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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99화 (199/199)

199화 최종화 다시 천 년

199화 다시 천 년

오늘따라 고양성의 위엄은 더 거대했다. 고구려의 태왕이니 평소에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으나 지금 내가 느끼는 포스는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과정은 치열했고 결과는 아름답소. 내가 참으로 기분이 좋소이다.”

고양성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진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태왕이었기에 절제했으나 또 태왕이기에 기쁜 것이었다.

“폐하. 마음껏 즐거워하셔도 되옵니다.”

“아니외다. 마음껏 기뻐하는 건 더 미룰 것이오. 몇 해가 더 지나면 기주에 고구려의 제후국이 생길 것이니 미리 기뻐할 이유는 없소이다.”

감히 승패를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고구려가 승률이 높지만, 수나라가 언제 부활의 신호탄을 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천하의 기운이 고구려에 몰리면서 일궈낸 승리라고 봐야 하니 당연히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며 경계해야 했다.

그런데도 고양성이 은근한 목소리로 고구려의 승리를 미리 언급한 건 근거가 있었다.

수나라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여력을 가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나라를 중심으로 이뤄진 모래성 같은 평화는 세 개의 전선에서 활과 창칼을 겨누고 있었다. 언제라도 명령 한 번에 수만의 대군이 충돌할 수 있는 정세였다. 즉, 막대한 군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나라가 제대로 힘을 비축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수나라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건 아파가한이 전격적인 공세를 당장은 펼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파가한 역시 수나라 원정에 이어서 돌궐 내전까지 감행했으니 힘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급소로 칼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일 뿐 수나라가 웃으면서 잘 살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우리와 돌궐은 수시로 국경을 넘어 약탈할 것이며 수나라의 외곽을 끝없이 흔들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고양성의 말대로 기주로 진군할 때 돌궐과 함께 할 것이니 어찌 수나라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해봤는데 진나라는 빼는 게 좋겠소.”

“그러하옵니다. 대군을 운용할 때 만에 하나라도 진나라가 10만의 대군을 북상시키면 수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건 썩 좋은 일이 아니옵니다. 그들은 우리나 돌궐과는 달리 수나라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무리 없이 통치할 수 있는 세력이니 말이옵니다.”

“그렇소. 양광의 기주, 수나라, 진나라. 이렇게 삼분된 서토가 가장 아름답소.”

진나라 황제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통일 중국의 탄생이나 비슷한 수준의 나라가 탄생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북중국만 차지한 수나라를 견제하느라 모두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현실만 고려해도 통일 중국의 가능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단해야 했다.

“그나저나 약조를 지키지 않으셨소? 분명 대대로를 태왕이 임명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었는데.”

“끙.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하하하. 농이었소. 불가항력의 일이었으며, 가졌던 권한을 내어준 것도 아닌데 어찌 막리지가 죄를 청하오? 되었소.”

“하오나 차기 대대로는 꼭 폐하께서 임명하실 것이옵니다.”

“끌. 되었소. 괜히 무리할 필요는 없소. 때가 되면 가질 수 있지 않겠소?”

유례없는 국세의 팽창이 가져온 순기능 중 하나는 고양성이 굉장히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와는 달리 고구려를 둘러싼 세력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조급증이 생길 이유도 없었다.

고양성은 뒷짐을 쥐고 천천히 걸었다. 나 역시 속도를 맞추며 천천히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과거 막리지는 적이 1만의 병력으로 도발하며 10만으로 응수하는 게 국력의 척도라고 했소. 기억하시오?”

“물론이옵니다. 신이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음. 하지만 그간 우리 고구려는 그러지 못했소. 지금까지 이룬 성과가 실로 엄청난 것이지만 압도적인 국력으로 적을 제압한 건 아니었소.”

“폐하. 신이 미흡한 건 사실이지만 농업 개혁을 일궈내기 전과 비교할 수는 없사옵니다. 참으로 서운하옵니다.”

아니, 나도 할 말은 많았다. 고구려가 압도적인 물량을 동원할 수 없었던 건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군량도 넉넉하지 않았소.”

“폐하.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사옵니다. 전선에 선 우리 병사 중에서 보급선을 걱정한 이는 아무도 없사옵니다. 이런 걸 두고 괄목상대라고 하옵니다.”

“이런. 한 마디도 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려.”

“신은 그저 너무 억울할 뿐이옵니다.”

국력이라는 건 결국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작금의 고구려를 평가할 때 가장 객관적인 건 농업 개혁 이전의 고구려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총력전을 감행할 때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30만이라는 건 사실이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국운이 위태로울 때 전 국민 동원령을 발동하는 것이었다.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수만의 병력을 상시로 동원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신라만 할지라도 김백정이 친정했을 때 동원된 병력이 1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농업 개혁 이후 고구려는 수시로 5만 명 전후의 대군을 동서남북으로 진군시켰다. 이건 정말 엄청난 능력이었다.

요동을 둘러싼 기존 질서를 뒤바꾼 건 50만의 대군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라 5만여 명의 병력이 수시로 동원된 결과였다.

이렇게 계산해야 합당했고, 결과 우리는 수십만의 대군을 몇 년 사이에 꾸준하게 움직였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어야 정확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당할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힐끗 본 고양성은 피식 웃었다.

“끌. 알겠소. 왜 그렇게 발끈하시오? 내가 태왕인데 그 정도 말도 못 하오?”

“아니, 신이 언제 또 발끈했다고 하시옵니까. 너무 억울하옵니다.”

“하하하! 알겠소. 진정하시오.”

이거 이유는 모르겠는데 괜히 뻘쭘해서 입맛이나 다셨다. 그런데 고양성이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뭔가를 시키려고 할 때 저렇게 웃었던 과거가 떠올라서 상당히 불안해졌다.

“막리지. 이제 내가 태평성대라는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오.”

패권과 태평성대는 동의어가 아니었다. 작금의 고구려는 패권국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으나 만백성이 하하호호 웃는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사실 기본적으로 태평성대라고 부르자면 전쟁부터 없어야 하는데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피바람이 불었던 삼국시대에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살폈는데 이제 고구려의 영토를 제후국이 둘러싸게 되었소. 물론, 기주의 일은 아직 섣부를 수는 있으나 응당 그리될 것이 아니겠소? 이렇듯 제후국이 방패처럼 본토를 지키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백성이 전쟁의 참화를 두려워할 수 있겠소이까. 하여, 나는 확고한 내실을 다져보려고 하오.”

얼핏 들으면 이문진의 주장과 같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본질은 상당히 달랐다.

고양성의 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제후국이 고구려의 방패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막리지가 말했던 1만의 적을 10만의 병력으로 돌파하는 걸 내가 한번 해보리다.”

“폐하. 그러자면 더 많은 군비가 필요할 것이옵니다. 이리하자면 대대로와 농업부의 반발이 있을 것이옵니다.”

제후국이 방패가 된다는 건 그들에게 국방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 고구려의 군사력이 더 강해져서 그들이 국방을 맡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하면 내정 개혁을 일궈낼 역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압도적인 국력을 일궈내야 하는 것이었으니 고양성의 꿈은 참으로 어렵고 험난한 것이었다.

“막리지. 그들이 반대하겠지만 이미 우리 고구려는 누군가의 반대로 언변이 발생할 수 있게 되었소. 하여, 전혀 문제가 아니외다.”

말과 말이 넘치면 일사불란하지 않을 수도 있건만 고양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긴. 수틀리면 내전을 일으켰던 나라에서 말로 반대 의사를 펼친다는 건 너무나도 성숙한 일이긴 했다.

“더불어 그들의 반대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할 것이외다. 내가 태왕으로서 그들을 압도할 수 없다면 설득할 일이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시오. 막리지는 기어이 이를 일궈낼 농업 개혁을 단행하면 되오.”

“참으로 옳사옵니다. 하온데 신이 듣다 보니 무언가 이상한 부분이 있사옵니다.”

“허. 눈치챘소?”

“아니, 폐하. 너무 노골적이었사옵니다. 신더러 내정 개혁에 집중하고 외교와 군사의 일에는 손을 떼라는 것이 아니옵니까.”

아니, 일등 공신이 난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는데 고양성은 계속 웃기만 했다. 막상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내가 당황해버렸다.

“폐하. 왜 그러시옵니까.”

“아니,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는데 싫어하는 표정을 짓길래 웃겨서 그렇소.”

“음? 그렇사옵니까?”

“막리지는 원래 정치나 외교, 군사에 큰 관심이 없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어느 날 농업을 언급하며 전면에 나섰소. 이는 농업에 그만큼 각별한 애정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겠소?”

“아.”

“실제로 이번에 이문진에게도 농업 개혁을 직접 챙기겠다고 하지 않았소?”

“음. 그건 그렇사옵니다만.”

“그래서 내가 막리지를 배려하여 하고 싶은 농업 개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하오. 하하하! 나보다 신하를 생각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외다.”

“······.”

아니, 그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분명 농업에만 관심이 있었던 건 맞는데 막상 막리지 일에 몰입하다 보니 상당히 재밌었다.

어쩌면 내 적성은 농업이 아니라 일국을 관장하는 재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도 정말 많았다. 아니지. 요즘에는 계속 이렇게 생각했구나.

그런데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신하의 속내도 잃지 못하면서 저렇게 호통한 웃음을 보이는 고양성이야말로 생각이라는 걸 정말 이상하게 하는 군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니, 나도 이왕 막리지로 시작했으면 대대로를 한 번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랬다.

몰랐던 적성을 깨우치며 내 꿈은 바로 대대로가 된 것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양성을 슬쩍 쳐다봤다.

“폐하. 그것이 아니옵니다.”

“하하하. 사양하지 마시오.”

“음. 폐하. 그러지 마시옵소서.”

“고구려를 위하는 막리지의 마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아오. 그러나 내가 군주이니 신하의 바람을 또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니겠소?”

“······.”

“하하하! 하면, 퇴궐하여 고구려의 오곡을 황금물결로 바꿀 계획을 입안하시오.”

왕명이 내려졌으니 듣긴 들어야 할 건데 너무 아쉬워서 계속 쳐다만 봤다. 그러다가 말했다.

“음. 폐하. 신은 이대로가 좋사옵니다.”

“왜 그러시오?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소?”

나는 역사를 알고 있다. 아니, 이 세계가 흘러가려던 방향을 알고 있었다.

농업 개혁을 시작하며 미세하게 틀어졌고, 점차 고구려의 운명을 바꿨다. 내가 이를 완벽하게 확신했던 건 양광이 고구려의 인질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원 역사처럼 광기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랐다.

만일, 절반만 발휘해도 기주를 차지한 그가 수나라를 얼마나 괴롭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역사의 개변이었다.

이 모든 걸 내가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웃음기를 지우고 진심으로 말했다.

“폐하. 신은 훗날 반드시 대대로가 될 것이옵니다.”

“······.”

“하여, 이대로가 좋사옵니다. 부디 신의 쓰임을 마음대로 결정 좀 하지 마시옵소서.”

“허. 이런. 차기 대대로는 내가 결정하게 한다더니 속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어차피 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사옵니다. 설마 고식이나 연자유를 신의 앞자리로 생각하신 건 아니지 않사옵니까.”

“음.”

“폐하?”

“끌. 농이었소.”

고양성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이거 막리지가 속내를 말하니 나도 말해야겠소.”

“이르시옵소서.”

“앞으로 고구려는 농업이 정치이며, 외교이자, 전쟁이 될 것이오. 해서, 이 권한을 막리지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오. 사실상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을 손에 올리는 것인데 어찌 대대로에서 멀어지는 것이겠소?”

“······.”

“한데, 내게 서운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말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이런.

내가 본질을 보지 못하고 크게 실수했구나.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 신이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됐소.”

“이러지 마시옵소서.”

“하하하.”

고양성의 웃음이 크게 울렸다. 그러면서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 신이 잘하겠사옵니다.”

고양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소. 막리지가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그러니 이번에도 믿소. 고구려를 잘 부탁하오. 막리지.”

나도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하면, 함께 가지요.”

“따르겠사옵니다.”

고양성이 다시 물었다.

“우리의 종착역은 어디라고 생각하오?”

잠시 생각했다.

우리 역사의 한계선이 무엇일까.

고구려는 그 한계선을 넘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선을 넘고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를 알고 있는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새로운 천년사이옵니다.”

고양성이 화답했다.

“하하하! 참으로 좋소. 하면,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걸어가지요. 새로운 천년의 역사로.”

“신이 보필할 것이옵니다.”

“좋소. 참으로 든든하오.”

나는 다시 웃었다.

고구려의 새로운 천년을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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