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세계대전(8)
178화 세계대전(8)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면서 날뛰었다. 황제로서의 체통은 치워버리고 본능에 충실한 즐거움만 표출한 것이었다.
“하하하!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래요.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천하의 모든 기운이 우리 진국으로 모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입증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주라후가 후량을 도모한 일은 진나라 황도를 진동시켰다. 황제 진순보는 이 승리에 취해서 연일 술을 마셨다.
진나라의 명장인 소마가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의 뜻이 참으로 지당하옵니다.”
“한데, 승전을 이끈 장수들은 어찌 아직도 오지 않습니까. 함께 즐겨야지요! 내가 큰 상을 내릴 겁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직 북진이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그게 또 무슨 말입니까. 후량의 역사를 끊었는데 끝나지 않았다니요? 이 좋은 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요.”
어느새 진숙보의 안색은 험악해졌다. 하지만 소마가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폐하. 후량을 도모한 기세를 모아서 수나라를 공격해야 하옵니다.”
“내가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습니다. 한데, 보세요. 애초 수나라를 공격하고자 출병했는데 황명을 따로 받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렸어요. 이건 항명입니까. 아닙니까.”
“폐하. 전장의 사정으로 봐주시옵소서.”
“아. 그러니까 내 말에 답변이나 하세요. 항명입니까. 아닙니까.”
“허. 어찌하여 폐하의 물음에 답변하지 않습니까?”
간사한 눈으로 상황을 살피던 공범이 책망하듯 말하며 끼어들었다. 진숙보의 즉위 이후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의 말의 소마가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폐하. 주라후의 행동은 명백하게 항명이옵니다. 벌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하온데 다시 북진을 언급하고 있사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공범의 혀는 뱀보다 부드럽고 고약했다. 소마가의 굳은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장의 사정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오. 또한, 이는 내가 폐하께 사정을 아뢸 것이외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뻔뻔하여 참을 수가 없군요. 사실 후량을 도모한 게 큰일입니까? 알아서 무너지던 나라였습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어찌 말을 그토록 가볍게 하시오?”
“가벼운 일을 언급하는데 가볍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사옵니까? 폐하.”
“하하하! 공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진숙보는 광인처럼 박장대소했다. 공범도 맞장구치듯 웃었으나 소마가는 속만 타들어 갈 뿐이었다.
“폐하. 이미 천하의 기운이 넘어왔사옵니다. 후량을 도모한 본국의 기세에 겁을 먹은 수나라 황제가 달려와서 무릎을 꿇을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겠사옵니까.”
“과연! 천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공이 유일하오. 내가 어찌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점입가경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소마가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이미 불가능했다.
“폐하. 현재 수나라는 돌궐과 고구려의 공세로 국운이 위태롭사옵니다. 지금이야말로 본국의 숙원을 이룰 수 있사옵니다. 이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가늠도 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대군의 출병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돌궐과 고구려의 공격도 감당하지 못하니 애초 위태로운 나라였다는 겁니다. 조만간 수나라 황제가 살려달라고 오겠군요. 하하하! 피를 흘리지 않고 천하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폐하.”
“하하하! 좋아요. 수나라 황제가 구걸하러 올 때 백만 대군을 호령하여 돌궐의 대카간과 고구려의 태왕을 꾸짖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세요!”
이미 진숙보는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여기에 공범까지 헛된 말을 보태니 더 암담했다.
“한데, 내가 의아한 게 있군요. 이미 1만의 정예군을 내렸는데 또 무엇을 더 달라는 겁니까?”
“폐하. 수나라를 공격하려면 1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옵니다. 폐하께서 황명을 내리시어 더 많은 병력을 움직여주셔야 하옵니다.”
“고작 수나라 도모하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이럽니까? 그리고 몇 번을 말합니까. 이미 천하가 내 것인데 무슨 전쟁입니까. 민심이 동요합니다. 민심이.”
진숙보는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철군하라고 하세요.”
“폐, 폐하. 하오시면 1만의 병력이라도 북진하게 할 수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허. 참으로 이상하군요. 조금 전에는 1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한데, 이제는 1만이라도 싸우게 해달라니요? 이는 본국을 위험에 던질 수도 있는데 전쟁을 이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요?”
공범이 말꼬리를 잡으며 끼어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간사한 미소가 진하게 걸려 있었다.
“참으로 의도가 불순하군요. 폐하. 당장 황도로 오라고 황명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내가 들어봐도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래요. 당장 황명을 내릴 것이외다.”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내려졌다. 소마가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하하하! 태평성대로! 풍악을 울리도록 하라!”
그리고 진숙보는 흥겨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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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라후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설마 이계찰의 쇄환조차 이렇게 무시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쇄환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의연 쇄환의 거부 직후 연이어 요구했는데도 거절한 건 철저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여겨도 되는 것이었다.
돌궐의 차기 지존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돌궐의 외곽에서 발생한 박고의 반란도 홀로 출병해서 진압할 정도의 충심을 보였는데도 처우가 이러하니 노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고정의의 눈동자는 그를 더 화나게 했다. 아니, 굴욕적이었다.
“하. 연이어 두 번이나 나의 요청을 거부했소. 이는 지근찰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오. 도저히 참을 수 없소.”
“음. 알겠습니다. 약조대로 결과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가한께서는 충분히 성의를 보이셨으니 말입니다.”
“막리지. 아직 끝이 아니오. 그러니 기다리시오.”
“소인이 끝을 확인할 필요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정의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빤히 쳐다만 봤다. 처라후의 안색은 빨갛게 변하고 있었다.
“막리지. 지금 나를 믿지 못하오?”
“믿지요. 그리고 믿음의 결과를 보이셨습니다. 본국의 요청대로 의연의 쇄환을 요구하셨으니 말입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분명 의연의 쇄환 요구 당시만 해도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의 기억이 틀렸습니까.”
어찌 틀리겠는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라후 역시 의연의 쇄환이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순탄하게 돌궐의 대권을 넘겨받는 것이었기에 특별한 행동을 도드라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뒤틀린 감정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애를 쓰신 겁니다. 본국에 대한 가한의의리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단지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게 아니오. 내가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소.”
“음. 그 또한 가한의 의지가 아니겠습니까. 소인이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카간께서 수나라와 다시 손을 잡겠다고 하셨소.”
“······.”
“고구려도 이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지 않소이까.”
“허.”
고정의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미 대카간 아사나 섭도와 험악한 관계로 굳어졌으나 이 시국에 돌궐이 수나라와 동맹을 체결하는 건 절대로 반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본국을 앞에 두고 그리한다는 건 선전포고로 간주해도 되는 것이겠군요.”
“가장 답답한 건 바로 나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전에 확인을 하지요. 본국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선언이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오. 아파가한의 배후를 타격할 것 같소. 물론, 수나라의 굴복이 전제로 세워져야겠지만 말이외다.”
“······.”
천하의 정세가 어찌 뜻대로만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현재 고구려에 가장 이로운 건 아파가한의 대군이 수나라를 강력하게 압박하는 것이었다.
아파가한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고구려의 북평 지배권은 공고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일 대카간이 아파가한을 제압한다면 수나라는 온 힘을 다해서 북평을 공격할 것이다. 만일, 그리되었을 때 고구려가 무조건 승리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아니, 고정의는 고구려에서 누구보다도 수나라의 저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쉴 새 없이 몰려올 그들의 대군은 고구려가 10년, 20년을 감당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점차 안색이 굳어졌다.
반면, 처라후의 안색은 점차 풀어지듯 밝아졌다.
“어떻소? 다시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생겼소?”
“물론입니다. 한데, 가한께서 특별한 행동에 나서실 수 있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화가 미칠 것이니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 물론, 대놓고 반기를 들 수는 없소. 더불어 아파가한과 피를 보게 되면 나는 응당 대카간의 편에 서야 하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어찌하실 겁니까.”
고정의의 직설적인 물음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이미 이곳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안을 전해야 하니 말이다.
“원군을 보내주리다.”
“예······?”
“내게 공식적으로 내용이 전달된 것이 아니외다. 한데, 나는 고구려와 혈맹이오. 그러니 응당 함께 전장에 나서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허. 대카간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대카간께서 아파가한을 제압하고, 나는 고구려를 거들면 되오. 하면, 돌궐은 평온하오. 수나라가 개입할 여지는 없소.”
간단한 말이지만 담고 있는 뜻은 참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고정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가한의 뜻대로 하시지요.”
“음. 지금 곧장 떠날 것이오?”
“그래야지요. 이 길로 북평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세가 급변하니 직접 가서 힘을 실어줘야지요.”
막리지인 고정의가 직접 최전선에 나선다는 건 무게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처라후는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북평에 주둔하는 고구려군만 보면 전력을 다한다고 보이지 않소. 특별한 이유가 있소?”
“이런. 가한께서 오해하셨군요. 현재 본국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병력의 수만 보면 그리 생각하는 게 쉽지 않소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요. 전군을 북평에 배치했다가 후미를 잡혀버리면 어쩌겠습니까. 이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흘 장군이 요동에만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돌궐을 못 믿어서 전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처라후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국이 의기투합했다면 이미 수나라는 먼지가 되었을 것인데 참으로 아쉽소.”
“이미 그럴 시기는 지났지요. 피를 보지만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꼭 그리될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