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위위경, 이것부터 드셔야 합니다. 약탕기가 없어 즙을 낸 것입니다만… 꼭 드셔야 합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땀을 하염없이 흘리는 이의방은 몸이 점점 추워지는 게 느껴지는 듯 조금씩 떨고 있었다.
흐르는 강에 투구를 씻어서 즙을 담아 이의방에게 건넸다.
그릇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이의방은 두 손으로 투구를 부여잡고서 즙을 단숨에 마셨다.
“우웁!”
“아니 됩니다! 드셔야 합니다!”
구역질이 나오려는 순간에 부장이 호통을 치며 먹으라고 소리치자, 이의방은 눈을 딱 감고서 삼켜 버렸다.
“하아… 하아…….”
이의방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다시 드러누웠다.
즙을 먹은 게 바로 효과가 나오려는 듯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네들은 군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게.”
“알겠네.”
“나는 약초를 더 구해 와야겠어. 가능하다면 개경 안으로 들어가 의원이라도 잡아끌고 오고 싶지만… 이거 어쩐단 말인가.”
천 부장의 말에 다른 부장들은 고개를 숙이었다.
“일단은 간단하게만 처치를 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내가 의원도 아니고, 단지 약초꾼의 아들인데… 일단 이른 시일 내로 올 수 있는 의원을 이 장군께서 모셔올 듯하니… 자네는 여기서 위위경을 계속 살피고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게.”
“알겠네…….”
“가세.”
각자 일을 부여받은 부장들은 속속히 움직였다.
주변 경계를 맡을 부장, 약초를 캘 부장, 소식을 알아볼 부장, 이의방을 살필 부장 이렇게 말이다.
지금 이의방이 일어나야 싸울 수가 있고, 군사들도 그동안 이의방에게 받은 걸 생각한다면 쉽게 탈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의방은 부족하지 않을 만큼 군사들을 먹여 주고 재워주고 돈 주고 다 해주었다.
수만에 달하는 흥위위에게 말이다.
저벅저벅.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장군!”
부장들은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부장들이 나간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가 고득시였던 것이다.
안주에서 떠나 이의방의 명을 받아 둘러보며 오고 있던 고득시가 급한 전령에 속도를 내어 달려왔다.
물론 이의방의 명대로 돌아볼 곳은 이미 싹 다 돌아보았다.
작은 곳은 하루, 좀 큰 곳은 이틀 정도가 걸렸다.
술도 함부로 먹지 않고, 맡은 바를 다 해낸 덕분에 소식을 받자마자 달려올 수 있었다.
이제 해가 막 지기 시작했다.
군사들이 곳곳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이를 본 고득시가 이의방에게로 오면서 곧장 모든 불을 끄게 명하였다.
어찌 되었든 지금 위급한 순간이고 위험한 순간이니 말이다.
“위위경의 상태는 어떠하신가?”
“열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의원을 구할 방법도…….”
“데려왔어. 인근에 마을에서 데려온 의원이야. 자, 살피게.”
“아… 예…….”
고득시의 명에 중년의 의원이 이의방의 맥을 먼저 짚었고, 그 후에 상처 부위를 살피었다.
“허허.”
중년 의원이 웃자, 부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년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이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웃어!”
“이보게!”
“하하하, 아이고… 송구합니다. 독은 독인데 까치 독사의 독입니다. 응급조치도 잘 되어 있어서 금방 쾌차하실 것입니다.”
“…….”
의원의 말에 부장은 멱살을 쥔 손을 놓아 주었다.
“그럼 쾌차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더군다나 체격도 좋으시니, 금방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땀을 흘리시고 부들부들 떠시는 건 독과 싸우고 있어서 그러한 겁니다. 먼저 침을 놓고 환약을 먹인 후에 상처를 살피겠습니다만… 허벅지의 상처가 매우 깊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실 수 있는 거야? 뭐야?”
“정신은 차리실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상처의 크기에 따라…….”
“무조건 일어나셔야 하네! 알겠나!”
“예? 아… 예! 예!”
고득시의 말에 의원은 넙죽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저… 허면 침을 놓게 갑옷 좀…….”
의원의 말에 부장들이 이의방이 입고 있는 경번갑의 고리와 끈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이내 이의방이 입고 있는 경번갑을 벗기었고, 고득시는 곧장 몸을 돌아섰다.
남아 있는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하였다.
안 그래도 위위경이 쓰러진 상태이니, 마음이 좀 어수선할 군사들이었다.
그럴수록 부장들보다는 자신이 일일이 가서 살피고 챙기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 *
“그게 무슨 말이냐!”
정중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색하는 이들이 이의방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주위에 불이 밝힌 곳도 없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인어른.”
송유인의 말에 정중부는 다리에 기운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이의방… 이의방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냐? 탈영한 병사들을 찾거나 그런 건!?”
“송구합니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사옵니다.”
송유인의 말에 정중부는 골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의방이 살아 있기라도 하다면 자신을 가만 놓아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더불어 북방으로 갔으니, 해주 쪽에도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을 가졌지만, 해주에 있는 이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우선 자신이 살아야 대대손손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덜컹.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건 정균이었다.
“아버지, 정찰을 보던 이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오, 그래!”
“고득시가 군을 이끌고 북문에 군영을 설치했다 합니다.”
“…뭐라?”
“필시 이의방과 함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의방의 사병들은 모두 제압을 해놓았고, 감옥으로 끌고 가 투옥한 상태입니다. 사병에 대장으로 있는 박지영이라는 놈만 잘 이용을 한다면 이의방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아니야… 고득시 그놈이 군영을 쳤다면 이의방은 그 안에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럼…….”
“북문은 빼고 동, 서, 남쪽으로 모든 파발을 보냈으니 이의방을 잡기 위해 이 개경으로 올 것이다. 우리는 그 군사력으로 이의방을 밀어 버린 후에 잡으면 그만이다. 아니… 잡는 게 아니라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아버지인 정중부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정균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아버지는 용호군의 상장군이었고, 군에 대한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하니 아버지의 말을 믿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정균은 나머지 가능성에 대해 빠르게 계산을 하였다.
고득시가 왔지만, 이의방의 5인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득시가 도착하였으니, 이제 4인방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아버지, 이의방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조원정, 석린, 이영진… 이 셋을 빼고는 남은 사람들은 이의방의 수하들 말이옵니다.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아!”
“왜 그러십니까?”
“서북면병마도사 우학유! 그자가 있잖아!”
개경으로 들어오기 전, 송유인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대신 서북면병마도사로 간 이가 바로 우학유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때 당시 우학유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밉보여 서북면병마도사로 갔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의방과 우학유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자신들 모르게 이의방과 관계를 회복한 우학유가 여차하면 서북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싸움이 심각하게 번질 수 있었다.
각 지방의 지휘사나, 병마도사가 나라를 대신해 군을 이끌고 있지만, 함부로 군을 움직였다간 반역죄를 물을 수 있었다.
현재 나라의 사정이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해도 반역은 반역인 것이기 때문에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의방이라면 달랐다.
권력 싸움으로 인해서 정중부가 가족들까지 다 붙잡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이의방은 어떻게 나오겠는가.
거기까지 충분히 생각 해봐야 했다.
자신도 서북면에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걸 생각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국경은 안전하지 않으니.
“이거 가면 갈수록 태산이구나. 황제의 명은 받았다만… 서북면도 그러하고… 이의방, 이의민, 고득시, 박존위, 돈장, 이영령 이놈들이 더 문제야… 조원정, 석린, 이영진 이놈들은 아무것도 아니였어…….”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정중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균아.”
“예. 아버지.”
정중부는 품속에서 병부를 꺼내어 건네었다.
“너에게 지금 용호군 3령을 줄 테니, 매복을 준비하거라. 내가 어디에 매복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생각대로 움직이거라. 알겠느냐?”
정중부의 말을 알아들은 정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그리고 사위.”
“예. 장인어른.”
“자네는 군사를 편성해서 동문으로 가 매복을 하게나.”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송유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정균과 송유인 두 사람은 밖으로 곧장 나갔다.
이의방만 완전히 끝을 내버린다면 모든 게 자신의 것이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가졌는지 정중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동안 이의방에게도 갖은 수모를 당해왔고, 참아왔다.
이번에 그 끝을 보려는지 정중부는 독하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여차하면 태자비를 이용해서라도 항복을 받아야지… 하하하하하!”
정중부는 혼자 크게 웃었다.
이의방의 딸, 태자비.
태자비는 회임을 한 상태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태자비를 인질로 이용한다면 이의방은 무릎을 꿇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 * *
다음 날 아침.
이영령이 이끄는 흥위위, 박존위, 돈장이 곽주에서 군 일부를 빌려 데리고서 이의방에게로 향하고 있다가 잠시라도 쉴 겸 자리를 지켰다.
아무래도 보병들이다 보니 쉴 틈은 주어야 했다.
“서경을 벗어났고… 이제 개경이 코앞입니다.”
“예. 압니다. 알아요. 그나저나, 위위경께서는 많이 심각하신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이만저만 아니면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요.”
“그럼 어쩝니까.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사다리에, 검차에, 군막 병장기와 군량까지 싹 다 챙겨서 지금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박존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의 소식을 받은 후, 곽주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싹 다 챙겨서 개경으로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쉽게 제압이 되지 않는다면 장기전으로 갈 생각까지 하면서.
“정균이 그럴 줄은…….”
이영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 착하게만 생긴 공자가 위위경을 단번에 찔렀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