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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천하의 주인-23화 (23/159)

023화

충희에 입에서 정중부가 나올 줄을 꿈에도 몰랐다.

정중부는 폐주를 폐위시킨 것에 거들었는데 말이다.

현재에 와서 정중부를 믿으라는 소리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안 그래도 태후이신 어머니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걸, 너무나 잘 아는 상황인데 정중부를 불러들여 폐주에 관한 것들을 의논하여 복권(復權)시키려 든다면 태후이신 어머니가 이를 말릴 것은 분명하였다.

태후는 현재의 태자비를 예상외로 예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아…….”

명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좋을지 몰라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폐주가 되신 형님은 아주 비참하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겁니다. 알고 계십니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뭐라?”

“형님의 시신을 요에 두루 싸고, 등뼈가 부러진 형님을 가마솥에 구겨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마솥을 합하여 연못에 던져 넣었는데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면서 흙먼지와 모래가 날아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며 모두 도망갔다 하옵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자신도 대충만 이야기만 들었는데, 충희는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곤원사 승려에게 들었습니다. 폐주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곤원사 북쪽 못에 들어가 가마솥만 가지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시체는 차마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어, 폐주의 머리카락 몇 가닥만을 가지고 제를 지내었다 하니… 곤원사의 승려를 크게 칭찬해주시옵소서.”

“그건 충희, 네가 알아서 하거라.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명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폐하, 부디 폐주를 생각하시어… 복권 시켜 주시옵소서. 폐주는 억울하게 살해당하셨사옵니다. 또한 왕씨는 용손이라 불리는 걸 모르시옵니까? 폐주이신 형님의 시신이 못에 며칠째 떠올라 있었는데도 물고기, 까마귀, 자라, 솔개가 감히 형님의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거 역시나 왕 씨는 용손의 후손이라는 말이 확실해진 것이 아니옵니까? 폐하, 부디 폐주를 복권시켜 그 억울함을 풀게 하시옵소서.”

충희에 간절함에 명종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더군다나 경주에서 모든 걸 본 곤원사의 승려와 그걸 지켜봤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믿어도 될 만한 말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지금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에 금나라 사신이 말한 이야기가 떠오르는구나. ‘국왕의 수명은 길어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지금 조정에 가득 찬 늙고 젊은 신하들이 모두 죽은 연후에 냇가에 임하여 근심하실 것이옵니다.’라고 말을 했었지. 그게… 이 뜻이었나 보구나… 하아…….”

명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내관, 문하시중을 들라 하여라. 그리고 충희야… 폐주를 복권 시킬 것이나, 대역을 저지른 이들의 처벌은 힘들 것 같구나.”

“복권이 어디옵니까. 더 이상은 바라지 않사옵니다. 폐하.”

명종은 충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라 해도 가족이자, 핏줄이 아닌가.

명종은 그렇게 생각하고 충희의 말을 믿었다.

“폐하, 하면 소승은 이만 물러 가보겠사옵니다.”

명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충희는 뒤로 물러나가고 내관 역시 뒤로 물러 나갔다.

* * *

얼마 후.

용호군 상장군 문하시중이 대전으로 들어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폐하, 어인 일이시옵니까.”

“내 선왕이자, 폐주를 복권시켜 장례를 치르고자 하니… 이를 중방에서 의논하여 짐에게 그 뜻을 알려주시오.”

정중부는 명종의 말에 고개를 숙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허나, 폐주를 복권시킨다면 이의방과 이의민… 이 둘은 크나큰 대역죄인이 되옵니다. 황제 시해를 하는 것은 천하의 둘도 없는 죄악이오니, 어찌 죄인들을 그냥 놓아둘 수 있겠사옵니까. 지난 사신으로 갔던 유응규를 금의 사신으로 보내어 이 사실을 금에 이실직고하여 이의방과 이의민을 천하의 둘도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처벌을 받게 하시오소서.”

“뭐, 뭐요!?”

명종은 깜짝 놀랐다.

금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내어 사실을 고하고, 이의방을 제거하려고 하는 정중부가 무서울 정도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지난 금나라로 갔던 유응규 역시 금을 설득시키는데 힘들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고하면 금나라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었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즉위 전에 보내었던 표문(表文)은 어찌하란 말인가.

정말로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문하시중, 하면 그 표문들은 어찌하란 말이오.”

“예?”

“표문 말이오. 표문.”

“…….”

정중부는 아차 싶은 눈치였다.

자신도 표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더군다나 글자도 잘 모르니 표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박내관, 금에 가져갔던 표문의 사본을 가져오라.”

“예. 폐하.”

박내관이 급히 대전 밖으로 나가자, 명종은 정중부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표문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아시오.”

표문을 보여줘도 읽지도 못하는 문하시중이니, 결국에는 내관이 읽는 게 나았다.

황제가 신하에게 읽어 주는 꼴이었다.

뭔가 맞지 않는 행동이나 어쩌겠는가.

“흠흠…….”

정중부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였다.

개망신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 * *

얼마 후.

내관이 급히 다가와, 지난날의 표문의 사본을 가져왔다.

“문하시중에게 폐주의 표문 일부분을 읽어 드리도록 하라. 요약해서.”

“예. 폐하. 읽어 드리겠사옵니다.”

─오랫동안 병에 걸려 점차 쇠약해지더니, 마음과 정신이 어둡고 거칠어졌다. 기력도 이로 인해 점차 쇠하여 전의가 고약을 써도 효험이 없고, 약을 먹어 명현이 있어도 병이 낫지 않으니, 병이 고황에 들어 치료할 수가 없다. 황제께서 보호해 주신 사사로운 은혜를 우러러 선조께서 씨뿌리고 개척한 왕업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부왕께서 이르시기를 혹시 왕위를 교체해야 한다면 반드시 먼저 네 아우에게 주라…….

박 내관의 끝없이 표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끝내 다 읽었는지 명종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들으시었소? 허위로 문서를 꾸며 만들었는데 금나라로 가져가 진실을 말하면 곤란하지 않겠소. 문하시중 다시 생각해주시오.”

명종의 말에 정중부는 허리를 굽히며 고하였다.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폐하. 허나, 복권(復權)이 된다면 선황제를 시해하라 명을 내린 이의방과 이의민은 만고의 역적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오니… 선황의 복권에 따라 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뭐, 뭐요!”

정중부의 말에 명종은 깜짝 놀란 듯했다.

척살 명령이 성공한다면 황실과 자신은 안전하겠지만, 실패한다면 황실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목숨 또한 죽게 될 것은 자명하였다.

명종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는 게 너무나도 비참하다는 걸 느끼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폐하! 대역죄인이옵니다! 선황의 복권을 하시려 한다면 이의방을 반드시 쳐내야 할 것이옵니다!”

정중부는 점점 언성이 높아져 가기 시작했다.

“중방에 의견을 묻고, 짐이 결정하겠소이다!”

명종 또한 더 이상 정중부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소리를 높이자, 정중부는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명종은 무례하게 나가는 정중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허… 정녕 내가 이 나라의 황제가 맞나… 하하하하.”

명종은 지금의 현실을 탓하며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통곡하고 싶었지만, 어찌 대전의 아랫것들 앞에서 황제가 크게 통곡을 할 수 있겠는가.

명종은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폐하, 주안상을 올리라 하겠사옵니다…….”

상궁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하자, 명종은 고개를 끄덕였고 상궁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 나갔다.

* * *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하하!”

정중부는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발하였다.

자리에 앉자, 술잔을 기울이는 건 충희였다.

“고맙기는요. 솔직히 저도 이의방이라는 인사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불어 우리 모든 승려들이 이의방을 적대하니, 저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나저나… 약속하신 건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만 믿으십시오.”

정중부는 약속을 지키겠다며 답을 하였고 충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찰 재건 일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불교를 더 부흥시킬 것입니다. 저희 고려의 국교가 무엇입니까. 불교 아니옵니까. 그런 불교를 탄압하다니… 위위경도 정말 못난 짓을 한 것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백성들도 불교를 숭상하고 마음속 깊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제깟 놈이 뭐라고 크흠!”

승통 충희는 술잔에 술을 따라 벌컥 마셨다.

“위위경이 불교를 탄압한 건 많은 제물들이 사찰로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날 승려들을 죽일 때도 1천의 군사를 대동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승통께서 제대로 된 보고를 못 들으신 듯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수천 명의 승려분이 이의방을 죽이겠다며 개경으로 들어왔을 때 이의방이 데리고 온 군사의 수가 무려 1만이었습니다.”

쾅!

승통 충희는 그 말을 듣고 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정중부는 미소를 지으며 충희의 술잔에 술을 한잔 더 따라 주었다.

“그나저나… 태후전에는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아, 예… 가봐야 하는데 이미 이렇게 술을 기울이고 있으니, 술 냄새를 풍기며 어찌 태후 전에 들어가겠습니까.”

“하하하, 그렇네요. 그럼 오늘은 저희 집에서 쉬셨다가 내일 중으로 태후전으로 가시지요.”

“고맙습니다. 문하시중.”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오늘 마음껏 드시고 푹 쉬십시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마시고 즐기었다.

* * *

“이런 세상에… 아주 작정을 하였구나! 작정을! 대체 아우는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안 오는거야!”

이준의는 대전에서의 소식을 듣고서 방방 뛰었다.

잘하다가는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형님… 이럴 게 아니라 작은 형님한테 사람을 보내시지요.”

“밖에서 안 보이는 눈들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는데 내 어찌 보내느냐… 아니, 보냈다가는 더 큰 일을 치를 수가 있어… 그나저나 사돈에게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없습니다. 형님.”

이린의 대답에 이준의는 가슴을 퍽퍽 쳤다.

너무나도 답답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네 형을 불러와야겠다. 밖에 박지영 대장 있는가!”

이준의는 크게 소리쳤다.

“예. 대감 찾으셨습니까.”

박지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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