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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80화 (180/199)

180화 새로운 국면(1)

180화 새로운 국면(1)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척에 적의 대군이 있기에 손짓 한 번이면 순식간에 수만의 대군이 얽혀서 전투가 발생할 것이었다.

하지만, 온달은 긴장감보다는 불편했다. 옆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냥 자네가 군권 가져가게.”

“허. 어찌 또 이러십니까.”

천연덕스러운 을지문덕의 반문에 온달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쫓아와서 교전 불가를 외치니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나.”

“대형께서 이러실까 봐 온 겁니다. 사전에 적과의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고 압박만 하기로 논의했습니다. 한데, 적이 보이니 돌격을 꾀하시니 어찌 방심할 수 있겠습니까.”

“끙. 적도 아닌데 방심하면 뭐 어떤가. 아니, 이렇게 빡빡하게 행동하면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있겠는가.”

온달이 투덜거리면서 고개까지 저었다. 여러 부관도 먼 산을 쳐다보면서도 다 듣고 있었기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호전적인 집단에서 홀로 신중론을 주장하는 을지문덕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군의 전력을 강화하고 대형께서 선두에서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이 느끼는 압박을 클 겁니다.”

“아니, 내가 아무리 봐도 고경도 한 차례 정도는 혈전을 각오한 것 같았네. 자네만 아니었다면 벌써 승패는 갈렸을 것이야.”

“각오했다고 섣불리 공격하겠습니까. 틈이 보여야만 공격하겠지요. 적은 승리보다 전력을 잘 보존하여 회군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길 겁니다. 그래야만 돌궐과 격전을 치를 것이니 말입니다.”

“내가 그래서 하는 말일세. 우리가 여기서 힘을 빼줘야 돌궐이 이롭지 않은가.”

사방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먼 산을 쳐다보던 눈동자들도 어느새 을지문덕과 온달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을지문덕을 향한 보이지 않는 요구와 압박이었다.

참으로 괴이하고 거대한 압박이었으나 을지문덕은 요지부동이었다.

“대형께서 굳이 돌격하시겠다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소제는 반대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거참. 자네가 반대하는데 내가 어찌 돌격하나?”

투덜거렸으나 을지문덕의 동의 없이 공세를 펼칠 생각은 없었다. 그리할 생각이 작게라도 있었다면 을지문덕은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한데, 내가 한 가지 의문이 있네.”

“또 무엇이 대형을 괴롭히는 겁니까.”

“적의 발목을 잡는 건 좋지. 한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아군의 압박으로 고경은 퇴각하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하고 있네. 돌궐과의 연계를 고려하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뭔가 소모적인 것 같다고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네.”

상당히 중요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답변은 간단했다.

“불필요한 교전은 피해야겠으나 적을 궤멸시킬 기회가 있다면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틈을 봐야지요.”

“적은 어떻게든 퇴각을 꾀할 것이네. 하면, 이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수를 쓰긴 하겠군.”

“그렇습니다. 그때 역습하면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다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좋군.”

그런데 생각 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수나라군에서 사신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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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람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렸다. 애써 참고 있었으나 심리적인 동요는 무척이나 컸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고는 생각했으나 이토록 빨리 이런 곳에서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대인.”

을지문덕이 밝게 웃으면서 말하는 꼴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장손람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여기서 도발에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마가 대군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퇴각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

온달의 등장은 협상을 준비하던 수나라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고로 외교 협상은 상대국의 거물이 무엇을 어찌했느냐에 따라서 주고받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나라군의 내부에서도 최소한의 교전이라도 일으켜 온달에게 피해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온달이 패배한 고구려는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천하의 정세는 그렇게 지엽적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빠르게 퇴각하는 게 목표였다.

아니,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가 원하는 건 명확하게 고구려와의 휴전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자네를 보니 반갑군. 아니, 아는 얼굴이니 대화가 더 잘 통할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나?”

장손람으로서는 을지문덕에게 더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함께 온 사만세를 의식했기에 불필요한 내용은 걷어냈다. 게다가 수나라의 명운이 걸린 협상 자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소인 역시 대인께서 오셔서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순탄한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한데, 자네의 말을 쉽사리 믿기도 어렵다네. 정확하게는 자네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걸세.”

“부마께서 소인에게 전권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장손람 역시 아쉬움은 짧았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양국의 휴전을 제안하는 바일세.”

“이런. 휴전은 좋은 것이지요. 음. 수 싸움을 할 여유도 없으실 테니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이대로 휴전하는 건 본국으로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귀국은 현재 돌궐의 공격으로 상당히 난처하니 말입니다.”

“북평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겠네. 더는 탈환하고자 대군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걸세.”

“이런. 그걸 어찌 믿습니까. 어차피 돌궐로 인해서 잠시 휴전하는 게 아닙니까? 상황이 정리되면 언제라도 다시 대군을 일으킬 것이니 말입니다.”

을지문덕은 장손람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았다. 이미 북평은 고구려의 영토라거나 100만 대군이 와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하나씩 언급하지 않아도 궁지에 몰린 건 상대였기에 가볍게 대꾸하며 대화를 이어가도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휴전하면 수나라만 이로운 상황입니다. 대인. 본국이 혹할만한 제안을 해주셔야지요. 우리 부마께서도 친히 나서시어 돌격을 준비했는데 말머리를 돌리자면 그에 합당하는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이나 부마에게도 명분이라는 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장손람은 쓰게 웃었다.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 정도의 발언이라면 협상 자체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을지문덕의 말투가 공손하고, 내용에서 심기를 건드릴 내용이 없을 뿐 강력한 압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말이 길어지는 법일세. 자네가 제시하게.”

“오늘은 협상을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시지요.”

“허. 이보게.”

“소인의 요구는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겁니다.”

을지문덕의 여유로운 미소를 본 장손람은 아찔했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시일을 최대한 끌고자 하는 것이구나.’

시간이 급한 건 수나라였다. 하루라도 빨리 회군하여 황도를 방비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협상의 주도권도 말 몇 마디를 통해서 이미 고구려가 움켜쥐게 되었다. 장손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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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은 눈을 껌벅이면서 을지문덕을 쳐다봤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이 휴전을 제시했네. 우리 역시 전쟁을 길게 지속하는 건 어려움이 있는데 어째서 거절한 것인가?”

틈만 나면 돌격을 주장하는 온달이었으나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서일이 쉬지 않고 외쳤던 것처럼 현재 고구려는 북평의 안정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이러한데 장기전은 절대 옳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 돌격을 통하여 조기에 전투를 마무리하려는 것 역시 통치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간 내가 들은 게 있네. 어차피 우리는 북평 이남을 통치할 여력이 없다는 말이었네.”

“대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니, 이보게. 내가 다른 건 모르지만 이건 알고 있네. 시일을 끌었는데 장손람이 제시한 내용에서 한 치의 변동이 없으면 우리 꼴만 우습게 되는 걸세. 얕보이게 된다는 것이네.”

장손람으로서는 을지문덕이 협상을 미룬 이유가 조건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종 합의는 초안과 같다면 협상을 주도하는 외교력과 이를 압박하는 국력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온달의 우려는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대형의 판단이 정확합니다. 그래서 소제는 협상을 미루기만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현재 우리가 여기서 더 가할 수 있는 압력은 없습니다. 변화는 돌궐의 공세로 이뤄질 뿐이지요. 그러나 장손람이 계속해서 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겠습니까?”

“음. 혹시 따로 생각하는 게 있나? 다시 말하지만, 영토를 더 확보하는 건 어려운 일이네. 본국의 역량을 떠나서 권한의 문제이기도 하니 말일세.”

북평 이남을 점령하는 건 왕명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고구려의 방침은 무분별한 점령지 확대를 경계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령 본국도 세폐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폐? 당장 왕 대인이 반대하지 않겠나?”

“하나의 예시로 들었을 뿐입니다. 소제 역시 마땅한 내용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장손람이 찾아야 할 부분이지요.”

“하면, 아군은 어찌하는 게 좋겠나?”

“평소대로 대형께서 본국의 위력을 과시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자네 볼수록 고약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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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람은 입술을 깨물었다. 을지문덕의 의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하였으나 더 내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만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상당히 협상에 능해 보였습니다.”

을지문덕을 향한 사만세의 인물평을 들은 장손람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 나와 이연을 조롱했겠지.’

수치스러운 기억이 떠오르자 안색은 대번에 굳어졌다. 물론, 절대로 그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는 우매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하. 그렇다고 해서 북평 이남의 땅을 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일세. 대체 무엇을 더 바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제대로 협상하고자 한다면 땅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결국 세폐가 아니겠습니까.”

“하.”

세폐를 주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국력을 너무 갉아먹는 행위였다. 오랜 세월 돌궐이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나라가 세폐를 바치면서 국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폐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돌궐의 대카간에게 세폐를 제때 보내지 않았던 일을 고구려도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러니 이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야.”

이미 수나라의 신뢰는 한 차례 무너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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