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어찌하시겠습니까. 위위경에게 가야 하는 데 능선을 타고 넘어갈지 아니면…….”
“능선을 어떻게 타. 탈 수 있다고 하면 진작 타서 넘어갔지. 어쩔 수 없지만 길을 따라 쭉 가야 하네. 서경은 넘었으니… 두 시간 후에 출발하도록 하는 거로 하지.”
“그렇게 하세.”
이영령, 박존위, 돈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가 군사들을 살피고 챙기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아침 준비 빨리해라!”
“예! 장군!”
박존위의 명에 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고, 아침 준비를 빠르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아…….”
박존위는 이의방의 피습 소식을 듣고서 오는 길에 의원 몇몇을 데려왔다.
일단 그들부터 먼저 확인하기 위해 향하였다.
의원들이 도망쳐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 * *
태후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문을 열어도 군사들이 지키고 있고, 강제로 나가려고 해도 어떻게 팔팔한 군사들을 밀치면서 나갈 수가 있겠는가.
이 모든 게 정중부의 농간(弄奸)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황실을 이렇게까지 농락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태비는 어쩌고 있으려나…….”
현재 황제보다 더 걱정인 게 태비였다.
그 전에 태비가 태자비와 함께 있겠다고 하였다.
거기에 이의방의 부인인 조씨,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임씨도 함께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정중부가 태비뿐만 아니라, 태자비 조씨, 임씨 이들 또한 어떻게 할 건지가 문제였다.
“최상궁.”
“예. 태후마마.”
“정중부를 불러오라.”
“예?”
“정중부를 불러오란 말이다. 다는 몰라도 태자비는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예… 태후마마.”
상궁은 고개를 숙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정중부를 데리러 간다는 상궁을 막을 군사들은 없었다.
태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황실은 지금 온통 정중부 손에 있으니, 상궁이나 환관 내관들 역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짓 하다가 잡혀 죽지만 않으면 그게 다행인 것이었다.
* * *
“모조리! 죽여라! 정씨란 정씨들은 다 죽여 버려라!”
이의민은 이의방의 명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해주로 오자마자 관아부터 접수하였고, 관아의 관리들을 모조리 제압하였다.
그리고는 명단을 펼쳐 해주 정씨란 정씨들의 집을 모조리 파악해 놓았다.
퍼억!
푸욱!
솨악!
찌르고, 찍고, 베며 군사들은 정씨란 정씨들을 모조리 살육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까지 이렇게 한다면 정중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의방에 식솔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할 인물이었다.
타닥.
탁. 타타탁.
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정씨인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태워 버리고 있었다.
해주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넘어선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던 것이다.
이의민은 정자에 올라서서 군사들이 잘하고 있는지 두루 살피며 집들이 불에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을 감상이라도 하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대장군!”
정자로 부장이 급히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
“정씨와 정씨가 아닌 자들로 섞여 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렇담 다 죽여버려.”
“…예?”
“뭘 고민하는 것이냐. 싹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아… 예! 알겠사옵니다! 대장군!”
부장은 급히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정씨가 아니라, 해주의 모든 백성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의민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꺄아아악!”
곳곳에서 여인의 비명이 들려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 이의민이었다.
“거기 부장!”
이의민이 어느 한 처녀를 들쳐업고 신나게 뛰는 부장을 불러 세우자, 부장은 처녀를 내팽개치고는 이의민에게 급히 달려왔다.
“예! 대장군!”
“빨리 일들 치루어라! 슬슬 개경으로 가야한다!”
“예! 대장군!”
부장은 군례를 올리며 내팽개쳐진 처녀에게로 다시 향하였고, 처녀는 울면서 반대 방향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다 풀려 버려 일어날 힘도 없던 것이다.
“하하하… 이 귀여운 X…….”
부장은 혼자 좋아하며 뛰어가더니 검을 들고 여인의 등에 꽂아버렸다.
* * *
“위위경, 정신이 드시옵니까?”
이의방은 고득시가 군영을 친 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 그래… 고 장군이군…….”
“그러하옵니다. 위위경, 어찌 정균 따위에게 허탈하게 당하실 수가 있으시옵니까.”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 그나마 살았으니 다행이네. 내가 살았어, 내가… 하하하하.”
기운 없는 목소리로 살았다며 웃는 이의방이었다.
“나에게 약초를 준 이가 누구였지?”
“지금 군사들과 약초를 뜯으러 갔사옵니다.”
고득시의 말에 이의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위경!”
군영 안으로 박존위, 돈장, 이영령이 들어섰다.
의원들도 함께 말이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아. 다들 호들갑은…….”
“위위경, 제 옆에 있는 의원이 계속해서 위위경을 살피었습니다.”
“오… 그래? 고맙네. 고마워. 내 개경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사례하겠네. 그리고 여기 있는 자네들에게도 말이야.”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위위경께서 그동안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만 생각해도 하염없이 감사하온데 저희가 무얼 더 바라겠사옵니까.”
고득시의 말에 이의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의방은 고득시를 보며 물었다.
“좋지 않사옵니다. 하옵고…….”
“알아. 들었지. 역적이라고?”
“…….”
고득시와 다른 장수들은 침묵 속에 고개를 숙이었다.
“군사들의 상황은? 내가 없으니 아마 우왕좌왕할 것인데.”
“심려치 마시옵소서. 군사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사옵니다. 위위경께서 잘 다져놓으신 흥위위 아니옵니까?”
“자네들의 공도 있지. 그나저나 계속 잠이 쏟아지는구먼.”
“예. 그럴 것이옵니다. 잠이 오는 해독 탕과 환약을 계속 드셔서 그러하옵니다. 까치 독사와 여러 독초를 섞인 칼에 당하신 듯하온데… 다행히 약초를 잘 아는 이가 미리 손을 쓰는 바람에 아직…….”
“살아 있다.”
“아, 예… 위위경.”
의원의 말에 이의방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살린 건 의원이 아니라, 그 부장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를 살리는 데 있어 자네들이 고생했구먼. 근데 다리는 감각이 없네만…….”
“너무 깊게 찔리는 바람에 그렇사옵니다. 차도가 있을 때까지 계속 침을 맞으셔야 하옵니다. 위위경.”
의원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날 수는 있겠지?”
“위위경,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깊게 찔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확인 차 묻는 거지.”
박존위는 말없이 의원을 바라보았다.
“말씀드리게.”
“예… 실은… 제가 상처를 살펴본 결과, 상처가 깊어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습니다. 현재 상태로서는 일어나시기는 힘드실 듯 보이옵니다.”
“그럼 치료가 끝난 후에는?”
“처음에는 힘드시겠지만. 조금씩 계속 걸어 다니시면 회복을 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상 없을 것이다. 이거지?”
“예. 위위경.”
의원의 말에 차마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의방은 숨을 돌리는 듯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오지영이라 합니다.”
“자네… 전의(典醫)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는가?”
“예!?”
“원한다면 내 전의로 자네를 들이고 싶은데.”
“위위경, 아직은 이른 듯합니다…….”
고득시의 말에 이의방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현재 상황은 안 좋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이의방은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지 해보고 싶은 생각이다.
“의원, 이번에 그냥 일어날 수만 있게 해주게. 알겠는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수들이 데려온 의원들이 답하였다.
“고득시.”
“예. 위위경.”
“날랜 군사들을 통해서 개경의 상황을 좀 알아보라 하게. 내 식솔들도.”
“저…….”
시키기 전에 이미 알아본 모양이었다.
고득시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냐. 말해봐.”
현재 상황에 대해 알고 싶은 이의방은 계속 보채었다.
“이야기를 해봐.”
“저는 식솔분들의 소식을 모르옵니다.”
“뭐…? 궁의 소식은 알아보았는가? 내 딸… 태자비… 태자비 말이야.”
“송구하옵니다만… 황궁 역시 알 길이 없사옵니다. 저택에 있던 사노비, 사병 그리고 사병 대장인 박지영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부인들께오서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궁으로 들어갔다 하셨는데 그 이후로는 모르옵니다. 위위경.”
“정중부…….”
이의방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의민을 해주로 보낸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해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하지 못한 이의방이었다.
완전히 해주의 전체가 살육 천지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 일로 인해서 다시는 이의방에게 대들 인사들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군사들은 얼마나 되나.”
“파악해본 바로는… 지난번에 피해를 본 군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상 없습니다. 피해를 본 군사는 약 700여 명 되옵니다.”
고득시가 말하였다.
“그래…….”
“위위경, 곽주에서 또한 군사를 데려왔사옵니다.”
박존위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그냥 서북면병마도사에게 전갈을 보내어 군을 개경으로 이끌고 오라 하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위위경, 그렇게만 된다면…….”
“안 된다. 서북면의 모든 병력이 빠지면 국경을 경계하던 군사 자체가 완전히 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거란족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서북면 흥화진 위에 사는 거란족이 문제이다.
지금은 언뜻 보기에 평화롭지만, 흥화진의 군사들이 빠지는 순간, 거란족이 국경을 넘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서북면의 군대는 최대한 빼면 안 되었다.
반면 곽주의 병력은 현재 상황만 일단락되면 바로 곽주로 올려보내면 그만이다.
애초에 곽주 방어사는 글러 먹은 놈이란 걸 증명했으니, 있으나 마나 아닌가.
또한 개경에서 곽주 방어사로 올려 보낼만한 이가 있다면 이번 일이 끝나고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이의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