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장군. 응양군 2천 명가량이 장군을 모시러 올 것이옵니다.”
김자격은 공손히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경대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걸쳐진 갑주를 보았다.
순간, 저 갑주를 입을 당시 했던 이의방의 말이 기억이 났다.
‘내가 북방으로 가 있는 동안, 잘 부탁하네.’
그의 말을 지키지 못한 것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묵묵히 갑주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었다.
현재 이의방이 모든 걸 알아차리고 개경에 들어왔다.
그러다 정균의 칼을 맞고 북문 앞에 진을 친 이의방.
경대승은 집 안에 있어 이의방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문으로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던 경대승이었으나, 전존걸의 말과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의방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한 것이었다.
* * *
콰앙!
콰앙! 콰앙!
충차로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흥위위와 안에서 통나무를 들어 막고 있는 군사들이 대립하였다.
충차로 인해 빗장이 깨지고 있었지만, 통나무로 완강하게 받치고 있다 보니 쉽게 문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성문을 넘어라!”
“와아아아아!”
“문하시중! 뒤, 뒤에!”
기탁성의 말에 정중부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수백의 군사들이 미친 듯이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광정… 네 이노오오옴!”
이광정의 배신이었다.
수백의 군사가 안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니,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필히 시가전을 생각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순간 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콰앙! 쾅!
콰아앙!
끼이익!
쾅!
결국 통나무가 부서지며 성문이 활짝 열리었다.
이 틈을 타, 말을 타고 들이닥치는 장수들과 군사들이었다.
성안으로 들어오면서 정중부의 군대를 베고 찌르며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모조리! 죽여라!”
이의민은 소리치면서 명을 내렸다.
“정중부… 정중부가! 저기 위에 있다! 잡아라!”
이영령이 소리치자, 부장들이 속히 성곽으로 올라갔다.
정중부, 기탁성, 진준은 성문이 뚫리자, 곧장 성곽으로 피신하더니 군사들에게 시가지 전투 명을 내렸다.
이를 대비해 이미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곳곳에 방어선 구축을 해 놓았다.
수만의 군대가 있어도 패(敗)할 위기에 처한 정중부는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움직였다.
“공격하라!”
이번에는 뒤에서 들이닥치는 군사들에 흥위위는 몹시 당황하였고, 두경승은 아차 싶었다.
바로 정균이 가지고 있던 매복군이었다.
매복군들이 상황을 듣고서 능선을 타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도 소식들이 간 모양인지 송유인 또한 매복지에서 나와 군사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이런!”
고득시는 다 잡은 고기를 또 놓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자칫 하다가는 진짜 전멸할 수도 있다! 이 장군, 어서 퇴각을……!”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퇴각이라니!”
“퇴각해!”
“무슨 개소리야!!!”
이의민 역시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성문을 열었는데 퇴각을 하라니.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야아앗!”
푸욱!
히이이잉!
군사가 이의민이 타고 있던 말의 옆구리를 푸욱 쑤시자, 말은 고통스러워하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의민 역시 그대로 말에서 고꾸라졌다.
퍼어억!
이의민은 자신이 쓰러지자마자 창으로 찌르려고 하는 군사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도끼로 쳐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앞에 성문으로 치고 들어오는 정균이 보였다.
옆으로는 이광정의 군대를 제압해 가는 송유인이 보였다.
“이런 씨…….”
다 이긴 싸움을 그냥 다시 내줘야 한다는 것이 이의민은 내키지 않았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고득시는 퇴각을 외치면서 성문을 돌파해야만 하였다.
“이랴아앗!”
단필마(段匹馬)로 성문을 향해 뛰어나가며 군사들이 나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 주었다.
푸푹!
“커헉!”
돌파를 하던 중, 창에 복부와 옆구리를 찔린 고득시.
그 광경을 본 이의민과 이영령은 소리쳤다.
“고 장군!”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 속에 고득시가 퇴로를 열겠다고 나아갔다가 당해 버린 것이다.
퍼억!
고득시가 창에 찔린 채로 말에서 떨어지자, 군사들은 사정없이 그를 창으로 찔러대었다.
“으아아아아!”
이의민은 도끼를 부여잡고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군사들을 도끼로 때려죽이기 시작하였다.
이영령 역시 창을 휘두르며 퇴로를 열기 시작했다.
“공격하라!”
마침내 송유인이 당도하였고, 흥위위들을 에워싸며 공격해 들어갔다.
“흐흐… 하하하하하!”
정중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현재 상황을 즐기었다.
비록 성문이 뚫렸지만 아들 정균이 성문을 막았고, 동쪽으로는 사위 송유인이 군사를 데려왔다.
기습공격을 당했지만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나온 것이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쳐라!”
그러다 이내 이의방의 부장들이 또다시 뒤에서 공격해 오자, 정중부는 깜짝 놀랐다.
박존위와 부장 50여 명, 이광정의 사병들이 함께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
이광정은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병들에게 무조건 박존위의 명을 따르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김에 이광정은 어쩔 수 없이 큰소리로 외쳤다.
“저 정중부 대역죄인 놈을 추포(追捕)하라!”
“뭐, 뭣이!?”
이광정의 외침에 정중부는 인상을 찡그렸다.
앞에서 치고, 옆에서 치고, 뒤에서 치고, 또 치고.
성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개경의 백성들은 이에 혼비백산하며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겁에 질려 있었다.
* * *
“허허,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밖은 왜 이리 소란스러운고!”
황제는 불안하여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정중부의 강요에 못 이겨 이의방을 역적으로 몰았다.
이의방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모른 채로 계속해서 밖의 상황을 틈틈이 내관에게 듣고 있다.
만약 이의방이 멀쩡히 살아 돌아와서는 자신에게 이 일에 대해 따지고 묻는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정중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의방 하나를 끝장을 내고자, 자신의 모든 걸 걸어버린 정중부.
자신이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이다… 내가 황제인지, 저들이 황제인지를 모르겠구나…….’
옥좌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포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황제였다.
아무런 실권 없는 허수아비 황제는 그저 황실의 장식품이었다.
이번 전투의 승자가 바로 황실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이었고, 그 권력자에게 아부할 귀족들은 넘쳐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이 나라 황실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태자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의방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정중부가 승자가 된다면 자신은 완전한 허수아비로 전락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태자비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하아…….”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진압하라!”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냐.”
“신이 알아보고 오겠사옵니다.”
내관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쾅!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폐하… 신! 응양군 장군! 경대승이옵니다!”
경대승의 목소리에 황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용상에 다시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들라.”
덜컹.
방문이 열리자, 경대승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황제의 앞에 선 경대승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밖이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경 장군!”
“소장, 경대승 역모의 무리인 조원정, 석린, 이영진 모두 추포하였사옵니다. 응양군이 용호군을 장악하였으며 응양군을 황실 곳곳에 배치하여 황실을 보위할 것이옵니다.”
“어찌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이냐. 짐과 황실을 보위한다면서 어찌 이제야 온 거냔 말이다!”
“폐하, 신은 그동안 정중부 일파들에게 연금된 채로 있었사옵니다…….”
“닥치거라!”
황제의 반응에 경대승은 할 말을 잃었다.
“짐은 두경승 상장군이 직접 황궁으로 들어와 응양군을 맡을 때까지는 용호군에게 보위를 받을 것이니,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폐하!”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황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경대승이었다.
“폐하, 역적의 무리들이 지금 개경 안에 있사옵니다. 근데 어찌하여…….”
“닥쳐라! 역적은 네놈이 아니더냐! 어찌 일개 장군 따위가 제 마음대로 응양군의 수장인 상장군의 명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이리 황궁에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
경대승은 황제의 이런 반응에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이었다.
“내 따로 부를 일이 있을 때까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
“하오면… 태자 전하와 태자비 마마를 보위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어허! 그건 응양군 상장군에게 맡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경장군은 황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만 있도록 하라.”
황제의 명에 경대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말을 해보았자, 황제는 듣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경대승은 고개를 숙이고서 뒤로 물러나 밖으로 나갔다.
이에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경대승을 황실 가까이 두게 된다면 정중부가 나중에라도 트집을 잡을 것이 분명하여 강력히 거부한 것이었다.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의 황제는 오늘 내일 계속 불안에 떨어야 하였다.
* * *
황제를 만나고 온 경대승은 모든 게 허탈하기만 할 뿐이었다.
“장군.”
밖에서도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경대승을 따르던 부장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물었다.
경대승은 중랑장, 별장, 랑장, 교위, 산원, 대정인 부장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피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상장군이 올 때까지 밖에서 황궁을 지키라는 황명을 내리셨네.”
“그… 무슨!”
“말도 안 됩니다. 장군. 이건… 정말…….”
“황제 폐하의 명이다. 황명을 거스르는 것은 큰 대역죄이니라.”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정중부를 쳐서 이의방이 개경을 입성케 하도록 해야 합니다. 안 그럼 장군도, 저희도 다 죽습니다.”
김자격이 말하자, 경대승은 김자격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군인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지금의 황제의 명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대전 앞에서 황제가 들으라는 듯 경대승에게 똑 부러지게 말하는 김자격이었다.
그의 말에 경대승은 주먹을 불끈 쥐다가 곧장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빼서 김자격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