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그날 저녁.
저자를 비롯해 곽주 인근을 살펴본 결과 목책은 말이 아니었다.
관리가 안 된 탓에 다 썩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밧줄마저도 다 썩어버려 부스러지고 있었으니, 이를 본 이의방이 한숨이 절로 나왔었다.
“정말 너무 한 거 아닌가. 목책이 썩고, 밧줄이 썩어서 부스러져 가고 있는데 교체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겐가?”
이철용은 역시나 고개를 숙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종일 이의방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있는 이철용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 목숨 줄은 겨우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군사 훈련 준비는 다 되었나?”
더 이상 말하기도 힘든지 이의방은 이철용에게 훈련준비에 대해 물었다.
“예. 위위경. 준비가 다 되었사옵니다.”
“시작하게.”
“예.”
이철용은 몸을 돌아서 큰소리로 외쳤다.
“군사 집결!”
그의 말에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대열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방패수가 전방에 서고, 뒤에는 창병이 방패에 창을 걸어 방패수를 최대한 보호하며 기병을 막고 적들을 막는 방진을 선보였다.
이의방은 방진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은 생각보다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진행하게.”
“예. 위위경.”
이철용은 계속 지법을 바꾸어 가며 시연해 보이기 시작하였다.
기본적인 진형부터 시작해서 고난의 진을 선보였다.
이의방은 계속해서 이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진! 추행진!”
“…….”
일순간 병사들이 당황했다.
이의방이 추행진이라고 외치자, 우왕좌왕하는 군사들을 보고는 이의방은 곧장 허리에 패용(佩用)한 검을 뽑아 들고서 이철용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 이노옴!”
“위, 위위경!”
털썩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인 이철용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돈 장군! 박 장군!”
“예! 위위경!”
“이놈을 끌고 가서 곤장 백 대에 처하고, 지금 여기 군영 자체를 점거하여 이놈들을 곽주의 정예병으로 만들도록 하라! 또한 곽주 방어사 이철용은 지금 이 자리에서 등급을 일반 병사와 동급으로 대우하여 함께 훈련을 받게 할 것이다. 대장군이 잘못했으면 대장군의 부장인 네놈들도 똑같이 훈련을 받아야겠지!”
이의방은 이철용의 부장들을 바라보며 외치자, 부장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들은 삼십 대씩만 치고, 전부 확실히 점거해서 정예화시켜라!”
“예! 위위경!”
“따라와라!”
이의방이 검을 거두자, 돈장이 이철용을 마치 죄인 끌고 가듯이 끌고 가버렸다.
박존위는 이철용의 부장들에게 발길질을 가하면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철용 또한 갑옷을 벗기고 있었다.
장수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말 없이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장수가 잘못을 했으니, 비호(庇護)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군.”
이영령을 부르자, 이영령이 곧장 이의방에게 다가왔다.
“예. 장군.”
“군사들을 확실히 훈련시키게. 이곳에서 며칠 있다가 출발할 것이니… 돈 장군과 박 장군만 남겨 놓고 돌자고.”
“예. 알겠사옵니다! 부장들은 뭐하느냐! 군사들을 재집결시켜라!”
“예!”
중랑장들이 훈련장으로 뛰어 들어가 곽주의 군사들을 호되게 재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군사 훈련을 잘하다가 갑자기 날벼락 맞은 병사들이었다.
이의민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 앞에서 아주 망신을 주려고 아주 벼르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기회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 대장군.”
“예. 위위경!”
“우리 흥위위 군사들을 대동하여 군영 훈련장에서 함께 훈련시키도록 하게. 요즘 좀 놀아서 기강이 해이해졌을 거야!”
“예! 위위경!”
이의민은 자신의 부장을 불러 명을 내리자, 부장들은 속히 움직였다.
* * *
목자득국설(木子得國說),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
이 둘은 유행하던 예언이다.
이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설인데, 이 이야기는 많은 이씨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하였다.
목자득국설의 목(木)과 자(子)를 합치면 이(李)가 되고, 십(十)과 팔(八) 그리고 자(子)를 합쳐도 이(李)가 된다.
이 예언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모르지만, 이자겸은 확실히 이 이야기를 믿었던 모양이었다.
이자겸은 권력을 계속해서 강화해 나아갔고, 자신의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을 보내고도 이에 그치지 않았다.
결국 이자겸은 황위를 찬탈하고자, 인종을 독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독살에는 끝내 실패하였고, 이를 인정할 수 없는 이자겸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도 실패로 끝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십팔자위왕설을 믿었던 이자겸 이후, 이고가 다시 용손 십이진 십팔자위왕이라는 예언을 믿고서 권력을 탐하였고, 황제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결국 이의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하아…….”
이의방은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위위경.”
“이 대장군.”
“예. 위위경.”
“용손 십이진 십팔자위왕이라는 예언을 믿는가?”
“위위경, 소장은 일자무식이라 그 말의 뜻을 모르옵니다.”
“용손이 12대에 끝이 나고,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예언이네. 생각해보면 대체 이 예언이 어디서 나온 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더군다나, 그 말을 믿고 몇몇이 싸우다 하직하였지 않은가.”
“…….”
“이자겸이 그 말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비참하게 죽었고… 이고도 그랬지…….”
“위위경. 다 헛소리입니다.”
“하하하! 그래… 헛소리지. 헛소리야.”
곽주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곽주 방어사부터 그 장졸들까지 계속해서 굴렸고, 굴린 만큼 굴렸다고 생각한 이의방은 내일 중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곽주에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가서 살펴야 하니 말이다.
제발 다음에 갈 그곳은 이렇게 개판만 아니기를 바랐다.
“위위경, 헌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하시면 점쟁이를 찾아가시면 되지 않으시옵니까?”
“하, 점쟁이? 되었네. 나는 그런 거 질색이야.”
이의방은 손사래를 쳤다.
“허면 어찌하여 위위경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냥 갑자기 이고가 생각나서 말이야. 그놈의 예언이 뭔지… 참나…….”
이의방은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아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위위경.”
오늘은 갑주가 아닌 평복을 입고 곽주를 이곳저곳 편안하게 돌아다녔다.
“그래. 그렇게 하자고…….”
이의방은 천천히 다시 관아로 향하였고, 이의민이 이의방의 뒤를 지켰다.
* * *
다음 날 아침.
이의방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마쳤다.
곽주 방어사 이철용과 마지막으로 만난 뒤, 돈장, 박존위에게 곽주에 남아 군사를 정예병으로 만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라고 명을 내리고서는 통주로 군을 이끌고 향하려던 찰나였다.
“위위경! 위위경!”
말 위에 타고 막 출발하려던 순간,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더니 문극겸의 저택의 집사 안집사였다.
“아니… 자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위위경…….”
집사는 곧장 말에서 내려서는 위위경에게 다가가 곧장 고하였다.
“급히 개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시라고 꼭 말씀드리라 하셨습니다.”
“뭐!? 갑자기 무슨 일로!”
이의방은 당황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문극겸이 급히 개경으로 들어오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보게, 대체 무슨 일로 오라는 건지 이야기는 해주었을 거 아닌가.”
“송구합니다. 그 말씀밖에는 안 하셨습니다.”
묘하다.
개경에 문제가 생길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다가 순간 이의방의 머릿속에 정중부가 떠올랐다.
“정중부냐? 정중부 일로 오라는 것이냐?”
“아마도… 그러는 듯싶습니다.”
집사도 애매하게 답을 하였다.
문극겸이 보낼 때 그냥 빨리 돌아오라는 말만 하였지 직접적으로 누구를 언급하지 않았으니, 집사는 애매모호하게 답을 한 것이었다.
“그래… 알겠다. 사돈이 너에게 어찌하라더냐?”
“예. 위위경과 함께 오라고 하였습니다.”
대충 파악이 되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이라고.
정중부가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손을 쓰는 게 분명하였다.
꿈에서 본 장면과 척척 들어맞지 않는가.
이 군대는 본래 서경 유수를 치러 가야 할 군대였고, 조위총과는 다행히 이야기가 잘되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데 있어서 꿈에서 마냥 정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이니 말이다.
“이 장군.”
“예. 위위경.”
“자네가. 군사 5령을 이끌고, 6주를 돌아 동북 면을 거쳐 개경으로 오게. 그렇게 해서 다 살펴보고 나에게 와서 알려줄 수 있겠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위위경. 맡겨만 주시옵소서.”
“그래. 그럼 나는 개경으로 가겠네. 매제는 이만 돌아가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 장군! 돈 장군!”
마중을 나온 박존위와 돈장을 불렀다.
“예! 장군!”
“따로 소식을 보내기 전까지는 여기서 계속 있도록 해.”
“명 받습니다!”
두 사람은 이의방에게 군례를 올리었다.
“이 대장군.”
“예. 위위경.”
“자네는 지금부터 나를 따르게.”
“예! 위위경!”
이의방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을 앞뒤에서 찔렀던 부장들이 떠올랐다.
이의방은 곧장 뒤를 돌아보면서 부장들을 살펴보았다.
제발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옆에 항시 데리고 다녔던 부장 이영령, 고득시, 돈장, 이의민, 박존위를 제외하고 항시 중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자신을 보좌했던 부장, 그 둘이 있는지 살피던 찰나, 시야에 딱 들어오는 두 부장이 보였다.
이의방은 그 둘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생각을 못 한 것일까… 아니… 왜 저들이 여기 있는 거야.’
흥위위에 속하지 않은 부장이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있던 것인가.
대체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하는 건지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이 대장군.”
“예. 저 둘을 데리고 일단 오게나.”
우선 확인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만약 저 둘이 정균의 끄나풀이면 바로 죽여 버릴 것이다.
화근은 미리 제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이의방은 다시 말에서 내려 부장 둘이 올 때를 기다렸다.
곧이어 이의민과 부장 둘이 이의방에게로 다가와 군례를 올리었다.
“추웅!”
“그래… 자네들은 언제 여길 따라왔느냐?”
“위위경께서 채비를 하실 때였습니다.”
“그럼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
“…예?”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 물었다. 더군다나 나는 내 기억에 너희들을 데려온 적이 없다. 그리고 출발 전에 미리 보았다면 내가 너희 둘이 있는걸 알았을 것이다. 허나, 너무 이상하리만큼 나타나니… 내 얼마나 당혹스럽겠느냐.”
“…….”
“…….”
이의방의 말에 부장들은 할 말을 잃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