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끼익.
창을 조심스럽게 열고서 박존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보초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아, 가만히 있어라. 내 가슴이 철렁하지 않느냐. 히히히히”
방 안에서 기분 나쁜 이광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박존위는 더욱 숨을 죽였다.
그리곤 올라오지 못한 나머지 부장들에게 저택의 사병 숙소에 여차하면 불을 놓아 태워버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냥 한방에 태워죽이겠다는 생각이었다.
끼익.
박존위가 조심스레 이광정의 숙소 문을 열었다.
이광정은 상대 군이 침소까지 들어올 줄 생각도 못 한 듯하였고, 계속 계집질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 기다리거라.”
침상에서 일어나 곧장 탁상으로 가서는 작은 함을 열더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종이를 펼치고는 입안에 가루약을 털어 넣고 물을 들이키며 삼키었다.
“히히히히히.”
좋아 죽는 이광정.
얼마 전에 송나라 황제만 먹는다는 정력 산을 구매하여 입안에 털어 넣은 것이었다.
“끄으으응…….”
벌써부터 약효가 나오는 듯 보였다.
아래쪽에서부터 묵직하게 달아오르는 그 기분을 느껴졌다.
이광정은 온몸에 힘이 불끈불끈 솟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아섰다.
쉬이익!
“…….”
순간 오싹한 무언가가 자신의 볼을 스치고 날아갔다.
푸욱!
“끅끄으윽…….”
풀썩.
오늘 하룻밤을 보낼 여자의 목에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여자는 단숨에 목에 수리검이 꽂힌 채로 입과 목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웨… 웬놈…….”
이광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이에 이광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확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다름 아닌 이의방의 5인방 중 한 명인 박존위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저택 안에 부장들을 대동 한 채로 들어온 것이었다.
“바, 박장군… 여, 여기는 어찌…….”
“이광정, 이 쥐새끼 같은 놈… 네놈이 위위경을 배반하고도 살아남을 성싶었더냐.”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빼어 들더니 이광정의 어깨에 칼을 내려놓았다.
박존위의 목소리는 냉철하면서도 차가웠다.
쉬이이이.
겁을 잔뜩 먹은 이광정이 대놓고 소변을 보았다.
박존위와 부장들은 비웃기는커녕 무섭게 이광정을 노려보았다.
“사, 살려주시오… 박 장군…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소이다… 저, 정중부! 그래! 정중부가 시킨 일이오…….”
두려움에 말까지 더듬으며 말하는 이광정이었다.
“군소리할 거 없다. 위위경께서 너의 목을 원하신다.”
“히익!”
이광정은 기겁을 하였다.
“사, 살려주시오. 박 장군. 나는 살고자 배신을 한 것이지… 위위경을 배신할 생각은 전혀 없었소이다. 정중부가 나를 협박하여 이리된 것이오… 부디… 부디 날 좀 믿어주시오… 박 장군.”
싹싹 손바닥을 비비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이광정은 정말이지 추했다.
지금의 모습은 한 나라의 장수가 아니라, 졸장이었다.
아니, 졸장이라는 표현도 아까웠다.
“박 장군, 내 이리 빌고 있지 않소…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하겠소이다. 박 장군…….”
“천하의 X 같은 놈 같으니라고… 그리 살고 싶으냐?”
“예, 예… 박 장군.”
“그렇다면 네 손으로 직접 성문을 열어 위위경께 개경을 바치거라.”
“…예?”
개경을 바치라니, 이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재, 재물은… 아…….”
스윽.
“윽!”
살이 살짝 베이는 느낌과 동시에 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무조건 성문을 열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박존위였다.
보다 못한 박존위가 좀 더 깊게 목을 긋자, 이광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알겠소이다… 박 장군. 제발… 제발…….”
이광정의 말에 박존위가 검을 치우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광정은 부들거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놈이 대장군이라니…….’
박존위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광정은 그동안 군사들만 정예화(精銳化)시켰지, 그 군사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냥 자신의 목숨 줄만 지키는 수단으로 군사를 생각하는 듯했다.
박존위는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이광정의 군사를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예전부터 듣기로는 군사들이 이광정에게 불만이 있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정예화 군사들의 불만.
그건 곧 대장군 이광정이 군사들에게 있어서 신임을 잃었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냥 명령 때문에 움직이는 것뿐이지, 진심으로 이광정을 따르는 군사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 * *
이의방과 부장들은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개경을 뚫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에서 개경은 요새 중의 요새이다.
오래전에 있었던 후백제의 기습공격 이후,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며 개경을 서경 못지않은 요새화시켜 버린 게 태조였다.
태조 이후로도 개경에 있는 도성을 계속해서 방어에 용이하게 바꾸어 나가면서 노포, 거노, 석포, 거기에 성벽에는 낭아박을 설치하였다.
낭아박은 적병(敵兵)을 성벽으로부터 떨어뜨리는 병기인데 초반에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올렸다 내렸다를 효과적으로 반복하기 위하여 철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하다 보니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하였고, 무게 또한 만만치가 않아 한 대 맞으면 훅 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개경에 수두룩하게 있고 군사력도 월등히 차이가 나니, 쉽게 개경을 탈환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었다.
“위위경, 포기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런 생각 한 적 없네. 내가 포기하면 여기 군사들이고 자네들이고 다 죽는 것인데 그걸 알고도 포기를 하겠나. 한다면 내가 자결을 하겠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지금 군사들은 개경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에 비하여 떨어지지 않습니다. 위위경께서 키워 놓으신 흥위위가 최고의 정예병이라는 말이옵니다.”
“정예병이면 뭐하나… 너무 힘든 싸움이 시작되었지 않은가. 그나저나 박 장군은 어떻게 되었나. 도통 소식이 없으니…….”
이의방의 말에 두경승이 말하였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사옵니까.”
두경승의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의방은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위위경, 소장 돈장이옵니다.”
“들게!”
막장이 걷히며, 갑옷을 벗은 채 들어온 돈장이 고개를 숙이었다.
“어떠냐. 심한 것이냐?”
“아니옵니다. 위위경.”
돈장의 모습이 많이 초췌해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이미 의원에게서 대충 보고를 다 받았지만, 이의방은 걱정되는 얼굴로 돈장을 바라보았다.
“어서 들어가 쉬어라.”
“아니옵니다. 소장도 장수인데 어찌 누워만 있을 수 있사옵니까.”
“나도 이리 있는데 무슨 상관이더냐.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내가 더 부끄러워지지 않느냐.”
“위위경,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감히 소장과 위위경을 비교하시다니요.”
“하하하. 그만큼 너를 아낀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예…….”
돈장은 고개를 숙이었고 이의방은 미소를 지었다.
“앉거라.”
“예!”
돈장은 빈자리에 곧장 앉았다.
“나를 대신하여 여기 천시호 별장이 나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성곽으로는 올라가 착지하려는데 진전이 없다고 들었네.”
이의방이 현재 상황을 이야기를 하자, 장수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각자마다 의지가 있으니, 이제 어떻게 해서든 저 성을 넘을 것이라는 걸 믿고 있는 이의방이었다.
다리만 어떻게 좀 낫는다면 좋으련만.
직접 군을 이끌고 지휘하고 싶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으니, 꽤나 아쉬움이 남았다.
“고득시.”
“예. 위위경.”
“무슨 말을 해보게. 우리들 중 냉철하기로는 자네를 따를 자가 없지 않나. 생각도 깊고, 글도 읽을 줄 알고 병법에도 능한 자네가 아닌가. 왜 꿀 먹은 벙어리야.”
“송구하옵니다. 현재는 박장군을 믿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사옵니다.”
박존위에게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의방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연락도 소식도 없으니 말이다.
“아니면 서북면 군사를 개경으로 불러오는 게 어떠하시옵니까?”
이의민의 말에 이의방은 살짝 혹하였다.
서북면병마도사 우학유가 자신의 매제이니, 자신을 당연히 따라 줄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서북면군을 개경으로 남하시킨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의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두 상장군이 군사들을 동요를 시킨다고 하였는데… 그건 힘들겠지?”
“…….”
“우리에게도 내세울 만한 명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좋은 생각 없나?”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이의방이 내놓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안에서 문이 열린다면 그야말로 아주 쉽게 일이 풀릴 것인데 말이다.
시가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흥위위가 압도적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테니, 이의방은 개경의 성문이 열리기만을 바라였다.
“위위경! 유현수라는 자가 위위경을 뵙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어서 들라 하라!”
막장이 옆으로 젖혀지면서 유현수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이었다.
“안녕… 하세요?”
“…….”
한번 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너라. 늦었구나.”
침상에 앉아서 맞이해주는 이의방.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다친 것이 분명하였다.
여기 오면서 정균에게 칼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갑이에게 들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의방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으나, 다행히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
현수는 할 말이 없었다.
혹여 자신이 고려로 와서 이렇게 역사가 바뀐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의방은 그 전에 출발하였다.
그러던 중 개경에서 칼을 맞고 결국 이쪽으로 빠져나와 정중부와 대치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아직 그 승부가 나지 않아 누가 죽을지는 알 수 없었다.
“왜 그리 멀뚱멀뚱 서 있느냐. 자리에 앉아라.”
“아, 예!”
현수는 곧장 빈자리에 후다닥 가서는 앉았다.
얼떨결에 장수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이거 완전 가시방석 같았다.
아직 군대는 다녀오지 않았지만, 일병들이 장군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 그 기분을 알 듯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상황일 때는 웃겼었는데 현실, 아니… 그 전에 시대로 와서 장군들 틈에 있어보니 가시방석보다 더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이의방과 정중부 이 둘 중에 누가 이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칫 하다가는 자신도 목이 달아날 상황이 아닌가.
처음 만난 사람이 이의방, 우학유, 갑이 이렇게 세 사람이 끝이다.
국사책에서 읽은 대로라면 이의방이 죽고 난 뒤, 정중부가 집권하긴 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의방이 죽고, 자신도 얽혀서 죽을 것이 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