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1)
189화 이문진이 쏘아 올린 큰 공(1)
고정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문진의 노선쯤이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고구려 막리지의 기개가 강렬하게 전해졌다. 막상 이런 반응을 보이자 말을 전한 내가 뻘쭘해졌다.
“이문진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는 농업부가 팽창 정책을 뒷받침하는 하부 조직이 될 수는 없다는 게 아니겠소?”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표현하시오? 어찌 이문진인 그런 의도를 감추고 있겠소이까.”
“누가 감췄다고 했소? 이문진은 대놓고 저리 말하는 것이외다. 설마 북방 진출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공이 이문진을 편들고 있는 것이오?”
지금껏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하던 고정의의 눈이 상당히 가늘어졌다. 찰나 가서일을 보는 줄 알았다.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소이까. 다만, 공이 너무 태연하여 놀란 것이었소.”
“대수롭지 않게 대응해야지요. 화들짝 놀라서 일을 키우며 이문진은 더 기세등등해질 것이니 말이외다.”
“음. 그 말은 공도 이번 사안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는 생각하는 것이구려.”
“아직 팽창 정책이 끝나지 않았는데 내부에서 전쟁 불가론이 나오는 것이외다. 기본적인 경계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고정의의 정확한 속내까지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이문진의 주장이 팽창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한데 마냥 무시할 수는 없소. 이문진이 제시한 문서의 내용이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외다.”
“쌀이 부족하여 1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없으면 5만을 출병시키면 될 일이오. 이걸 왜 고민해야 하오?”
“너무 명쾌해서 내가 할 말이 없어질 지경이외다. 참으로 당혹스럽구려.”
아니, 내가 원하는 논의나 답변은 절대로 이런 부류의 것들이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은 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었다.
난처함을 가득 담아서 쳐다봤는데, 고정의도 태연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왕 막리지. 우리가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은 돌궐의 분열에 언제 어떻게 개입할지가 아니겠소? 나는 내부의 소모적인 논쟁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설령 이문진이 소란을 일으켜도 상관없소. 당장 급한 건 북방인데 어찌 계속 토를 달겠소?”
우직하게 갈 길을 가자는 말이었다.
되돌아보면 연자유가 이번 사안을 공론화하자고 한 이유에는 상황에 대한 자신감도 있긴 했다. 이문진과 농업부가 온건주의 노선을 주장한들 결정권이 있는 게 아니었고, 현재 팽창 정책의 근간을 바로 흔들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게 당장 곳간을 숨기거나 이동시킬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문진이 할 수 있는 건 없긴 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정의를 쳐다봤다.
“좋소. 누가 뭐라고 해도 북방 정책은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외다.”
“바로 그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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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진은 당황하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정의가 직접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막리지로서 권위가 확실한 그의 평소 모습을 생각할 때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긴 했다.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소생을 부르셨으면 속히 달려갔을 겁니다.”
“아닐세. 자네의 업무가 과중하고 중요한데 내가 오면 될 일이네. 그래. 우리의 내실이 조금 부실하긴 하지?”
“아.”
이문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조심스레 문서를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고구려의 군량 사정을 수치화한 내용을 보여주는 그의 행동에 고정의는 코를 찡그렸다.
“대인.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는 무리입니다. 물론, 어떻게든 대외 팽창을 감행한다면 할 수는 있겠으나 그 뒤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음.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지요. 대군을 운용하더라도 속전속결론 전장을 주도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찌 이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문진은 쉬지 않고 문서를 올렸다. 천하의 고정의도 엄청난 물량 공세와 만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꺼냈다.
“해서, 자네는 북방 정책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모든 정책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작금의 고구려는 대외 팽창이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할 때입니다.”
“몇 년에 걸쳐서 이번 일을 준비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변수도 많았지요. 그때마다 엄청난 국고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문진의 말대로 북방 정책이 초안이 유지된 건 아니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변수로 인해서 방향이 바뀐 적이 많았다. 처라후를 지원했던 막대한 수량의 군량이 단적인 사례였다.
“대인. 과거의 고구려는 어떻게든 홀로 버티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수의 제후국이 있고, 북조 신라가 있습니다. 질서가 바뀌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국고가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세월 고구려를 후방을 교란했던 백제와 신라를 억제하는 정책이 펼쳐진 지 수년째였다. 제후국들이 잘해주고 있으나 어디까지 전제는 고구려의 국력이었다.
간단하게는 고구려의 지식인이 파견되었고, 수백 단위의 병력도 파병되었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해서 평양 도성에서는 남쪽으로 향할 수 있는 상비군이 늘 주둔하고 있었다.
“아무리 남쪽이 안정되었다고 할지라도 무방비로 둘 수는 없습니다.”
만일, 남쪽을 텅텅 비워두었을 때 고구려가 북방에서 대패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방비하는 병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남쪽의 제후국이 반기라도 든다면 왕도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새로운 질서의 안정을 위해서 왕도와 한수를 연결하는 도로도 새로 정비하고 있었다.
또한, 내정 개혁으로 관료제도 보급되고 있었다. 이 또한 비용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숨만 쉬고 있었다 막대한 비용이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지금껏 이 모든 걸 문서로 정리해온 이문진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대인께서 소생을 찾아온 이유가 소생에게 힘을 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 아닐세. 나는 북방 정책은 이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네. 그래서 현재 얼마나 더 감행할 수 있을지 정확하게 묻고 싶은 걸세.”
“대인.”
“답변이나 하게.”
결정권이 있는 고위 귀족 중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고정의가 찾아왔기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었으나 속절없이 무너졌다.
‘오랫동안 유화정책을 펼친 국내계의 수장이기에 왕 대인에게는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공개했거늘 결국은 같은 결론이로구나.’
이문진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내일 출병하면 5만의 병력이 반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5만 명이 반년이라.”
“대인. 5만 명이 반년을 싸울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국고가 고갈되고 채워 넣을 방법이 당장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를 고려해주십시오.”
“북방의 패권을 장악해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군.”
“대계의 일을 소생이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만에 하나 돌궐이 쉽사리 굴복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저항하거나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거병이 발생하면 고구려의 국고는 누더기가 될 겁니다.”
고정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문진의 발언 수위가 강했다. 그러나 문서로 입증하고 있는 그의 말을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국내계는 오랫동안 대외 팽창이 아니라 안정을 강조했네. 어찌 보면 자네가 지금 주장하는 노선과 아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 뭐. 다른 부분도 아주 크지만 말일세. 해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하겠네.”
“무엇입니까.”
“북방 진출 이후에는 철저하게 자네에게 힘을 보태겠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결국 원점이었다. 이문진은 한숨을 쉬었다.
“대인. 어차피 소생은 힘이 없습니다. 그저 문제를 제기할 뿐이었지요. 대인께서 하신 말씀은 왕 대인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제안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 다르다네. 아예 다른 내용일세.”
“어째서 다릅니까.”
“국내계가 자네들 지원하겠다는 말이니까. 즉, 자네의 노선을 우리 국내계가 제대로 품어보겠다는 말일세.”
같은 말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고정의가 하는 말은 단지 지지하겠다는 게 아니라 고구려를 지탱하는 귀족의 절반이 나서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달리 말하면 이문진을 국내계로 포섭하는 말이었다.
“대인께서는 벌써 북방 정책 이후의 정계를 고민하시는군요.”
“준비해야지. 한데, 기존의 국내계 노선은 너무 낡았네. 새로운 천하가 구축될 것인데 단지 외교만을 부르짖기에는 새 시대를 담을 수 없다는 말이네. 한데, 지금 자네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마음에 들어.”
“힘을 실어주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으시는군요.”
“함께 논의하고 나아가야지. 그게 아니면 나도 귀족들에게 할 말이 없네. 어떤가. 내 제안이 마음에 드는가?”
노골적인 제안이 이어졌다. 이문진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지만, 더 시간을 사용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답은 나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대인과 뜻을 함께하지요.”
“큭. 현명한 선택일세. 모처럼 우리 국내계에 인재가 들어왔군.”
“한데,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돌궐의 내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것만은 막아주십시오. 최소한의 비용으로 성과를 내야 합니다.”
“음. 왕 막리지가 그냥 동의하지는 않을 것 같네만.”
“이조차 해주실 수 없다면 소생이 국내계가 되는 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대인. 잊지 마십시오. 소생은 고구려 관료제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상당한 힘이 될 겁니다.”
아직은 관료제가 미약하긴 하다. 과거 시험 역시 기층을 책임지는 관리를 선출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정의는 관료제와 과거 시험이 고구려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바라본 지 오래였다.
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이문진을 포섭한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이긴 했다.
고민을 이어가던 고정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왕 막리지와 잘 상의해보겠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인.”
“하하하! 참으로 듬직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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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신뢰와 의리로 여기까지 함께 왔던 고정의가 헛소리하고 있었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북방 정책을 축소하자는 것이오?”
“축소가 아니라 전면적인 개입은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외다.”
“말이 바뀐 것 같소만.”
“말이 바뀐 게 아니라 상황이 바뀐 것이지요.”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이럴 때일수록 상황 파악은 정확하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고 막리지는 분명 이문진의 노선을 질타했소. 한데, 이렇게 생각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오?”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니 말하지요. 국내계에서 그의 노선을 품기로 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