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세계대전(5)
175화 세계대전(5)
어느새 수나라의 대군이 지척에 이르렀다. 온달과 을지문덕은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적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요격하는 게 옳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물론, 농성전이 유용하겠으나 아군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북평을 점령했다고 할지라도 뿌리 깊게 자리 잡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더욱이 적군이 사방을 에워싸면 고립될 것이니 애써 노력해온 여러 통치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컸다.
좋지 않은 결과였다. 훗날의 통치까지 치밀하게 고려할 때 가장 합당한 방법은 역시 야전이었다.
온달은 목을 가볍게 움직이면서 말했다.
“특별한 안건이 있나?”
“없습니다. 대형께서 편히 움직이시면 됩니다.”
“이런. 적군이 무려 10만인데 그렇게 말하다니 참으로 애석하군.”
“하하하. 지금 막 가장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서둘러 말해보게.”
“아니다 싶으면 퇴각하십시오.”
“큭. 싸우다 죽으라는 말이군.”
온달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을지문덕의 표정에도 근심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온달의 패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싸우십시오. 멀리서.”
가서일이 툴툴거리면서 말했다. 물론, 온달과 을지문덕은 대꾸하지 않았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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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의 10만 대군을 지휘하는 고경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의 큰 패배를 겪었기에 섣불리 공세를 펼치는 건 곤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군이 다시 패배하면 장졸의 동요가 클 수밖에 없네. 하여, 더 신중하게 접근하여 적을 압박할 것이야.”
황명이 아닌 이상 고경의 권위를 밀어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만큼 그의 위치는 수나라군에서 절대적이었기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불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비록 이번 전투가 아니지만 수나라군의 지속적인 패배는 일국의 누적된 피해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허용되는 선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특히, 수나라 군에서도 용맹이 뛰어난 사만세는 호승심을 강력하게 표출했다.
“대인. 소장이 선봉에 서서 온달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필히 자네에게 선봉을 맡길 것이네. 하지만, 아군은 이길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도출한 뒤 적과 싸울 것이네. 이를 어겨서는 아니 될 것이네.”
“소장은 대인께서 마련하신 전장을 신뢰합니다.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이미 선봉을 약조 받았기 때문인지 사만세는 흡족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그러자 지켜보던 달해장유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어찌 소장을 잊으실 수 있습니까.”
“허. 내가 어찌 자네를 잊겠는가.”
고경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작전에는 언제나 자네가 포함되어 있네. 걱정하지 말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2~3천의 별동대를 내려주신다면 소장이 적을 교란해보겠습니다.”
“고구려군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네. 한데, 고작 수천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소장이 적을 유인해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듬직했다.
이런 기세라면 아무리 고구려군이 강성할지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패배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것도 사치로 여겨질 정도였다.
고경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안건을 수용하겠네.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적을 교란하게.”
“소장이 필히 승전을 가져오겠습니다.”
“응당 믿고 있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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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벌이 진행되는 엄중한 정세에 진나라의 북진이 감행되면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그러나 큰 무리 없이 방비할 국력이라고 판단되었기에 수나라는 두 개의 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추가적인 전선은 고려하는 건 어려웠다. 특히 상대가 돌궐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하루자간의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오는 수만 명의 돌궐군이 담겼다.
“아파가한······.”
분명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 물자를 국경까지 운송한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수레가 지나간 길의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아파가한이 공격을 펼친 것이다.
“이, 이토록 신의가 없다니······!”
돌궐의 저열한 행동에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막아야만 했다. 만일, 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핏발 선 눈으로 적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목숨을 걸고 방비하라! 황도에서 원군이 올 것이다!”
피 터지듯 외쳤을 때였다.
“자, 장군!”
충격에 휩싸인 부관의 외침에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
하루자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곳에는 토욕혼 가한의 깃발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절망만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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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연이어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은 신하들의 정신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나마 소위가 이성을 먼저 회복하여 다급히 외쳤다.
“폐하. 최악의 상황이옵니다. 지금 수를 쓰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와 만나게 될 것이옵니다.”
북방에서 아파가한과 토욕혼이 동맹을 체결하여 남진을 감행했다. 동방은 고구려와 첨예한 대립이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주라후가 북상 중이었다.
“진나라 주라후의 북진을 잘 감당하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사방에서 적의 대군이 공격하는데 어찌 남방의 전선이 튼튼하게 유지되겠사옵니까.”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는 실로 불의한 일이옵니다. 우선 고구려를 공격한 대군을 물리시어 돌궐과 토욕혼을 방비하시옵소서.”
모처럼 장손람도 소위의 편에 섰다. 양견은 이를 악물며 몇 번이나 숨을 내쉰 뒤 말했다.
“북방의 전선은 어떻소?”
“하루자간이 목숨을 걸고 방비하고 있사옵니다. 물러나지 않고 있으나 어찌 상황이 좋다고 하겠사옵니까. 한계가 있사옵니다. 즉각 원군을 파견해야 하옵니다.”
“고구려 정벌군을 물리겠소.”
양견의 판단은 전격적이었다.
현재 북방에서 남하하는 적의 군세가 수만 명이었다. 이를 방치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보낼 수 있는 원군의 규모가 어찌 되오?”
“아직 수만의 대군을 더 출병할 수 있사옵니다.”
그때였다.
“폐하.”
양견의 아들, 양광이었다.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다.
“지금은 불필요한 논쟁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우선 원군을 북방으로 출병시키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응당 그리할 것이다. 한데, 나선 이유가 무엇이냐?”
“아군은 돌궐의 방비를 위해서 원군을 보내겠으나 고구려 정벌군이 퇴각하면 고구려군도 의구심을 느낄 것이옵니다. 만일, 돌궐의 공세로 물러난다는 사실을 알면 되레 화가 미칠 것이옵니다.”
“고구려도 기주로 남진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하옵고 폐하. 우선 원군의 출병을 명하여주시옵소서. 이는 이견이 없는 일이니 당장 시행해야 하옵니다. 한시가 급하니 말이옵니다.”
양광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현재 가장 시급한 건 논의가 아니라 북방을 방비하는 것이다. 양견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명을 내렸다.
직후 양광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폐하. 다소 무리가 갈지라도 이참에 고구려군을 격멸할 수 있도록 유인책을 펼치는 건 어떻사옵니까.”
“고구려에 돌궐이 남하했다는 사실을 고의로 전하자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하면, 필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니 이때를 틈타 반격하면 어찌 대승을 거두지 못하겠사옵니까.”
“일리가 있군.”
양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이 문제는 고경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
“폐하.”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기에 전장의 상황에 가장 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그러니 오늘 논의된 내용을 모두 전하여 결과를 기다릴 것이다.”
“하오나······.”
“되었다.”
양광은 다소 불만스러웠으나 양견의 단호한 대응에 더 나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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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은 황당했다.
너무 황당해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무너진 표정이 황망함이 가득한 그의 심리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결국
“아파가한이 실성한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대카간을 공격하기로 약조했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가 수나라를 공격하다가 몰락하거나, 수나라 황도가 점령당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건 그의 공격으로 돌궐의 분열을 시작한 뒤 고구려가 북방의 패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한데, 이런 돌발행동을 했으니 어찌 어처구니가 없지 않겠는가.
물론, 아파가한 대라편의 이번 행동은 대카간과 전혀 논의하지 않은 돌발적인 성질의 것이었기에 지근찰 역시 노여움을 숨기지 않았다.
“대사의 말이 옳소. 하. 심지어 토욕혼과 연계하여 공격하였는데 어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소이까.”
대라편이 대카간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의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카간의 시선을 아파가한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쟁이라는 건 치밀한 계획으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수만의 대군이 움직일 수도 있었다. 아파가한이 수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에 대카간이 아무도 모르고 이해할 수 없는 판단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이미 상황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정국이었기에 이처럼 본능에 가까운 결정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이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을 전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인. 요동으로부터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현재 고구려군의 이동은 돌궐을 견제하고 북평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고구려는 돌궐과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나라와 전쟁을 펼치는데 돌궐과 다툰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현재 고구려가 가한께 지원하며 가깝게 지내는 것 또한 돌궐의 공격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사의 의견이 일리가 있소.”
지근찰이 동의하며 다시 말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느니라!”
짜증이 가득 담긴 외침과 함께 노기를 풀풀 풍기며 등장하는 사람은 대카간 아사나 섭도였다.
영문을 알 수 없을 지근찰과 의연의 의구심은 커졌다.
“처라후가 이계찰을 보내라는군. 하. 이 일을 섣불리 처리했다가 괜한 분쟁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달갑지 않은 상황이 또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