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천하의 주인-3화 (3/159)

003화

얼마 후,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이의방은 마당에 놓인 제물과 곡식들을 살피어 보았다.

지난번, 사찰에서 쓸어 담아 온 것들과 곡식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이 중 가장 연장자인 노비에게 명을 내렸다.

“이보게. 금이.”

“예. 위위경…….”

“이 곡식으로 죽을 끓어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게.”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위위경의 명에 고개를 숙이는 금이라는 노비였다.

위위경의 밑에서 일하며 위위경의 이런 모습은 못 볼 것 같았는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박지영.”

“예! 위위경!”

이름을 부르자, 이의방의 사병 집단 대장이 다가왔다.

꿈에서 조위총의 칼에 죽었던 박지영이었다.

그런 박지영을 다시 보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가병들에게 일러 쌀을 대문 앞에 가져다 놓고, 차례대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해.”

“예! 위위경!”

박지영은 이의방의 명에 따르겠다며 답하였다.

그의 밑에서 오래 일했던 박지영이었지만, 이런 이의방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이나 부하들은 아주 잘 챙겼지만, 백성들은 대부분 상대하지도 않았다.

아니, 정권 초까지만 해도 민심을 살피려 하였던 이의방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모든 걸 다 포기해버린 것처럼 권력의 앞에 서서 중방을 쥐락펴락하였던 그가 다시 백성을 살피려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재물들은 모두 정리하여 금병과 은병으로 바꿔 놓거라. 군비에 충당할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하거라. 또한 내 형님께도 기별을 넣어 모셔오도록 해라. 내 긴히 할 이야기 있으니.”

“예! 위위경!”

박지영은 이게 대체 뭔 날벼락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위경 이의방이 시키는 대로 곧장 움직였다.

“움직여라!”

“예! 대장!”

사병들이 속속히 움직이고, 노비들도 모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최씨가 나왔다.

이의방의 본처이자, 태자비의 어머니인 그녀가 소란스러움 때문에 마당으로 나온 것이었다.

“위위경…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니, 보면 모르는가. 백성들에게 베풀려고 하는 것이지…….”

“예에!?”

최씨는 이의방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푼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의방을 바라보았다.

이의방은 그런 최씨의 눈초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팍 써버렸다.

“왜 그리 보십니까?”

“뭘 말인가?”

“아이고… 아, 아닙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아무튼 잘하셨습니다. 나도 요즘 들어 나가기 무서웠던 참이었습니다.”

마누라의 말 한마디에 이의방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로 들어선 이의방은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꿈을 꾼 이후로, 지금까지 행실을 되짚어 보았다.

못 할 짓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임씨의 일만 해도 그러했다.

대체 그날 뭐에 눈이 멀었던 것인지 태후의 동생이자, 정서의 아내였던 임씨를 협박해서 간통하였으니 말이다.

말이 간통이지 사실 반강제적이었다.

그 후로 임씨를 집안에 들여 같이 살게 되었고, 그 일로 미안한 나머지 임씨를 쉽게 찾아갈 수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신이 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이의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뿐이랴 의종의 애첩이었던 무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의 눈초리가 있다 보니, 무비는 다른 곳에 거처를 두고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자신이 최고의 권력자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리하여 아직도 함께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라더니… 그 한 번의 꿈으로 허무하게 끝내버린 인생을 보여 주니 참으로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 * *

“뭐, 뭐라고!”

정중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의방이 저택 앞에서 죽을 쑤고 쌀을 백성들에게 주고 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아니… 그 권력에 미친놈이 지금 자신의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님!”

“균아, 너도 들었느냐!?”

“예. 지금 막 듣고 오는 길이옵니다.”

균의 말에 정중부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다.

초심을 잃어버린 후,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앞에 방해물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다 때려 부수고 짓밟았던 이의방이 지금 쌀을 푼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인 정중부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이의방에게 가봐야겠다.”

정균은 몇몇 부장과 함께 아버지인 정중부의 뒤를 급히 쫓아갔다.

* * *

“하하하!”

이의방은 백성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이 죽을 받고 쌀을 받아 가는데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니, 이의방은 절로 신이 났다.

‘그래… 하늘이 내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보자…….’

이의방은 그리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다시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제발 다시 시작한 게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아이고! 고맙습니다요!”

백성들은 계속해서 이의방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위위경, 다녀왔사옵니다.”

“오, 그래. 수고하였다. 안에다 들여라.”

“예, 위위경.”

이의방의 명에 박지영은 곧장 수레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도성 안에서 밥 짓는 냄새가 진동을 하겠구먼! 하하하!”

이의방은 크게 웃으며 돌아섰다.

“위위경!”

정중부의 목소리가 들리자, 위위경이 몸을 돌렸다.

정중부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그 꿈, 꿈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참아야만 하였다.

정중부, 정균 이 둘을 죽여 봐야 지금 이득 볼 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위위경이 백성들에게 베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궁금하여 와보았네.”

정중부가 답하였다.

“아… 그러십니까. 하하하! 예. 그렇습니다. 상장군!”

미묘한 신경전이 두 사람을 타고 흘러갔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의방이 선뜩 차라도 한잔하겠냐며 묻자, 정중부는 정균을 한번 슬쩍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주시게나. 하하하.”

“하하하! 그러죠!”

이의방과 정중부는 서로 웃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 * *

“뭐라…? 위위경이 지금 무얼 하고 있어!?”

고려 19대 왕 명종이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대 왕 중, 가장 무능하고 가장 허수아비다웠던 명종이었다.

내관이 급히 와서 위위경의 일을 고하자, 깜짝 놀란 명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이의방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 하는 것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더욱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거라. 그리고 용호군 대장군 두경승을 속히 불러오라.”

“예. 폐하.”

내관은 곧장 허리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환관… 환관 밖에 있느냐.”

“예. 폐하.”

문이 열리면서 환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찾아계시옵니까…….”

환관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밖에 무슨 일이 있는지 나가서 살피어 보거라. 내관들보다 더 상세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 폐하.”

환관은 명종의 말의 뜻을 이해하고서는 뒤로 조심스레 물러나가자, 명종은 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체… 이의방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의방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명종이었다.

또 어떤 핑계를 내걸어 제물을 착복하려고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뿐인가.

시도 때도 없이 황실을 협박하던 그가 이번에는 쌀을 풀었으니, 자신에게 뭐라고 와서 할지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 * *

“위위경, 모든 쌀을 나누어 주었사옵니다.”

“그래. 잘하였다. 부족함은 없었겠지?”

“그러하옵니다. 개경의 모든 백성들이 쌀을 받고 죽을 받아 갔사옵니다!”

부장의 말에 이의방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함께 이야기하고 있던 정중부는 침을 꿀꺽 삼키었다.

대체 이의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떠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굶고 있으니, 당연히 있는 자가 베푸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크게 웃는 이의방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정중부였다.

“아니, 문하시중… 왜 그리 보십니까. 제 곳간이 넘쳐나니 백성에게 풀어버린 것이지요.”

“위위경… 그럼 사찰의 승려들은 왜 그리 죽이셨는가.”

“왜라니요! 나라에 반기를 든 승려들이 개경까지 쳐들어왔는데 살려두라는 말씀입니까! 더군다나 승려들이 군역을 집니까? 아니면 세금을 냅니까! 저 천한 무당들도 세금을 내는데 승려라고 세금을 내지 않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황실이 사정을 봐주니, 사리사욕을 채운 승려들입니다. 그들의 재산을 모아 백성들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지 제가 절대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뚫린 주둥이라고 입을 잘 놀리는구나.’

정중부는 속으로 욕을 한 채 이의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2천여 명의 승려를 죽여 버린 이의방의 말을 믿을 정중부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승려들을 다 죽인 후, 사찰의 제물을 가지고 자신의 집에 쌓아두었던 이의방이 아닌가.

그런 이의방의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중부는 겨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먼저 일어나 보겠네.”

정중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이의방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균이 자네도.”

“그래. 쉬게.”

“예. 위위경.”

정중부와 정균 둘은 밖으로 나갔다.

한 시경 정도 지난 후에 이의방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정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이의방의 큰형 이준의이었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리셨습니까.”

“크흐음!”

이준의은 몸을 살짝 돌리며 말하였다.

“왜 불렀는가.”

“형님, 형님의 말씀처럼 나도 좀 생각해보았습니다. 형님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형님의 말대로 다 풀었습니다. 다 백성들에게 돌렸어요. 애초에 백성들 것 아닙니까…….”

이의방의 말에 이준의의 표정이 살짝 풀린 듯 보였다.

승려 2천여 명을 때려죽인 이의방이 못마땅하여 아주 대놓고 싫은 소리 하였더니, 자신을 죽이겠다면서 칼을 뽑아 내려치려고 하였던 이의방이었다.

그리고 그걸 겨우 말리던 건 문극겸이었고.

그때 생각을 한다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이준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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