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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25화 (25/159)

025화

알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처음 듣는 이들은 동공이 커진 채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이제야 알아버린 이들은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보겠다는 심정이었으나, 이광정만큼은 절대 그렇지 못하였다.

두려움에 벌써부터 온몸을 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본 정균은 피식 웃으며 이광정의 뒤로 가서는 양어깨에 손을 올리었다.

“대장군, 많이 추우십니까. 왜 이리 떠시는지요…….”

“아, 아니네. 아니야!”

“하하하하. 어디가 편찮으신 거라면 의원을 불러야겠습니다.”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정 장군!”

정균은 미소를 지으며 이광정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자… 이제 황제 폐하께 가도록 하세!”

“예! 문하시중!”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하시중 정중부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다른 신료들 역시나 문하시중의 뒤를 따라 나갔다.

* * *

“그게 무슨 소리냐. 최상궁. 중방에서 무얼 논의해!”

태후는 상궁에게 물었다.

“중방에서 폐주이신 선황제의 복위를 논하고 있다 하옵니다.”

“복위라니… 복위라니! 복위가 된다면 태자비는 무사치 못한다. 이제 회임을 한 태자비인데 복위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야!”

“제가 알아본 결과로는 충희 대사께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가셨는데 거기서 복위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하옵니다.”

“뭐라!? 이런 세상에… 충희가 드디어 미친 게야…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야! 또다시 황실에 피바람을 불게 하다니… 최상궁,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나러 갈 것이니 채비하라!”

“예! 태후마마.”

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향하였다.

* * *

“황제 폐하, 중방의 의견을 받아 주시옵소서.”

두루마리를 올리자, 내관이 와서는 받아 들고 황제에게로 건넸다.

명종은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펼쳐 살피었다.

“좋소이다… 폐주를 복위하는 것에 짐이 윤허를 하는 바이오. 또한 폐주가 폐위된 연유가 있으니… 복위를 하는 가운데 있어서 이복기, 임종식, 한뢰는 간신배요, 아첨꾼은 정함, 왕광취, 백자단이며 폐주… 아니, 선황이 음양술을 할 줄 안다는 술사들을 등용하여 선황에게 아교하며 몸을 상하게 한영의. 이들의 재산을 재조사하여 모두 국고로 회수케 할 것이다. 또한, 선황의 애첩이었던 무비를 잡아 그 목을 쳐서 선황의 죽음에 책임을 묻게 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선황의 관이 있는 곳에 내시 10여 명을 보내어 선황의 관을 호송하며 호위하도록 할 것이다. 선황을 관에 모셨던 부호장 필인을 호장으로 승격하고, 필인을 도왔던 이들은 상금을 내리도록 하라. 또한 선황의 초상은 해안사에 모실 것이며 금일 부로 전왕의 국상을 선포하니… 만조백관들은 선황제의 장례가 끝나기 전까지는 검은 관에 흰옷을 입도록 하시오. 능은 희릉이라 하고, 시호는 장효, 묘호는 의종이라 하겠소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료들은 명종의 말에 모두 고개를 숙이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위위경 이의방과 그 형제, 가솔들 역시 모두 대역죄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선황께서 복권되셨으니, 이제 그 죄를 물으심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그 일은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더군다나 지금 태자비가 회임 중이니 말이오.”

“폐하… 그렇지 않사옵니다. 태자비는 대역죄인의 딸이옵니다. 회임하였다고 하더라도…….”

쾅!

대전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태후는 정중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 하셨소. 문하시중.”

“태후마마.”

“태후마마, 여기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내 희한한 소리를 들어서 왔습니다! 폐주를 복권시킨다니! 당최 말이 되는 소리를 들어야지요! 더군다나 태자비를 어째요!?”

태후의 말에 명종은 시선을 회피하였고, 정중부는 태후에게 맞설 준비가 되었는지 태후에게 따박따박 대들기 시작했다.

“태후마마, 선황을 복권 시킨다면 폐주를 주살하라고 명을 내린 이의방과, 선황을 살해한 이의민은 대역죄인이 되옵니다. 마땅히 죄를 받아야지 않겠사옵니까.”

“허… 대단하십니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더니만… 지금 딱 그 꼴입니다! 황제! 아무튼 폐주의 복위는 내가 용납할 수 없소이다!”

대놓고 정중부를 무시하는 태후에 말에 발끈한 정중부는 소리쳤다.

“태후마마, 일국의 재상(宰相)에게 그 무슨 망말이시옵니까!”

“재상? 재상 같은 소리를 다 하십니다! 문하시중!”

“…….”

정중부는 태후의 말 한마디에 시선을 회피하였다.

“아무튼! 내가 두 눈이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폐주가 복권되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요! 아시겠소이까.”

태후의 말 한마디에 신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손주의 태자비이다.

거기다가 최근에는 회임까지 하였는데 퇴출을 시킨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역죄인의 누명을 씌운다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황당 그 자체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정중부가 이의방의 권력을 모두 가지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태후는 완전히 폐주의 복권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문하시중, 폐주의 복권을 하고 싶다면 나부터 죽이시오.”

“태, 태후마마…….”

명종은 깜짝 놀랐다.

태후는 의종이 폐위될 때도, 문신들이 도륙이 날 때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꿈쩍도 안 할 태후라는 것을 아는 정중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나는 할 말 다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황실의 어른은 나이기도 하니, 태자비를 퇴출하려거든 나부터 죽이고 난 후에 하든지 아니면 내가 죽고 난 뒤에 하시오.”

그렇게 말한 태후는 몸을 돌려 당당하게 대전 밖으로 나갔다.

이에 명종은 굉장히 난처해져 버렸고, 더불어 지금의 태후가 원망스러웠다.

완전히 제지 시켜 주지 왜 그냥 가버리는 것인가.

이렇게 된다면 나중에 이의방이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 역시 이의방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 물러들 가시오!”

황제가 그렇게 외치고서는 곧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하시중 정중부와 기탁성, 이소흥, 진준, 조원정, 이광정 등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

얼마 후.

“마마, 마마!”

“오, 여기까지 어인 일이시오.”

태후전에 소식을 듣고서 급하게 뛰어온 이는 인조의 4번째 황후, 연수 궁주였다.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전에 가서 못을 박고 왔으니, 아무 짓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왜요. 뭐가 무섭습니까. 태비나 나나 같은 상황을 다 보고 지켜 왔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게 있다면… 태자비가 걱정이지요. 회임 중인데 이 사실을 알면…….”

“심려치 마시옵소서. 제가 태자비를 데리고 함께 있겠습니다.”

“태비가요? 음… 그럼 안심이지요. 최상궁.”

“예. 마마.”

“지금 당장 응양군 상장군인 두경승을 들라 하라.”

“예…….”

상궁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나갔다.

“아, 잠시만.”

“예. 마마.”

“상장군을 부른 뒤에 잠시 사가로 나가서 이의방의 처, 조씨와 내 아우를 불러 태자비와 함께 있게 하게나. 그게 제일 나을 게야. 지금은.”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상궁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나갔다.

“그나저나… 어찌 지내고 있을라나…….”

“동생분 말이옵니까?”

“얼핏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만.”

“그럼 내일쯤에나 한번 만나시지요.”

태비의 말에 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술잔을 홀로 기울이며 술을 마시는 황제는 계속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갑자기 금의 사신이 와서 선황을 봐야겠다고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죽었다고 이야기해도 릉이 어디인지 설명은 해줘야 할 게 아닌가.

만약 그걸 다 설명을 못 한다고 한다면 금나라에서는 반드시 이를 트집을 잡을 게 분명하였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표문도 가짜일 것이라고 바로 탄로 날 게 뻔하였다.

“박 내관.”

“예. 폐하.”

“문하시중을 좀 들라 하라.”

“예. 폐하.”

의외였다.

문하시중 정중부를 이 야심한 시각에 따로 부를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종종 정중부가 찾아오고는 하였지만, 이날만큼은 아니었다.

* * *

깊은 저녁.

문하시중이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다.

“문하시중의 뜻은 알겠네. 나 또한 선황제를 복권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 복권은 하되 태자비와 물론 위위경은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합시다.”

“황제 폐하, 그리되오면 역적들을 황실에 남겨 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더군다나 현재 상황으로써는 그 누구도 위위경을 받들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정중부는 끝을 보겠다는 뜻에 굽힘이 없었다.

“그리하신다면… 태자비 마마는 그대로 두겠사옵니다.”

“문하시중… 지금 짐과 거래를 하겠다는 소리인가?”

황제가 인상을 쓰며 말하였지만, 정중부는 황제의 말에도 불구하고 절대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말하였다.

“태자비를 택할 것이온지… 아니면 위위경을 택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복권을 주도한 것은 신과 중방의 신료들이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선황제의 복권을 윤허하셨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실행은 하겠사옵니다만… 그 뒷감당은 어찌하려 하시옵니까?”

“뭐라…? 지금 짐을 협박하는 것이오? 문하시중!?”

“협박이라니요. 신은 단지 황실을 위해서 말씀드린 것뿐이옵니다.”

“닥치시오! 내 문하시중의 뜻을 따라 황제의 복권은 시키겠다 하였거늘… 되도 안 되는 소리로 짐을 협박하여 위위경을 치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폐하! 어찌 왜곡하시옵니까?”

황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도 정중부는 그 사실을 부정하였다.

“더 이상 문하시중의 말은 듣기 싫으니, 물러가시오!”

황제의 말에 정중부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제는 속 타는 마음을 달래듯 술을 연거푸 따라 마셨다.

* * *

얼마 후.

중방으로 돌아온 정중부는 아직까지 퇴청하지 않은 신료들과 자리하였다.

“위위경이 오는 그날로 바로 시작할 것이오.”

“…….”

각오한 신료들은 물론이오.

긴장하는 신료들도 보였으며 자신의 편에 섰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조원정이었다.

조원정은 시선을 이곳저곳에 두며 계속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이의방의 사람이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조원정은 자신과 거래를 하였다.

공부상서에 응양군 상장군을 주기로 말이다.

그 생각을 한다면 결단코 정중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도 하다.

이의방이 절대 조원정에게 공부상서를 줄 사람은 아니란 걸 잘 아는 정중부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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