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세계대전(9)
179화 세계대전(9)
어지러웠다. 퍼즐을 맞추다가 집어 던지고 다시 맞추는 것도 현재 정세보다 어지럽고 복잡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오거나 변수가 생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개판이었다.
“이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대인께서 모르시는데 소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이 밝은가.”
내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문진의 표정은 정말 맑고 밝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태평성대가 열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습니다. 본국이 황금물결로 뒤덮이고 있는데 어찌 웃지 않겠습니까.”
“허. 이 사람아.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인데 구태여 기뻐하기까지 했단 말인가? 참으로 답답하군.”
“하하하. 소생은 대인만큼의 혜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쁠 수밖에 없지요.”
“이런.”
티격태격 말하긴 했는데 정말로 대풍년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고구려의 수확량을 늘어나고 있었으니 정말 춤추며 웃을 일이었다.
만리장성 이남에서 진행 중인 전쟁을 잠시 잊어도 될 정도로 기쁜 일이라는 건 절대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제후국과 북조 신라의 성과도 상당합니다.”
“이런. 고구려의 천하가 풍년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너무나도 아름답군.”
이문진이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신농법은 광범위하게 보급됐다. 고구려의 제후국들이 농업에 성과를 낸다는 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빌려올 수 있는 창고가 생긴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이 강성해지기에 경계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다. 이렇게 매사 째려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멸족시켜야 한다. 아니면 우리가 알뜰하게 먹여 살려야 하는데 세력을 흡수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남에게 밥 먹여주는 것이기에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자선 사업할 국력도 없었다. 우리가 할 일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좋은 소식이었기에 홀린 듯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정신 제대로 잡고 본론을 찾았다.
“일이 다 잘 풀리고 있네. 한데, 우리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니 경계해야 하지 않겠나?”
“천하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일입니다. 어찌 우리의 뜻대로만 흘러가겠습니까.”
깜짝 놀랐다. 지금껏 말도 없이 상추쌈을 먹던 연자유가 등판한 것이다. 옆에 있던 사람이었으니 언제라도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아직 상추가 많이 남았는데 말해서 놀란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벌써 식사를 끝내셨는가?”
“배부릅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군.”
“됐습니다.”
심지어 들고 있던 상추를 내려놓으면서 입가를 닦았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연자유였기에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괴이했다.
“돌궐이 이상하게 분열되고 있지요. 이는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 겁니다.”
“아니, 알면서 왜 이리 태평한가?”
“일단 분열은 이뤄냈으니 목적은 달성하고 있다고 봐야지요. 한데, 왜 걱정해야 합니까?”
“변수가 생길까 봐 그런다네.”
“음.”
연자유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대뜸 피식 웃었다. 웃음의 의미가 참으로 기분 나쁠 것 같아서 듣고 싶지 않았다. 물론, 눈치를 챘는지 연자유가 굳이 설명했다.
“오늘따라 형님과 나의 처지가 바뀌었군요. 늘 내가 우려를 표명했고, 형님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보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니, 그래서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건가?”
“말을 또 왜 그렇게 듣습니까. 됐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결국, 미쳐 날뛰고 있는 대계를 통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끙.”
오늘따라 연자유의 전투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하게 이쯤에서 백기를 들기로 했다.
“자네의 방법이나 말해보게. 명쾌하다면 곧장 도입해야 할 일이니 말일세.”
“이 사안을 다시 통제하려고 한다면 탈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난 것으로 파악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말입니다. 작금의 정세가 어지러운 본질적인 원인은 결국 본국이 천하의 정세를 확고하게 통제할 역량이 없다는 걸 입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연자유의 말은 따갑고 냉정했으나 또 옳은 말이긴 했다. 상황과 상황이 만나면서 잘 굴러가고 있긴 했으나 고구려는 역량의 부족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돌궐의 아사나 섭도, 대라편 그리고 처라후까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그 증거였다.
정말 천운으로 일이 잘 풀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면, 새로운 방침으로 세우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떤 것인가.”
“전선의 고착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군. 혹시 더 친절해질 생각은 없나?”
재촉하자 연자유는 대뜸 상추를 하나 입에 물더니 아작아작 씹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무슨 의미인가?”
“수나라와 휴전을 진행하는 겁니다.”
“뭐······?”
“북평의 소유권을 저들이 인정하는 수준으로 협상을 체결하면 적합할 것입니다.”
“이보게.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수나라의 숨통을 풀어주자는 말일세. 굳이 우리가 그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형님께서는 대카간이 요동으로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무조건 확신합니까?”
“음. 그가 미쳐서 공격해올 수는 있지.”
“바로 그겁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는 정세에서 더 무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고구려의 팽창이지 수나라의 압살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영 내키지 않았다. 이참에 수나라의 고혈을 제대로 짜고 싶기 때문이었다.
“한데, 수나라를 어찌 믿나? 위기에서 벗어나면 언제라도 본국을 압박할 것인데?”
“그걸 확립해야지요. 우리의 대계는 여기서부터 다시 수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라도 위기는 도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하늘이 고구려의 편에 서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북평에 우리 깃발을 꽂고, 숨 돌린 뒤 조금씩 북방으로 나아가자는 의미였다. 수나라의 압박을 대비할 계책도 확실하게 수립해야 하는 것이니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수나라와 휴전을 도모할 수 있겠나?”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아니지. 반응이 없을 수도 있네. 하면, 이 부분부터 우리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도록 하지.”
막연하게 수나라에서 먼저 사람을 보낼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동원할 수 있는 우리 병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짧은 시일에 굵은 인상을 남겨야 할 것이니 확실하게 답해주게.”
“이런. 대군을 동원하여 공세 종말점까지 진군할 계획입니까? 나쁘지 않군요.”
“그래야 대화가 통하지 않겠나? 이번 목표는 항복선언이라고 하지.”
“5만은 더 보탤 수 있습니다.”
“좋군. 총동원하지. 그런 뒤 수나라와 편히 협상하는 걸세.”
이건 확신할 수 있는 결과였다. 돌궐의 공격에 이어서 우리의 대군까지 저돌적으로 남진한다면 수나라는 무조건 달래고자 할 것이다.
“한데, 이 모든 건 자네 생각인가?”
“아닙니다. 실은 고구려 최고의 외교가께서 내리신 결론이지요.”
고구려 최고의 외교가라면 바로 태왕 고양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면서 말했다.
“아니, 폐하께서 왜 자네를 따로 부르셨나?”
다른 의미는 아니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한 말이었다. 바로 불러서 논의하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폐하께서도 작금의 정세처럼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외교는 경험이 없으시지요. 하여,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자신하지 못하십니다.”
“해서?”
“만일, 폐하께서 이르시면 관철로 이어질까 두려우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일단 전한 것이지요.”
태왕의 권위라는 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로 치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연자유를 아바타로 세웠다는 의미였다.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결론은 폐하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세.”
“그렇지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님이 어떤 해괴한 억지 논리를 펼칠까 걱정했습니다.”
“음. 만일 고구려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자네와 나의 대립일 것이네.”
“하하하! 이거 거는 기대가 큽니다.”
“썩 나가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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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과거 이연의 사례를 기억하는 장손람은 당도 즉시 황명의 권위를 앞세웠다.
“폐하께서 고구려와 휴전을 명하셨소.”
물론 지난날 패배의 원인이 자신의 오판에 있었다는 건 이미 잊었다. 아니, 굳이 되새길 이유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이연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경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되었구려.”
역시 오만방자했던 이연과는 태도가 달랐다. 장손람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소. 어차피 고구려는 북평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면 더 도달하지 않을 것이오. 일단 돌궐부터 막는 게 우선이오.”
“······남쪽의 진나라는 어찌하기로 했소?”
“아직은 진나라군이 북상하지 않고 있기에 방비에 전념하고 있소. 다시 말하지만, 호시탐탐 황도를 노리는 돌궐부터 제압해야지요. 이게 맞소.”
그러면서 슬쩍 좌우를 돌아봤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장손람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고구려 전선도 아무런 성과가 없구나.’
장수들의 몰골을 보니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 것 같기는 한데 고생만 하고 얻어낸 건 없는 게 분명했다. 장손람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적의 상황은 어떻소?”
“지독할 정도로 쫓아오지만, 화가 날 정도로 교전을 피하오.”
“이미 돌궐의 참전을 알 것이니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겠소?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니 말이외다.”
“여러 정황상 고구려와 돌궐이 손을 잡은 건 분명하오. 그렇다면 공세가 더 저돌적이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침착하오.”
“무슨 말씀이시오?”
“무언가 기다리는 느낌이 드오.”
고경의 말에 담긴 뜻은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다. 즉, 고구려의 추가적인 병력이 장성을 넘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최대한 빠르게 적을 타격하고자 다방면으로 방법을 찾는 중이었소. 하지만, 적장 온달이 참으로 고약하오. 평생 이토록 약을 바짝 올리면서 전투를 이끌어가는 장수는 처음이외다.”
“음.”
고경의 곤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장손람 역시 그의 답답함을 위로하듯 말을 꺼냈다.
“공의 말대로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협상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소. 나는 곧장 적장을 만나보겠소.”
“하. 온달에게 당한 수모를 갚을 날이 오겠지요. 공의 뜻대로 하시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대인! 적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고경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보나마나 또 위장일 것이다. 차분하게 대처하여 몰아내도록 하라.”
“한데, 적장 온달이 선봉에 섰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