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쾅!
그때 문짝을 발로 차고 들어오는 군사들과 장수들.
왕규는 이때다 싶어서 재물을 장수에게 건네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나는…….”
“끌어내라!”
“예!”
왕규와 정씨 둘을 모두 끌고 나가는 군사들.
그리고 장수는 자신 앞에 있는 재물을 보고는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송유인의 처, 왕규, 왕규의 처가 이의방 앞에 끌려 나왔다.
“정중부는 어디에 있느냐?”
이의방이 물었다.
“저, 저희는 모릅니다.”
이의방에게 단호히 말하는 송유인의 처였다.
그러자 이의방은 왕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왕규. 너는 아느냐? 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예? 위위경.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물이란 재물은 다 드릴 테니… 부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래?”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허면, 네 부인의 목숨값은 얼마로 내놓을 것이냐? 그리고 송유인의 처는? 앞에 있는 이 재물로는 한사람 목숨값밖에는 아니 되어 보이는데?”
왕규 앞에는 은병 한 궤짝, 금병 한 궤짝, 그리고 노리개가 전부였다.
“이거 말고도 더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시지요…….”
“부족하다니까.”
“더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위경. 제발… 제발… 목숨만은!”
왕규는 살려 달라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 대기 시작했다.
“그럼 네 부인을 내게 줄 수 있느냐?”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고, 정씨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하하하… 왜? 살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왕규를 능욕하며 이의방이 크게 웃기 시작하자, 곳곳에 있는 장수들 역시 웃기 시작했다.
“되었다… 우리는 정중부만 찾는다. 이들은 방안에 감금토록 하라. 추후에 명을 내릴 것이다!”
“예! 위위경!”
군사들이 왕규와 정씨를 끌고 가려 하자, 왕규는 소리쳤다.
“위위경! 원하시면 드리겠습니다!”
“서방님…….”
정씨는 당황했고, 이의방은 인상을 쓴 채 왕규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목숨을 살려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왕규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의방은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다리를 붙잡고서 강하게 왕규의 복부를 타격하였다.
퍽!
“끄허억!”
“이런 더럽기 그지없는 놈! 그러고도 네놈이 사내냐! 옛 처와 자식을 혼자 살기 위해 버리고, 권세 있는 집과 다시 혼인한 걸 내가 모를 듯싶었냐! 네놈이 정씨 집안에서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또 이따위 짓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구나!”
“…….”
“명예와 의리가 땅에 떨어졌으니, 그 어느 누구도 네놈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추악한 네놈 집안은 이제부터라도 관직에 나가지도 못하게 내 직접 막을 것이다!”
이의방은 그렇게 소리치며 장수들과 군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씨는 왕규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왕규가 김보당의 난에 연류되었다고 하였을 때 이의방이 왕규를 죽이려 하자, 왕규를 집에 데려와 숨겨준 적이 있다.
이에 감동한 왕규가 정씨에게 마음을 고백해왔다.
정씨는 처를 버리고 자신에게 온 왕규가 고맙기도 한 동시에, 그 전처와 자식에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여 재물까지 내어 주어 편안하게 살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본인이 살기위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이의방에게 준다고 한 왕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
“하하하…….”
왕규는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의 아내인 정씨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푸욱!
“커헉!”
뒤에서 송유인의 부인이 품속에서 칼을 꺼내어 왕규의 등을 쑤시고 그대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리었다.
“언니!”
정씨가 말릴 틈도 없이 무섭게 남편과 언니가 죽었다.
망연자실한 왕규의 부인 역시 엉엉 울며 품에서 극약(劇藥)을 꺼내어 먹었다.
마시자마자 바로 입에서 피를 토하더니, 호흡 곤란 증세에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가 정씨마저 숨을 거두었다.
* * *
한편, 모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정중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해주로 돌아가자니, 이미 이의방이 해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돌아가도 무용지물이었으며, 남쪽의 지방 귀족들의 군대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게 정중부로서는 모든 게 이득이었다.
“아버지.”
“그래… 어찌 되었느냐?”
“…….”
“이보게, 처남. 어찌 되었는가?”
집 안에 있을 왕규와 두 딸의 소식부터 묻는 정중부였다.
정균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정중부는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송유인은 망연자실한 사람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송유인 역시 왕규처럼 처를 버리고서 정중부에 딸과 혼례를 올리었고, 전처처럼 해준 것에 두 배 이상으로 현처에게 잘하였다.
비록 나이 차가 많이 났지만 나름 화목하게 지내었고, 최근에는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아이를 밴 부인의 죽음에 송유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해주 가문 전체의 씨를 말리게 된 상황에 정중부는 두 눈을 감았다.
“균아.”
“예… 아버지.”
“너는 살아남아라.”
“…예?”
“살아남아라…….”
“장인어른!”
“아버지!”
“승자와 패자가 확실히 갈리게 되었다. 이 아비가 너무 쉽게 이의방을 본 것이 원인이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자의 탓이옵니다.”
“장군!”
그때 종참이 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군사들이 이곳으로도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속히 피하시오소서.”
“피하다니!”
“그렇게 해라…….”
“그리하게 처남.”
정중부와 송유인의 말에 정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사옵니다.”
정균은 끝끝내 고집을 피웠다.
“문하시중! 거기 계십니까!”
저 멀리서 이의방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군사들은 주위를 에워싸면서 포위를 하고 있었다.
“문하시중! 내려오시오! 이미 끝이 났소이다!
“…….”
이의방의 말에 정중부는 피식 웃었다.
“내 욕심으로… 모두를 잃었구나.”
“문하시중! 군사들 역시 모두 투항하였소이다! 이만 내려오시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정중부였다.
“이의방에게 쉽게 내 목을 준수는 없지.”
“예?”
정균은 깜짝 놀랐다.
“내 길을 열 터이니, 너는 피하거라.”
“아버지…….”
정균은 고개를 저었다.
“처남, 그렇게 하게. 그동안 처남과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네.”
송유인은 미소를 지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길을 열겠습니다.”
“매부! 미쳤소!”
정균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지 송유인은 검을 다시 들었다.
정중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정균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네가 반드시 해주 가문을 다시 일으키거라. 그것이 네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다.”
“…….”
그렇게 말한 정중부는 송유인과 함께 천천히 이의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이놈들… 내가 상대해주마!”
송유인이 소리치면서 뛰어나가자, 그 뒤를 이어 군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장군, 이만 가셔야 합니다.”
종참은 계속 가자며 보채었으나, 정균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지막엔 큰절을 올리었다.
종참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정균을 기다려 주었다.
“위위경! 저기!”
송유인이 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그 뒤엔 정중부가 당당히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 하느냐?! 저놈을 당장 죽여라!”
이영령이 부장들과 군사들에게 명을 내리자, 부장들은 군사들을 이끌고 송유인에게로 뛰어갔다.
이의방은 당당하게 자신에게 오고 있는 정중부를 바라보았다.
“정균이 안 보이는구나… 정중부… 아들은 살려 보내겠다… 이 말이군.”
“소장이 찾아오겠사옵니다.”
이의민이 말하니,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민은 기병 몇을 이끌고서 정균을 찾으러 갔고, 정중부는 말을 타고 달리는 이의민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잡히지 말라고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촤아앙!
정중부가 이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의방! 내 목을 원한다면 직접 가져가거라!”
“위위경, 응하지 마시옵소서.”
이의방은 정중부가 자식을 살리고자 자신을 도발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 *
솨악!
“크학!”
한편, 송유인이 허승과 김광립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허승의 검에 팔을 베인 송유인은 부들부들거렸다.
퇴로도 막힌 탓에 시간을 벌여야만 했다.
“송유인, 정중부는 생포한다. 너무 쉽게 죽여 버릴 수는 없다.”
“예?”
“내 말대로 해. 싹 다 생포하란 말이야.”
“예! 위위경!”
“정중부와 송유인, 정균을 생포하라는 위위경의 명이시다!”
“뭐, 뭣이!?”
죽이지 않고 생포한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정중부였다.
잡아서 고문하려는 것인지, 굴욕을 주려는 것인지 도저히 이의방의 생각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방패수!”
창병이 뒤로 빠지고, 도끼를 내려놓은 방패 수들이 앞으로 나와 방패를 부여잡았다.
“송유인을 생포하라!”
생포 명령에 방패 수들이 우르르 뛰어갔다.
송유인은 어떻게 해서든 생포 당하지 않기 위해서 검을 꽉 부여잡고서 방패 수들의 빈틈을 노려 공격하려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송유인을 둘러싼 채 둥그렇게 말아서 다가오더니, 밧줄을 던져 송유인의 목과 팔에 걸어서 완전히 힘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이 틈을 타서 군사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완전히 제압을 해버렸다.
“으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면서 발버둥 치는 송유인이었다.
정중부는 허망하게 제압이 되어버린 송유인을 보고서 두 눈을 감았다.
군사력이 강해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으며, 다시 한번 더 이의방의 힘이 느낄 수 있었다.
‘다… 나의 욕심이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정중부가 검을 떨어트리더니, 하염없이 웃기 시작했다.
이의방은 아무 말 없이 이영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영령은 부장들에게 명을 내려 정중부를 포박하게 하였다.
이로써 승자가 된 이의방, 패자가 된 정중부였다.
권력을 잡았던 이고, 이의방, 정중부 3인방 중, 이의방이 이고, 정중부를 꺾고 고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의방은 몸을 돌아서서 황궁으로 당당하게 향하였다.
정중부가 황제를 시켜 내린 명을 철회하기 위해서였다.
* * *
“황제 폐하! 위위경이옵니다!”
이의방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스스로 대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쾅!
대전에 막상 들어서니 화가 났다.
나리를 위해 북방으로 가서 둘러보려 하였건만, 정작 황제는 도와주기는커녕 정중부에게 놀아나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