에 채워주었고 현수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원샷을 하였다.
“와아!”
“하하하하!”
현수의 반응에 이의방은 크게 웃었다.
염통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그 맛은 정말 최고였다.
거기에 알 수 없는 그윽한 향이 입안에서 퍼졌다.
“하하하하.”
이의방은 현수의 표정에 웃으며 다시 술병을 내밀었다.
현수는 다시 술을 받아 마시었고 이의방의 자리에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참… 기묘하다.”
“…예?”
“그날 말이다. 생각해보면 인연이라는 게 정말 웃기지 않느냐.”
“네… 정말 그러네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네가 날 옆에서 도와야 하니 조만간 너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 내 목숨을 구하였으니 그에 맞는 상도 내릴 것이고.”
“저,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요…….”
“할 줄 모른다니… 할 줄 모르면 처음부터 배우면 되는 것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현수는 알 수가 없었다.
이의방이 현수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싸울 줄도 모르고요… 칼 한 번 잡아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수는 하소연하듯이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의방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에 이야기했지? 배우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 거라. 네가 하고 싶은 걸 우선으로 해. 그러면서 나를 지키고, 나를 위해서 일을 해라 알겠느냐?”
“후우…….”
대답하는 대신, 현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사내 녀석이 자꾸 한숨을 쉬느냐!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의방이 정색을 하며 소리치자,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만 나가 쉬어라.”
“예…….”
현수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대? 뭘 하라는 건데?’
속으로 생각하며 현수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 가시지요.”
“아, 네. 근데 어디로요?”
“위위경의 저택으로 모시라는 명이 있으셨사옵니다.”
말단 관직의 관원이 말하자, 현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끄덕였다.
관원은 현수를 이의방의 저택으로 안내하였다.
* * *
“폐하, 찾아 계셨사옵니까.”
한림원 학사 승지가 들어섰다.
“지금부터 교서를 내릴 것이니, 내 말을 잘 듣고 받아 적으라.”
“예. 폐하.”
학사 승지는 허리를 숙이며 자리에 앉아 붓을 들었다.
“폐주를 복권 시킨다는 짐의 뜻은 바뀌지 않으나, 짐을 겁박하여 고려의 충신 이의방을 음해한 정중부를 공신 작에서 제외하며 그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그의 일가 또한 모두 삭탈관직에 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