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모두들 나가보게. 각자 맡은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매복한 군사들이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게.”
“예! 위위경!”
장수들은 대답한 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영령만큼은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자네도 그만 가봐.”
“하오나…….”
“괜찮아. 그리고 천부장도.”
“예. 위위경.”
이영령, 천시호는 고개를 한번 숙인 뒤, 군막 밖으로 나가면서 현수를 지그시 한번 바라보았다.
“음… 이리 가까이 앉아라.”
“아, 네…….”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이의방과 가깝게 자리를 하였다.
이의방은 잠시 현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누구냐?”
우학유에게서 들었겠지만, 이의방은 현수에 입에서 확실히 듣고 싶었다.
“경상남도 산청군 일정면 346-1번지… 명성 고등학교 1학년 7반…….”
아예 그냥 대한민국 주소를 불러 주는 현수였다.
“경상남도…? 경상도를 말하는 거냐?”
“아, 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이의방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워서인지 시선을 일단 회피하며 답하였다.
“사내놈이 피하기는 뭘 피하느냐.”
“네?”
이의방은 현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가까이에서 보아하니, 이의방은 잘생긴 중년 미남 상에 무신이라 그런지 체격도 좋았다.
딱 중년의 멋이라고 해야 하나.
매력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래… 일단 경상도에서 왔다라는 것은 알겠으니… 본관이 어디냐?”
호구조사를 상세하게 하는 이의방이었다.
“정주(貞州) 유씨인데요…….”
“정주 유씨라…….”
“네.”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 말이다.”
현수가 기절하고 난 후에 현수의 가방을 살핀 이의방이 물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인 듯한데… 대체 어디서 난 것들이냐. 더군다나 그 이상한 문자들은 또 뭐고?”
막상 이의방이 물어오니,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어찌 대답이 없는 것이냐. 내게 숨기는 게 있느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게 옳은 것일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의방이 이상한 문자라고 하는 건 한글이었다.
현수는 대놓고 이의방 앞에서 ‘당신 후손이 이성계고, 그 이성계의 손자가 만든 글자입니다.’라고는 차마 못하겠다.
실제로 이의방은 이성계 쪽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조선건국 후, 이의방이라는 이름 석 자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름이 거론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세종대왕님… 죄송합니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현수는 살기위해 엄청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자칫 하다가는 이의방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애초에 죽고 사는 게 문제이지 않은가.
이의방이 지금 최고 실권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현수는 거짓으로 답하였다.
“제가 만든 글자입니다.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요. 몇 년 전부터 고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우리만의 글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생각해낸 끝에 만든 글자입니다.”
“뭐, 뭐야!?”
이의방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현수는 가방을 앞으로 멘 다음, 가방을 열어서 책들을 올려놓았다.
‘다시 한번 더 죄송합니다. 세종대왕 할아버지… 이렇게 된 김에 한글보다는 이제… 과학에 집중해주세요.’
마음을 다시 다잡으며 가방 속에서 책들을 꺼내어 펼쳤다.
“이건 의학서적입니다. 본래 할아버지 때부터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그걸로 생계를 유지해나갔습니다. 그리곤 각 나라에 약초로 환약을 만들어 열심히 팔았죠. 한마디로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럼 이 책들은 어디서 났느냐? 글은 네가 썼다 치고… 그림들 말이야. 춘화도 네가 그린 것이냐?”
“춘화요…? 아…….”
아차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수업시간에 공부하듯이 책 뒤에 숨겨 놓고 보는 그 재미였는데.
어떨 때는 만화책보다 더 재밌었다.
해외에서 파는 성인 잡지와 한국의 성인 잡지들을 사서 친구들과 돌려가며 보곤 했다.
그 잡지들을 집에 놓아두기는 뭐하니, 현수는 이를 가방 속에 넣어둔 채로 다닌 것이다.
“그건… 어느 화가가 그려준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춘화를? 마치 사람을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렸다고, 이걸? 허허허허허.”
“하나 드릴까요?”
“어, 어?”
현수는 이의방의 반응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성인 잡지를 하나 건넸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완전한 뇌물 급이었다.
현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흐흠!”
헛기침하며 못 이기는 척 잡지를 받아든 이의방은 이를 한쪽 옆에 두었다.
그러자 현수와 이의방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글자를 만들었니… 천재인가?’
이의방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글자를 손쉽게 만들어 낸 청년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저…….”
“예.”
“이 글자… 총 몇 자냐?”
한자라는 것은 수천, 수만 자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방대하기 그지없었다.
“자음과 모음 합쳐서 40자인데요.”
“…….”
자음, 모음.
이걸 말해줘도 모르는 이의방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 현수는 탁보에 손가락을 그으면서 ‘ㄱ’부터 ‘ㅎ’까지 써 내려갔다.
“끝이에요. 이제 자음이고요.”
현수는 다시 모음을 써 내려갔다.
‘ㅏ’부터 ‘ㅣ’까지 쓰고 모음이라고 하였다.
“합쳐서 총 40자입니다. 이게 끝입니다.”
정말 간단하다.
이의방이 보기에도 수천, 수만 자의 한자보다 이 문자는 쉬워 보였다.
“이걸 배우려면 얼마나 걸리냐?”
“늦어도 삼일, 바보라면 일주일이면 될 겁니다. 최대 열흘일 것입니다.”
현수가 탁보에 손가락으로 그으며 쓴 자음, 모음을 본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다 깨우친다면 글을 쓰고 읽는 게 가능할 것만 같았다.
현수가 이의방에 눈에는 천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자무식(一子無識)이 이걸 다 배운다고 하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자음, 모음을 배운다고 한다면 하루도 안 걸릴 겁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합쳐서 읽느냐… 그게 관건이죠. 처음에는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를 가르친 다음, 자음을 하나씩 추가해 가르치면 됩니다. 제가 지금 써놓은 건 전체적인 것이며 처음부터 배우려면 천천히 해야지요.”
현수는 자기가 한글을 만든 것처럼 이야기하였다.
가슴속에는 양심이 계속 찔려왔다.
세종대왕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가슴으로 계속 외치고 외쳤다.
이의방을 만나러 올 때까지 걷고, 쉬고, 먹고, 마시고, 싸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였다.
하지만 당장 닥친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지금 돌아가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고려에 떨어진 현대 사람이 내가 유일했기에 함께 방법을 찾을 사람이 없다.
두 번째, 일단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무조건 들었다.
갑자기 고려 시대로 떨어져 수상해 보이는 탓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스물도 안 되어서 죽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생각하려고 하였다.
이게 현수가 고심 끝에 낸 결론이었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였다.
그 말은 바로 약초꾼들에게서 시작된 말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산속에 들어갔다가 호랑이, 곰, 표범, 늑대와 같은 산짐승들을 만났을 때도 약초꾼들은 정신 줄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운이 좋으면 야생동물을 사냥해 고기를 얻을 수가 있었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부모는 있느냐?”
“네. 있는데… 지금은 안 계십니다. 멀리 가셨어요. 저 멀리…….”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는 현수였다.
“그 먼 곳이 어디냐? 대식국으로 간 것이냐. 아니면 송나라? 금나라?”
“네. 대식국… 대식국입니다.”
대식국은 아랍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와 아랍은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현수는 이의방이 부모를 찾아준다고 해도 대식국까지 사람을 보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대식국이라 대답했다.
“거참… 멀리도 갔구나.”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수에게 재차 물었다.
“너도 대식국으로 가려는 것이냐?”
이의방은 잡고 싶었다.
이 유현수라는 천재를 말이다.
“아니요. 여기 남을 겁니다.”
“하하하하하!”
이의방은 현수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크게 웃었다.
정말 기뻤다.
비록 현재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현수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게 쉽게 풀려 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하하하하하!”
이의방은 계속해서 웃다가 이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수를 보며 말하였다.
“이 일이 끝나면 나는 너에게 내 등을 맡기려 하는데… 그래도 되겠느냐?”
“…예?”
현수는 이의방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내 왼손과 오른손 되어 줄 이가 모두 있는데, 내 등 뒤를 봐줄 인사가 없어. 너를 옆에 두고 싶다는 말이다.”
“제가 감히 그럴 능력이 될지… 거기다가 전 싸움도 잘 못 하는데요.”
무작정 때릴 줄은 알지 싸움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동영상으로 배운 복싱밖에는 없었다.
스텝 밟고, 왔다 갔다가 펀치를 날리는 게 전부라는 말이다.
하지만 빠르고 정확하게 사람의 급소를 때릴 줄은 알기에 어디 가서 맞지는 않게 되었다.
이의방은 잠시나마 이리저리 눈으로 스캔을 하듯이 현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배우면 되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 거라.”
“네? 배워요?”
“흠… 일단 지금은 일을 처리하는 게 중요하니… 그만 나가보거나.”
“아… 네. 저 근데 다리가 많이 부으셨네요…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현수는 들어왔을 때부터 이의방의 다리가 심하게 부어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불을 덮고 있어도 두툼한 게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이의방은 현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현수는 가깝게 가서 이의방의 맥부터 살피었다.
아직 의사 자격증은 없지만, 나름 실력은 일반 한의사 뺨치는 실력이었다.
약초 법제뿐만이 아니라, 야매로 동네 어르신들에게 침을 놓아줄 수 있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수는 맥을 짚더니, 손을 치우고서 물었다.
“혹시 뱀한테 물린 적 있으세요?”
“물린 적은 없다만, 뱀의 독을 묻힌 칼에는 당하였지. 찔린 부분은 여기다.”
허벅지를 가리키자 현수는 이불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