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물불 안 가리고 다 박살 내버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의방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었다.
그런 우학유는 은근히 이의방이 걱정되었다.
자칫 하다가는 더 많은 적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이의방도 모르는 사이에 적을 만들어도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았다.
“그나저나 노비, 죄수, 부족하면 승려도 써야겠구먼.”
“…예?”
이의방은 마치 결심이라도 하였는지 미소를 지었다.
“아, 그나저나 이곳에서 강동 6주 중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은가.”
“처음부터 설명해드리자면 1차 방어선은 6주이고, 2차 방어선은 서경입니다.”
“그 부분은 나도 알지.”
“그중에 의주,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이 6주가 우리의 첫 번째 방어선인데 적들이 공격해온다고 한다면 의주가 그 첫 접전지일 것입니다. 더불어 6주를 돌아보려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귀주를 먼저 가실 겁니까, 아니면 곽주를 먼저 들리실 겁니까.”
“나는 6주를 거쳐 장성을 따라 북계로 찍은 다음에 개경으로 들어갈 생각인데.”
“그럼 우선 곽주로 가셔서 창주를 거쳐 귀주로, 그다음으로는 연주를 들린 후, 동북 면으로 가시면 될 듯합니다.”
“그래… 동북면에 가서 동북면병마사를 만나 움직이면 되겠지. 정말 여기 북부에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구만. 군세도 있고… 든든해.”
“하하하. 별말씀을요. 저… 그런데 무슨 일이신데 북방을 살피시는지요. 거란족이나 여진족은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거란족이 공격한다고 하여도 의주 흥화진에서 끝이 나고는 합니다. 그리고 동북면은 산이 많아 여진이 침입한다고 하여도 거의 불가능입니다. 장성까지 생각한다면 충분히 안전한데 굳이 북방을 살피실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장수야. 장수가 북방 한번 둘러보는 게 잘못된 건가?”
“아,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흐음… 알겠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세.”
“예. 위위경.”
이의방은 먼저 자리를 옮겨 자신의 처소로 향하였다.
우학유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이의방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있다가 몸을 돌아섰다.
* * *
얼마 후, 처소로 돌아온 이의방은 생각에 골똘히 빠졌다.
대체 그 꿈속에서 봤던 그 군사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거란족도, 여진족도 아닌 난생 처음 보는 군사들이었다.
그렇다고 아랍의 군사들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 군사들이 여기까지 올 일도 만무했다.
전라도 경상도에 간혹 출몰한다는 왜구도 아니었다.
난폭해 보이고 잔인하며 말을 잘 타고 특히나 기마궁술 솜씨는 고려 못지않았다.
“후우…….”
감도 잡히지 않아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
자신이 꾼 꿈이 모두 사실이다.
조위총만 봐도 그러하지 않나.
특히나 내심 걱정되는 건 정균의 뒤통수 그리고 조원정이었다.
조원정 이놈들이 그렇게 쉽게 배신을 할지 몰랐다.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히지 않을 꿈이었다.
“이성계가 대체 누구야…….”
자꾸 잊힐 만하면 이성계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돌아가는 대로 족보라도 뒤져봐야지 이거야… 원…….”
이의방이 그대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찰나였다.
쿵!
밖에서부터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아구구구……X발.”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툭툭 옷을 터는 그림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한데 그 경비를 뚫고 왔다니.
두려운 생각이 확 들자, 이의방은 곧장 검을 뽑아 들고 창호지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푸숙!
“으어어어어!”
의문의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이의방은 그대로 문을 박살을 내고서는 소리쳤다.
“어느 놈이 감히 내 목을 노리는 것이냐!”
이의방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주저앉은 청년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의방은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는 검을 청년에게 겨누었고 곧이어서 군사들과 부장들이 들이닥쳤다.
“위위경을 호위하라!”
“호위하라!”
청년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듯 보였다.
‘뭐지…? 이 상황은 대체 뭐야……?’
수십여 명의 군사들이 자신을 에워싸고는 대뜸 창을 들이밀었다.
창도 날이 서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려는 듯 목 가까이에 댄 창날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청년은 부들부들 떨었다.
“물러서라.”
“위위경!”
“보아하니… 칼도 못 잡아 본 어린아이가 아니냐.”
“그래도 위험하옵니다. 저리 보여도 자객일 수도 있사옵니다!”
이영령이 소리치자, 이의방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령의 말도 옳은 소리이니 말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청혈단이라는 조직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이의방은 다시 경계를 하였다.
“누가 보내었느냐.”
“…예?”
“누가 나를 죽이라 시키더냐.”
“네? 저는 그런 적 없는데요… 저는 명성 고등학교 1학년 7반 유현수라고 합니다.”
또박또박 실수 없이 말하자, 알아들을 수 없던 탓에 이의방의 표정이 굳어갔다.
현재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유현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
‘차원이동.’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법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건가.
분명 자신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절벽 아래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했다.
“고려인이냐? 행색을 보아하니… 서역에서 온 거 같기도 하고…….”
행색이 이상하게 여긴 이의방이 청년에게 물었다.
‘고려……?’
“이놈! 위위경께서 여쭙고 계시지 않느냐!”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려라고…? 내가 지금 고려로 온 거야…? 사극 촬영이었으면 바로 스탑하겠지? 여기 진짜 고려야?’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유현수는 그대로 눈알이 뒤집힌 채로 쓰러졌다.
“…….”
“저… 위위경.”
“데려가서 의원에게 보이도록 해. 그리고 저 녀석이 매고 있는걸 가져와 봐라.”
“예!”
부장들은 속히 청년에게 다가가서 일으켜 세운 뒤에 떨어진 가방만 빼고는 청년을 데리고 갔다.
“위위경!”
우학유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괜찮으시옵니까?”
“아, 별일 아니야. 그저 작은 소동이 있었어.”
“아… 예. 다행입니다.”
우학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별일이 아니라는 이의방의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의방이 이곳에서 무슨 일을 당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 * *
얼마 후.
처소로 들어온 이의방과 우학유는 가방의 내용물을 살펴보고는 기겁하였다.
가방 안에는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진 책 몇 권이 들어있었다.
그중 한 책에는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 모를 듯한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그림체는 사람이 그린 것인지 신이 그린 것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그림은 약초들을 그린 것 같았는데, 그 그림체는 의원이 보고도 놀랄만한 약초들이었다.
“제가 평생 의원 노릇을 하며 이런 것은… 들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옵니다.”
의원의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아이가 일어나려면 얼마나 걸리겠나?”
“적어도 며칠은 걸릴 듯하옵니다. 아무래도 약초를 캐다가 떨어진 듯하니… 군데군데 타박상도 있어 보이옵고…….”
“이 사람아, 그 절벽에 어느 X친 놈이 올라간단 말인가.”
이의방의 처소 뒤편에는 절벽이 있었다.
그 위로는 어떤 산짐승도 못 올라가는 가파른 절벽이었다.
절벽 뒤로도 역시나 칼바위라고 불릴 만큼 날카로운 바위들이 많아서 사람도 쉽게 못 올라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 청년이 올라가서 약초를 캐었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사실은 그 방면에 진귀한 약초가 자란다고 소문이 나서… 가끔 올라가는 사람은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
우학유도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약초꾼들이 그 지리를 안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그 아이가… 자네가 말한 지역의 지리를 아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구먼.”
이의방의 말에 우학유는 할 말이 없었다.
“…….”
“허허허.”
“송구합니다. 위위경… 이참에 망루를 세워서라도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나저나… 이런 건 처음이야. 어떻게 이런…….”
이의방은 다시 한번 더 책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책에는 약초가 아니라, 사람의 형체가 그려져 있었고 곳곳에는 경락을 표기한 부분이 보였다.
의원은 정확하게 이게 의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아이가 의원이라… 이 소리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의원이라면 이런 책이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이 책은 제가 볼 때 입문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흐음…….”
이의방은 그 청년이 빨리 깨어나기를 내심 바랐다.
책들에 관해 물어볼 것도 많았다.
더군다나, 이 춘화도는 여인을 완전히 집어넣은 듯 보여서 이의방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이의방뿐만이 아니라 우학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흠흠!”
잡지를 가방 속에 깊숙이 집어 넣어버린 이의방이었다.
그것도 한 권도 아닌 무려 8권이나 가지고 있는 청년이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더욱더 알고 싶었다.
“아무튼… 자네가 조사한 후에 좀 알아보고 나에게로 보내게.”
“예…? 형님에게요?”
“우리도 못 읽어 내는 문자를 술술 읽어 내는 것을 보아하니, 학식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나. 거기에 이러한 중요한 의서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학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청년이 메고 있던 가방을 들고서 의원과 함께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의방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학자인가? 아니면 의원?’
가방에는 의서뿐만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책들도 여럿 눈에 들어왔다.
다재다능한 학자라고 봐야 할지.
정말 어떻게 파악이 되지 않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시끌벅적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이의방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도 군사들이 어제의 명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곽주로 향하려고 말이다.
“기침하셨사옵니까.”
“그래. 음… 어제 일은…….”
“아니옵니다. 어제 위위경의 말씀을 뼈에 새기겠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
박존위에 말에 이의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성을 계속해서 둘러볼 생각이니, 대군이 움직여도 따로 군량과 보급품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군량과 병장기들은 넉넉하게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와서 보급품을 축이나 내는 게 영락없는 유람 길이나 다름없었다.
“위위경!”
고득시가 찾아왔다.
아무래도 먼저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