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고수전쟁(2)
183화 고수전쟁(2)
늘 여유롭던 을지문덕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이미 철수를 진행했던 수나라군은 우회하여 고구려군의 앞을 차단하고 포위에 나섰다.
결과, 분군하여 움직이던 고구려군은 각개격파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자, 장군.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큰 피해를 보게 될 겁니다.”
부관들의 다급한 외침에서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 수 있었다. 을지문덕 역시 사방에서 몰려오는 수나라군의 기세에 아연실색할 정도였으니 전군의 사기는 살펴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전열을 정비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하게.”
“장군.”
“잘 듣게. 지금 퇴각하면 오히려 피해가 더 클 것이네.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 될 것이라는 말일세.”
만일, 퇴각할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군의 행동을 고려할 때 앞서간 온달과 고정의도 기습에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무리하여 퇴각한들 더 큰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네. 지금은 퇴각할 방법이 없네. 배수진으로 싸워야 한다는 걸세.”
당장 포위하며 다가오는 수나라군은 고구려군보다 몇 배는 되는 규모였다는 건 이미 상황이 최악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기도 했다.
을지문덕은 안색이 어두워진 부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역시 두려운 건 사실일세. 그러나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마지막까지 칼을 휘둘러야지. 그게 우리 고구려군이 아니겠는가?”
“휴.”
부관들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어쩌겠습니까. 싸워야지요.”
“이길 수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유리한 싸움만 했습니까. 이번에도 기어이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부관들의 결의를 들은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일 뿐 미소를 짓지 않았다. 어쩌면 최후가 될지도 모를 정도로 상황은 암울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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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포위하여 기습했는데도 고구려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특히 선두에서 악귀처럼 창칼을 휘두르는 온달은 보기만 해도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의 창칼에 쓰러진 병력이 몇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휘관인 온달이 홀로 용맹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심히 살펴보면 사정은 아예 달랐다.
휘둘러지는 온달의 창칼이 곧 고구려군의 움직임이 되었기에 난전의 와중에도 일사불란하게 전열을 유지하며 버텼다.
“장군. 생각보다 피해가 큽니다.”
부관들의 우려가 이어질 정도로 고구려군의 저항은 거셌다. 사만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목숨을 건 배수진이라. 처절하군. 하지만, 절대로 길을 열어줄 수 없네. 여기서 적을 끝내지 못하면 전쟁은 길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일세. 피해가 커지더라도 적을 완벽하게 제압해야 할 것이네. 알겠는가.”
“그리하겠습니다.”
부관들은 미세하게나마 동요했으나 사만세의 단호한 명령에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어렵사리 동의할 뿐이었다.
사만세는 그들의 심리를 읽은 듯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온달이 두려워서 나서지 않는 게 아닐세. 그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네. 자네들 내가 누군지 잊었는가?”
사만세는 수나라군에서도 뛰어난 용맹으로 유명했다. 그 역시 온달처럼 선봉에서 적을 도륙한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뒤늦게 이를 상기한 부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만세가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나서는 건 적이 원하는 흐름을 만들어주는 걸세.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네. 필부의 용맹보다 무모한 건 없으니 말일세.”
사만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용맹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확실한 승리였다. 그래서 무리하여 나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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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해장유는 광인처럼 칼을 휘둘렀다. 그의 핏발선 눈에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고구려군이 셀 수도 없이 보였다. 달해장유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나아갈 때마다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전장의 상황은 유리하긴 했으나 그는 절대로 기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화만 치밀어 올랐다.
완벽한 기습이라고 생각했으나 고정의의 대처가 너무 빨랐다. 본격적으로 공격이 감행되기도 전에 전열을 정비하여 퇴각로를 확보한 것이었다. 지금 앞으로 가로막고 있는 고구려군 역시 허둥지둥하며 도주하는 상황이 아니라 완벽하게 진영을 구축하여 방비하는 정예군의 모습 그 자체였다.
즉, 애써 수립한 이번 작전의 묘미가 모조리 상실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이 와중에도 고구려군은 북평을 향해서 길을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전장이 이렇게 진행되면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무탈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다. 이리되면 작전은 사실상 실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공격의 강도를 더 올리도록 하라! 절대로 퇴각하게 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야차와도 같은 용맹을 과시하며 저돌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수나라군은 그의 움직임에 기세를 올리며 고구려군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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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상황은 유리했다. 큰 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친 건 아니었으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경은 목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고구려군이 궁지에 몰렸소. 이제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할 때가 됐소.”
“을지문덕부터 제압하는 게 옳지 않겠소이까.”
“물론이오. 그렇게 북상해야지요. 그 직후 단번에 북평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러나 방심하지 마시오. 그는 뛰어난 장수요.”
“물론이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소. 치밀한 작전을 사용할 수 없는 포위된 상황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소.”
아니었다.
고경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수정했다.
“전략과 전술도 아군이 적을 압도하고 있으니 모든 상황은 유리한 게 아니겠소?”
“참으로 바른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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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니, 온몸에서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관들에게는 배수진의 기세로 싸울 것을 명했으나 그는 전장의 흐름을 살피며 어떻게든 퇴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작은 틈만 보이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다.
“자, 장군. 적의 원군입니다.”
부관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엄청난 수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포위한 병력을 감당하는 것도 버거운데 더 많은 적군의 등장은 사기를 완벽하게 꺾어버렸다.
“적이 이를 노렸구나.”
힘겹게 절망을 버텨낼지라도 새로운 절망이 더해진다면 사기는 완벽하게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적장은 이런 심리를 완벽하게 계산하여 작전을 수립한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
다시 외쳤다.
“퇴로는 없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의 최후가 될 것이니라!”
지금껏 무슨 상황에서도 틈을 파악하여 전투의 승리를 일궜던 을지문덕의 입에서 사실상 옥쇄(玉碎)가 선언됐다.
부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당혹감이나 두려움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죽겠습니다.”
일제히 죽음을 각오했다.
당장이라도 돌격을 감행할 기세였다.
“그러나 절대로 전열을 무너뜨리지 말라! 단 한 명이라도 더 제압해야 할 것이니라.”
을지문덕은 단호하게 말했다.
“돌격하지 않고 버티며 적을 죽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적을 가장 괴롭힐 방법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을지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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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향은 지천을 지배했다. 평생 전장을 누벼도 쉽사리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혈향이었다.
그래서일까?
늘 매섭게 적을 압도했던 개마는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만일, 개마를 통제하는 사람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미 상황의 통제권을 넘겨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훈련을 거친 무인들은 혈향이 지배하는 전장에서조차 개마를 통제하며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흥분한 개마도 통제 범위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무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앞으로 가로막는 적을 앞발로 짓밟았다.
오늘
-부아아아앙!
-부아아아앙!
-부아아아앙!
고구려 개마의 배수진이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온달은 팔이 저려온다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적의 심장을 관통할 때마다 어깨가 받는 충격의 강도는 커졌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창을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그가 멈추지 않은 게 아니라 개마가 우직하게 앞을 향한 것이다. 창을 고쳐잡은 온달의 어깨는 지쳐가고 있었으나 그의 발을 자처한 개마는 아직도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온달은 멈출 수 없었다. 전장의 마지막은 자기 어깨가 찢어질 때가 아니라 개마가 멈추는 순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무장은 개마가 달리는 이상 창을 멈출 수 없었다.
이는
-부아아아앙!
-부아아아앙!
-부아아아앙!
모든 고구려군의 각오였다.
그래서 온달은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오직 용맹을 앞세우며 싸울 수 있었다.
구태여 여러 말로 전장을 지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병력은 개마가 허락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싸울 것이니 말이다.
설령 개마가 멈출지라도 고구려의 무장은 끝이 아니었다. 개마의 죽음을 기리며 제단에 올릴 제물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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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는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조차 움직임이 없었다. 오직 그의 싸늘한 눈동자만이 전장의 흐름을 빠짐없이 살피고자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다.
“대인.”
“자리를 지키게. 모든 명령은 내가 적절할 때 내릴 것이니 말일세.”
적장 달해장유의 용맹에 큰 피해가 있었기에 부관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으나 고정의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적의 규모가 아군의 몇 배는 됩니다. 여기에 적장까지 선봉에서 용맹을 보이니 더는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그러니 여기서 퇴각하는 게 옳지. 한데, 퇴각할 수 없네.”
“무슨 말씀입니까.”
“애초 퇴각로는 없기 때문일세.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나?”
고정의의 물음에 부관들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중 한 명이 나섰다.
“그러니 옥쇄를 각오하고 싸우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확보할 수 없는 퇴로로 인해서 피해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해장유도 그걸 알겠는가? 아마도 모를 것이네. 그래서 아군의 퇴각을 막고자 저렇게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것일세.”
고정의의 발 빠른 대처로 고구려군은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정의는 퇴각을 명하지 않았다. 퇴로였으나 퇴각을 시작하는 순간 적에게 도륙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포위된 상황이었기에 아무리 퇴로가 있다고 한들 퇴각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저 여기까지 상황을 도출해낸 고정의의 능력이 대단할 뿐이었다.
“하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어쩌기는 이겨야지. 조만간 달해장유가 더 깊게 들어올 때 일제히 등을 돌려 반격하게. 그러면 되는 걸세.”
“승산이 있겠습니까?”
“없어도 해야지.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