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아버님, 이참에 이의방의 가솔들을 모조리 붙잡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그다음 폐주를 시해한 이의방을 역적이라고 선포하라고 황제 폐하께 말씀드린다면… 이의방이 흥위위 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쉽게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흥위위군 역시 역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테니까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합지졸이 될 것이옵니다.”
“…….”
“그뿐만 아니라, 이의방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도 이의방을 쉽게 살려두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의 말이 옳다고 여겨진 정중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들 정균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특히나 이의방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말머리를 돌려 해주로 갈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냐.”
정중부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실권이 없는 황제라 할지라도 이 나라의 큰 어른이다.
더불어 태후 또한 문제가 되니, 자칫 하다가는 또 태후와 안 좋은 이야기만 해댈 것이 분명하였다.
“이놈의 태후도 생각하면 정말 짜증이 난단 말이지…….”
“예? 그…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생각을 해보거라. 내가 이의방을 역적으로 만들자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린다면 반드시 태후가 나서서 극구 반대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태후와 내가 싸우게 될 것은 자명하지 않느냐.”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두 부자였다.
“허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좋은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문극겸도 문제고… 태후도 문제고…….”
사실적으로나 황제는 두렵지 않은 존재였다.
오히려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비록 어리지만, 그 생각이 깊으니 태후도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태자였다.
덜컹.
방문이 열리며 송유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자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지금 막 경진을 만나고 오는 길이옵니다. 장인어른.”
자리에 앉은 송유인은 경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현재 응양군 장군직에 있는 경대승에 관한 일로 그러하온데…….”
“아, 됐네. 됐어.”
“예?”
“안 봐도 뻔하지 뭐. 경대승이가 안 간다고 하였겠지. 안 봐도 뻔해. 어릴 때부터 워낙 올곧은 성격이었으니까. 견부호자라더니만… 여전하군. 하하하하하!”
정중부는 크게 웃었다.
“아버님, 웃으실 때가 아니옵니다. 경대승을 제거하고, 응양군에 우리 쪽 사람을 필히 넣어야 2군 6위 모두가 아버님 손에 들어올 것이옵니다. 그리한다면 이의방은 날개가 꺾인 호랑이입니다.”
정균의 말에 정중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면… 차라리 두경승을 우리 쪽으로 두시 오소서. 경대승은 제가 회유를 해보겠사옵니다.”
“경대승이가 회유로 될 놈이라면 진작 내가 회유를 했을 것이다. 아니, 제 아비의 말을 따랐겠지. 이의방 이놈이… 아주 독종들로만 골라 응양군으로 심어 놓았어. 이춘부는 이의방보다는 두경승을 오히려 더 잘 따르니… 이춘부 또한 쉽게 우리 쪽으로 들어서지는 않을 것이야.”
정중부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그러한지 정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송유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자네가 가지고 있는 군사들을 잘 단속하시게. 알겠는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장인어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그래!”
“왜 그러느냐?”
정균이 묘안이 생각났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충희 승통이라면 다르지 않겠사옵니까?”
“…….”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인종의 아들로 흥왕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현재는 승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황실로 들어오지 않는 충희 승통을 어떻게 데려오고, 어떻게 설득시킬 거란 말인가.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크기도 했다.
정중부는 곰곰이 깊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예? 그건 아니라니요.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충희 승통이 우리와 함께해준다면 이의방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건 쉬운 일일 겁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충희 승통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을요.”
“예. 처남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장인어른.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충희 승통을 만나시지요.”
정균과 송유인의 말에 정중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 물러들 가봐.”
정중부는 머리가 아픈지 두 사람에게 나가라며 손짓을 하자, 정균과 송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곧장 밖으로 나갔다.
“충희 승통이라……. 이것 참…….”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이의방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어떤 방법이 좋은지 알 길이 없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현재 상황으로 보아서는 뾰족한 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중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 * *
‘정중부와 이의방… 이제 둘 중 하나는 결판이 나야 할 때가 온 것인가?’
문극겸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의방이 어떻게 나올지는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정중부 역시 지금쯤 알고 있을 것이고, 이를 안 이상 무엇이든지 결론을 낼 게 확실하였다.
지난날, 이준의가 찾아왔다.
정중부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함께 예측하며 의논을 했다.
그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8할은 이의방에게 역모죄를 씌울 것이고, 2할은 암살을 시도하리라 생각했다.
누가 뭐라 하여도 정중부는 2할에 손을 대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2할은 애초에 배제 시켜 놓았다.
“이의방이 죽는다라…….”
이의방이 죽고 나면 벌어질 상황도 예측을 해보았다.
현재의 태자비는 물론이고, 이준의, 이린, 이거 두 사위 또한 무사치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거와 이린은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 있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거는 지난날 정중부를 도와 구해준 일이 있으니, 정중부가 이의방과의 싸움에서 이긴다고 하여도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외 이의방의 일가 대부분은 죽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정중부와 그 일파들은 더욱더 기고만장해져 황실 자체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할 것이다.
또한 정중부에 붙은 간신배들까지 생각한다면 황실이 어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주인어른, 공부시랑 유응규 대감께서 오셨습니다.”
“오, 어서 뫼시어라.”
덜컹.
방문이 열리면서 유응규가 안으로 들어섰다.
“공부시랑, 어서 오시오.”
“아… 예…….”
유응규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문극겸과 함께 자리하였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공부시랑. 솔직히 공부시랑같이 논리가 밝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칭찬을 해주시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건강은 어떠합니까? 지난번에 들은 바로는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별거 아닙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문극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유응규는 성격이 올곧고, 남이 주는 것도 쉽게 잘 받지도 않는 성품이었다.
그런 그가 남경 유수로 갔을 때는 유수로서 수임을 잘하여 백성들이 감사함에 주는 물건도 받지 않는 청렴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부인이 해수병(咳嗽病)에 걸렸는데도 남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나물국을 끓어 먹이었다.
이를 본 남경의 관리가 하도 안쓰러워 집 앞에 꿩이라도 놓고 갔더니, 오히려 남편의 명성에 위해가 된다며 안 먹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보니 유응규에게는 못 먹어서 생긴 병이 나버렸다.
“거… 고기라도 사가서 드시라니까. 아직도 그러십니까?”
“하하하… 고기는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안 먹는 거지요. 개경 밖에는 굶어 죽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생각하니… 차마 못 먹겠더군요. 나라에서 나오는 녹이 어디 제 것입니까.”
한편으로는 정말 답답한 인사였다.
남 걱정하기 전에 자기가 죽을 판국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성격이 저러한 것을.
오늘 문극겸이 보기를 청한 이유도 함께 식사라도 하며 현재 일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묻기 위함이었다.
유응규에게는 시원한 해결책이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아시다시피, 제가 뵙기를 청한 이유도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저희 내외와 자식들 모두 청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응규의 감사의 말을 듣자, 문극겸은 고개를 숙이었다.
“별말씀을요. 지금쯤이면 식사 준비가 다 되었을 겁니다. 이제 곧 이쪽으로도 상이 들어올 것…….”
“주인어른,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집사의 말이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앞에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고기 찬과 나물, 전, 떡 등의 수많은 찬들이 놓였고, 고기에 어울릴만한 술 또한 준비가 되었다.
“국화주입니다. 진하지도 않고 순하게 담갔습니다. 이 술은 저희 안사람도 즐겨 마시는 술이지요.”
“아하하하, 그렇습니까.”
“예. 자, 받으시지요…….”
문극겸과 유응규는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금나라에 갔었던 이야기도 상세히 풀어내며 문극겸과 유응규의 술자리가 길게 이어져 나갔다.
* * *
얼마 후.
술병이 벌써 일곱 병이나 비워졌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으니 정말로 약한 술인 듯했다.
“대감, 대감께서는 이 국화주를 매우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하하, 그리 보입니까? 원래는 국화주가 약하다고 하여도 혼자 반병 정도 마시면 취기가 좀 오르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저도 취하지 않습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문극겸이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저… 공부시랑.”
“예. 왜 그러십니까?”
“공부시랑이 듣기에는 민망하고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직설적으로 묻겠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정색을 하는 문극겸의 모습에 유응규는 자연스럽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정중부와 이의방…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하시면 누굴 택하겠습니까?”
“…예?”
“공부시랑도 알 거 아닙니까. 위위경이 자리를 비운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사이에 정중부는 계속해서 입지를 개경에서 다져가고 있고, 위위경 이의방을 어떻게든 쳐내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