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이 일을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내 집사를 간신히 보내 이의방에게 일러두었지만, 이의방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정중부에게 시간을 더 준 셈인 건지 아닌지를 모르겠지만… 만약 이들 중 하나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누구를 택할 건지 그걸 묻는 겁니다.”
“허허, 택하다니요. 우리는 이 나라의 신하입니다. 또한 황제 폐하의 신하이지요. 우리는 정중부와 이의방 누구의 신하도 아닙니다.”
“네. 그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도 살아남아야 할 거 아닙니까. 지난 세월을 생각한다면 아니… 바로잡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 크지만 어찌합니까. 지금의 황제 폐하를 잘 보필하여 안정화가 시급한 문제지요. 하지만 정중부와 이의방 두 사람들끼리 창검을 휘두른다면 결국에는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끝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라도 정중부가 권력을 움켜쥐게 된다면…….”
“압니다. 암울하겠지요. 다들 아는 거 아닙니까.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그 말이 맞습니다. 정중부는 난을 일으킨 주역 중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권력욕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이의방을 가만히 둘 수가 없겠지요. 거기에 지금 이렇게 깔끔하게 자리를 비워 주었으니… 오히려 더 신중에 신중을 가할 것이 아닙니까.”
유응규에 말에도 틀린 말이 없었다.
“폐주의 죽음.”
유응규가 말을 덧붙이자, 문극겸은 깜짝 놀랐다.
“뭐라… 하셨습니까?”
“폐주의 죽음을 역모죄로 몰아서 이의방을 죽이려 할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황실에다가 충신이 어떤 건지 보여주려 들겠지요.”
“그 말씀… 태자비를 말한 겁니까?”
“또 누가 있습니까? 그거 하나로 인해서 이의방은 몰락할 것입니다. 아니, 고려 전체에 이의방은 적을 두는 것이지요.”
“압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둘 중에 누굴 택해서 이 나라를 우선적 안정시키는 게 좋겠냐. 이말 입니다. 고려의 현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대니까 묻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청한 것이기도 하고요. 둘 중 하나가 죽어 나가야지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까?”
참으로 애매하다.
이의방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일자무식에 권력만 휘두를지 알지 정치는 전혀 할 줄도 모르고 권력만 쓸 줄 안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수하라면 쉽게 버리지 않는 의리파라고 보면 되겠다.
이에 반해 정중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우처럼 행동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적이라면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 마는 성격으로, 겉으로는 황실을 위한 척하지만, 뒤로는 이의방 못지않게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거기에 이의방과 좋지 않은 관계까지 생각한다면, 정중부가 참고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연을 맺었다고 하지만, 서도 남은 남이다.
그렇기에 둘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난을 일으킬 당시의 대의명분은 확실하였고, 민심은 그들을 밀어주었다.
하지만 그 대의도 점점 썩어 문드러져 갔고, 결국에는 민심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 정중부와 이의방을 두고 선택하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유응규는 술병을 들고 잔에 술을 채워서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제가 답을 드리지요. 나서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해오신 대로 이의방과 거리를 두세요. 아니, 지금부터라도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정중부와 이의방은 갈 데까지 간 사람들이니, 이번에 끝을 볼 겁니다. 그러니 누가 정권을 잡던 간에 개의치 마시고, 소신껏 할 말은 하시면서 정치를 하십시오. 그게 정중부가 이기든, 이의방이 이기든 간에 누구도 문공을 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까?”
문극겸은 재차 다시 물었다.
“누가 이길지도 모르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이의방 역시나 폐주를 죽인 원흉이 아닙니까. 피해갈 수는 없으며, 그의 수하인 이의민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폐주를 죽여야만 했던 명분이 있으면 피해는 갈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정중부가 쉽게 굽힐 인사는 아닌 거 같고, 어떤 수든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참에 이번에 모든 게 결판이 나지 않겠습니까.”
유응규는 그에 대한 답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자, 문극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연거푸 술을 따라 마셨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방관하라.’
문극겸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고려는 정말 고려인가보다.
이렇게 많은 산을 탈지 누가 알았을까.
지리산보다도 더 험한 산세들이 눈에 들어왔었다.
자신이 평소에 다니던 지리산은 그냥 동네 마실 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었다.
그래도 공기 하나만큼은 끝내주었고, 산길을 따라 걸을 때 눈에 들어오는 약초들은 거의 약초밭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았다.
묵묵히 따라오는 갑이.
나는 갑이에게 말을 한마디도 붙이지 못하였다.
무슨 말만 하면 자꾸 이놈이 어쩌고저쩌고해대니, 도저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개경으로 가지 않았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기로 했다.
고려 시대는 어떨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는 김에 적응도 해볼 겸 돌아다녔다.
아직 머리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니, 적응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폰이라도 가져올걸…….’
옛날에 이어폰 끼고 산에서 약초 캐다가 굴러떨어져 진짜 죽을뻔한 이후로는 절대 산에서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와… 근데 막상 적응하려고 하니… 도저히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싱숭생숭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막상 적응하려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할지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갈팡질팡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때문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 X발!”
소리치면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
갑이는 아무런 말 없이 현수의 뒤에서 지켜보았다.
갑자기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리, 이만 가시지요. 해가 집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현수를 보며 조심스럽게 갑이가 말하였다.
갑이의 말대로 해가 점점 지고 있는 게 보이자,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예! 가까운 곳으로 뫼시겠습니다.”
갑이 앞에 서서 걸어갔고, 현수는 갑이의 뒤를 따랐다.
* * *
얼마 후.
어디인지도 모를 법한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식점(食岾)에 들렸다.
갑이는 식사를 시킨 후에 하루 묵을 방까지 마련하였다.
“술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나리?”
갑이의 물음에 순간 술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더덕주, 산삼주, 도라지주, 오가피주, 말벌주, 불개미주 할 거 없이 다양하게 마셔보았던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국화주 한 병 내주시게.”
“예!”
그냥 칼을 든 무사로만 보이는 갑이였다.
누가 갑이를 노예라고 보겠는가.
하지만 노예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신분이 있는 집안에 가노(家奴)라면 사람을 깔보기도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아까와는 정말 다르네요.”
“예?”
“아, 아니에요.”
“혹시 이놈이 또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아니야!”
“아… 예.”
또다시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갑이의 모습에 현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자기 주인을 지키는 가노라면 밖에 나와서는 당당해야겠지?’
그리 생각한 현수는 시원하게 물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 후로 얼마 뒤에 상이 차려져 나왔다.
닭백숙에 나물 몇 가지.
그리고 고기가 구워져 나왔고, 국과 밥도 나왔다.
“국화주입니다.”
“고맙네.”
갑이의 말에 주인은 고개를 숙이었다.
‘저 사람은 이 사람이 노비라는 걸 알까?’
갑이는 먼저 술병을 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살짝 숙이며 술병을 들이밀었다.
“왜, 왜 이래요?”
“이놈이 감히 한잔 올리겠사옵니다.”
“…….”
갑이의 행동에 현수는 주위를 살피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
무사와 노예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 가 싶었다.
실제로 보지도 못 한 일들을 겪고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역사에 관심이 많던 현수였지만, 골치 아픈 건 질색이었다.
현수는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아 마시었고, 갑이는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드시지요.”
“아… 네.”
“말 편히 놓으십시오. 이놈에게는 오히려 그게 불편하옵니다.”
상전 이상으로 대하는 갑이의 행동에 현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적응해야지… 안 그러면 진짜 미쳐 버리겠네. 그나저나 이거 내가 알고 있는 고려 맞아?’
“흠흠…….”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말투로 현수는 갑이에게 물었다.
“올해가 몇 해더냐?”
“명종 8년이옵니다.”
‘하… 고려 맞네.’
다시 한번 더 날짜를 확인한 현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술병을 들어서 자신의 술잔에 채워 다시 마셨다.
현세(現世)였다면 당장 뒤통수가 아파올 일이었지만, 이곳은 고려였고, 그 누구도 학생인 내가 술 먹는 데 있어서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고려사 제대로 공부하게 생겼네.’
역사 공부가 아니라, 완전히 뒤죽박죽되어버린 고려를 어떻게 일으키냐가 후에 관건이 될지 현수는 몰랐다.
갑이와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현수는 고려에 대해서 궁금했던 많은 것들을 물었다.
* * *
며칠 후.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비록 출가하였다고 해도… 너는 짐의 아우이다. 헌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냐.”
“폐하, 폐주는 저희 큰형님 되십니다. 형님이 오해를 자주 하셨다고는 하나, 우리 형제들이 살아 있을 때까지 큰 형님이신 폐주가 우리를 돌보아 왔사옵니다. 그런 걸 모르는 척한 채, 신료들의 눈치를 보며 폐주를 계속 그리 놓아둔 것은 차마 아우된 입장이자, 부처님을 모시는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벅차옵니다.”
흥왕사 승통 충희가 명종에게 말하자, 명종은 충희에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감았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충희의 말이 옳다고 생각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폐주를 복귀시킨다면 위위경과, 용호군 대장군 이의민은 대역죄인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태자비는 어찌 되겠느냐.”
“폐하, 역적의 무리가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자 태자비를 세운 것이 아니옵니까. 어찌하여 대역죄인들을 옹호하려 드시옵니까. 더불어 아직도 황제 폐하를 따르려는 신하들은 주위에 많사옵고, 귀족들 또한 주위에 넘치옵니다. 바로 정중부 말이옵니다.”
“정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