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고수전쟁(3)
184화 고수전쟁(3)
마치 야차와 같이 칼을 휘두르며 고구려군을 도륙하던 달해장유는 전장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거칠게 칼을 휘두르며 적군의 심장부를 매의 눈으로 살폈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고구려군은 퇴각을 멈췄다. 그렇다면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는 걸 의미했다.
달해장유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적이 배수진을 펼쳤다! 최후의 발악이니 더 거세게 압박하라!”
어차피 승기는 확보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밀고 간다면 적장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적장은 이 상황을 고의로 만들었다는 걸.
조금 전부터 과할 정도로 자신을 향한 압박‘만’ 강해졌다는 걸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대번에 알았다. 자신을 사로잡아서 전투를 끝내려는 얄팍한 수였다. 달해장유는 몸을 비틀어 칼을 휘두르며 비릿하게 웃었다.
제발 적장이 헛된 꿈을 꾸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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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의 안색이 흐려졌다. 상황은 모두 완벽하게 구축했는데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허. 흡사 짐승을 보는 것 같군.”
달해장유의 용맹이 실로 대단했다. 적이었으나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였다. 부마 온달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대, 대인. 감탄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음.”
위기감이 가득한 부관의 외침에 고정의 역시 쉽사리 어떤 답변을 꺼낼 수가 없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달해장유의 용맹을 제압할 무장이 없었기에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곤란하게 됐군.”
“대인! 여유를 부리실 때가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보게. 방법을 떠올려 볼 것이니. 그동안 자네들은 자리를 지키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달해장유는 다가오고 있었다. 막아낼 수 없는 적장의 공세에 고구려군은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감각도 좋고, 군략도 비상하군. 아군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걸 아비규환의 전장에서도 깨닫다니.”
고정의는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다.
칼을 빼 들었다.
“최후의 한 명까지 적을 죽인다.”
옥쇄였다.
고정의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부관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대뜸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미안하게 됐네. 더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네. 그렇다면 싸워야지. 안 그런가?”
“휴.”
부관들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대인께서는 물러나 계십시오.”
“소장들이 앞장서겠습니다.”
일제히 고정의의 앞으로 나섰다.
“됐네. 나도 제법 잘 싸운다네.”
“소장이야말로 됐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래야만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지 않겠습니까.”
옥쇄를 각오한 부관들은 고정의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외쳤다.
“전군!”
“팔다리가 모두 잘릴 때까지 싸운다!”
그리고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죽음을 각오한 배수진이 거대한 위력을 보이며 펼쳐졌다.
피를 튀기는 전장의 치열함이 가속화되며 고정의가 이를 악물고 전군을 지휘할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렸다. 대경실색하여 고개를 돌렸는데 수만의 병력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정의는 쓰게 웃었다.
“가뜩이나 패색이 짙은 와중에 적의 원군까지······어?”
그의 눈이 커졌다.
다가오는 대군의 깃발이 너무나도 낯익었다.
바로 고구려 최고의 명장 고흘의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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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당도한 고흘은 혀를 차면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더불어 오만상을 찌푸리는 건 덤이었다.
“원. 나 없어도 된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고작 저 정도도 감당 못 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군.”
“하하하! 모든 사람이 장군처럼 절륜한 지휘력을 가진 건 아닙니다.”
고승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보태자 고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 아닌가. 그런데 왜 매번 나를 배제한다는 말인가. 내가 제일 잘 싸우면 나를 보내야지. 이게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음. 소장이 듣고 보니 장군의 말씀이 너무나도 지당합니다.”
수만의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이었으나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특히 고승의 얼굴에는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이는 고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만큼 고구려군에 있어서 고흘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두려운 건 없었다.
“흥! 그래도 왕도에서 늦게나마 정확하게 판단을 한 것일세. 만약 전선의 상황을 낙관하고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라고 하여 어찌 이 자리에 있겠나. 오지도 않는 돌궐이나 쳐다보면서 세월을 보냈겠지.”
“하하하. 소장도 장군 덕분에 만리장성 이남을 밟아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쁩니다.”
원래 고흘은 돌궐을 억제하기 위해서 요동에 주둔했다. 그러나 고양성이 원군과 함께 총력을 다하여 수나라를 압박하라는 왕명을 내렸기에 기분 좋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장군. 아군과 교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바쁘지 않나? 더 속도를 내서 돌격하게. 하면, 적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니까.”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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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갑작스레 당도한 고구려의 원군으로 인하여 패퇴를 거듭한 것이다.
“대인. 고구려군의 피해도 큽니다. 섣부른 행동은 할 수 없을 겁니다.”
“답답하군. 내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것 같나?”
이렇게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수들을 보니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물러나더라도 패잔병으로 어찌 돌궐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기가 땅에 떨어졌는데 말일세.”
“······.”
실체적인 능력과는 무관하게 천하에서 가장 강한 병력을 말하라고 한다면 열에 여덟은 돌궐을 지목한다. 이런 현실에서 고구려군에게 패배한 수나라군을 이끌고 돌궐과 싸우러 간다고 한다면 제대로 싸울 리가 만무했다.
여기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고경이었기에 속이 새카맣게 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손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시일을 지체할 수는 없소. 선택해야 하오. 다시 고구려와 결전을 치르거나 회군하여 돌궐을 방비하거나.”
고경의 말에 장손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엇을 선택할지라도 개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논의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야지요.”
“고구려와 싸워야 한다면 북평 점령이 가능한지 살펴야 하지 않겠소?”
“어찌 장수가 가능성을 따지는 것이오? 싸워서 이겨야 하는 상황이오.”
“지금 북평을 공격한다면 회군은 불가하오.”
“황명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오. 내가 틀렸소?”
장손람은 황명을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고경 역시 황명의 지엄함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다소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기에 안색이 흐려졌다.
“한 차례 공격을 감행했으나 대승은 어려웠소. 그렇다면 방비할 병력을 두고 회군하는 게 옳소. 내가 이해한 황명은 이랬소.”
“허. 폐하께서는 분명 고구려를 도모하라고 하셨소이다. 한데, 회군을 품은 공을 내가 어찌 생각해야 하오?”
황명을 앞세운 장손람의 압박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장이라고 할지라도 황명이 가지는 권위는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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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고정의는 터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참으로 다행입니다. 어찌 이토록 적절한 순간에 당도하실 수가 있습니까.”
고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끄럽네. 자네는 막리지씩이나 되었으면서 이런 매복이나 당하나? 어처구니가 없군.”
“막리지나 되었으니 이 정도로 버틴 겁니다.”
“시끄럽네. 하. 을지문덕은 그럴 수 있지. 하면, 자네가 옆에서 잘 살펴야 하지 않나?”
“이런. 소인의 능력이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고정의가 넉살 좋게 답변할 때 을지문덕이 황급히 나섰다.
“장군. 오해가 있으십니다. 막리지께서는 언질 줬으나 소장이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됐네.”
“정말입니다.”
“말만 하면 뭐 하나? 막리지 정도 되었으면 누가 듣지 않아도 밀고 가야지. 한데, 몇 마디 던졌다고 하여 역할을 다했노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막리지라는 자리가 가볍지는 않네. 내 말을 이해했는가.”
고흘의 말에 을지문덕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고, 자신이 무례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송구합니다. 장군.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됐네. 원래 그 나이에는 생각이 짧은 걸세.”
“허. 장군. 어찌 또 젊은 무장에게 면박을 주십니까.”
“시끄럽네. 자네는 될 수 있으면 말을 꺼내지 말게.”
고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싱글벙글 웃는 고정의에게 쏘아붙였다. 물론, 고정의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한숨을 쉬던 고흘은 그냥 을지문덕만 쳐다봤다.
“한데, 부마께서는 어찌 보이지 않으시나?”
“몸져누웠습니다.”
“음. 하긴 전장을 보니 참으로 치열하긴 했지.”
“그렇습니다. 한데, 장군. 아직 적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건 아닙니다. 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자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닐세. 한데, 전투에 임할 때 매사 신중하게만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럴 때는 적이 어찌할지를 살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지를 결정해야 하네.”
“거. 왜 젊은 무장에게 면박을 줍니까.”
“고 막리지. 될 수 있으면 가만히 있게. 내가 자네를 적진에 던져버리기 전에.”
“하하하. 조용히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짧은 순간 을지문덕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적이 갑자기 왜 공세를 펼쳤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여의찮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군이 승기를 잡았으니 능히 해볼만 하다.’
만일 수나라군에 궤멸적 타격만 입힐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생각을 끝낸 을지문덕은 자신감 있게 나섰다.
“공격해야 합니다.”
“그래? 하면, 그리하지.”
“예? 아니, 소장은 그저 의견을 드린 겁니다. 장군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나도 자네의 의견을 물어본 것일세. 그런데 자신감을 보이기에 그렇게 해보자고 말한 걸세.”
“······장군께서는 퇴각을 고려하고 계셨습니까?”
“아군이 물러나면 적도 물러날 것으로 생각한 것일세. 한데, 자네는 싸우고자 하니 내가 힘써 거들고자 하는 걸세.”
“장군.”
“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 물러섬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 게 아닐세. 싸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고흘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새기게. 가장 높은 곳에 선 장수는 수하의 의견과 반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하네. 그래야 세상이 넓어지는 법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