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세계대전(4)
174화 세계대전(4)
의연은 힐끗 쳐다봤으나 특별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쾌함을 강하게 표출할 뿐이었다.
반면, 지근찰은 미소를 지으면서 의연을 달래듯 말을 꺼냈다.
“대사.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소.”
“······.”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아니겠소? 나는 대사께서 응당 자비로움을 내게 보여줄 것으로 여기고 있소.”
지근찰의 태세 전환이 발생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수나라의 대군이 북상하여 북평 전투가 재발하게 되었으니 돌궐에게 이롭도록 상황을 재구성하고자 이리 나오는 것이었다.
‘다 알고 모략할지라도 염치라는 게 있건만 지근찰은 정말 뻔뻔하구나.’
정말 쉽게 접하지 못한 유형의 인물이었기에 의연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절대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으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이 정도에서 한발 물러서는 게 합당했다. 더 먼 산을 쳐다보고 있으면 지근찰은 아주 투박하게 압박을 펼칠 게 뻔하니 말이다.
“소승은 늘 한결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번에 오해가 풀렸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찌 소승만 이리한다고 만사가 가볍게 해결되겠습니까.”
“이런. 내가 해줘야 할 일이 있나 보오?”
“가한께서 나를 쇄환하라고 하셨습니다.”
“······해서요?”
“대인. 다른 분도 아니고 가한이십니다. 이계찰은 요설은 무시할 수 있으나 가한의 말을 어찌 가볍게 흘릴 수 있습니까. 이는 소승에게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음.”
“이 문제를 정리해주십시오. 소승은 그래야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통함이 가득 담긴 하소연에 지근찰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계찰을 치워버렸으니 의연이 크게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도 고구려에서 중요한 정보를 파악할 능력은 된다.’
사실 고구려 왕도에 아는 이가 있다고 했을 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적당히 날조된 내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고구려 막리지 왕고덕이 남몰래 찾아간 이계찰과 나눈 밀담의 내용을 파악할 정도로 중요한 인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정도면 이번 전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파악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게 아닐지라도 한번 써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수나라 전선과 관련된 내용일 것이니 정보의 교란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즉, 현재 돌궐에게 있어서 의연이라는 승려는 아주 중요한 정보원이라는 것이다.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첨예한 대립에서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 그러니 의연의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
의연 역시 눈치가 빠르기에 지금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언제 탈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쉽군. 훗날 고구려가 확실하게 도움이 될 때 의연을 넘기고자 했건만.’
생각을 정리한 지근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내가 가한께 사안의 철회를 요구하겠소.”
“원래 대인과 소승의 관계를 고려할 때 결과를 보지 않고 일을 진행해도 무방했지요. 한데,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 대사.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참으로 모욕적이외다.”
“소승을 쳐다도 보지 않았던 대인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때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소. 한데, 지금은 손바닥이 마주쳐야 할 때인데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소? 더불어 나는 언제라도 고구려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오. 즉, 나로서는 아주 큰 양보를 한 것이오.”
생각 이상의 뻔뻔함에 의연은 감탄까지 할 뻔했다.
‘그렇구나. 이계찰이 있을 때는 모든 신경이 그의 제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 고구려 외교를 파탄 낸 것도 국익이 아니라 이계찰을 찍어 누르기 위한 방도였을 뿐이야.’
이계찰을 제압한 현재 지근찰은 모든 사안의 접근을 뱀처럼 처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더 요구할 수가 없다.
“좋습니다. 소승이 요동의 정세를 파악해보지요.”
“이왕이면 북평의 정보도 알아보면 더 좋소.”
“물론입니다.”
-----
처라후는 참으로 불편했다. 여태껏 만난 사람 중 이토록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쫓을 수도 없었다. 상대는 고구려의 막리지 고정의였기 때문이었다.
의연이라는 요승의 쇄환을 요구했는데 굳이 결과를 보고 가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처라후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수만 석의 군량을 지원해주는 주체였으니 말이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괜히 쳐다봤다. 고정의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가한. 생각보다 답변이 오래 걸리는군요.”
“음. 내부의 사정이 있을 것이외다.”
“고작 승려 한 명을 쇄환하라는 요구입니다. 실제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답변인데도 이리 나오는 건 참으로 의아하군요.”
“음.”
처라후는 애써 참았으나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사람을 보낼 수는 없소.”
“물론입니다. 그저 기다려볼 뿐입니다.”
“한데, 전부터 궁금했소. 만일, 요승 의연의 쇄환을 거절하면 어찌할 생각이오?”
“설마 가한의 청을 거절하겠습니까? 의연이라는 승려 한 명의 가치가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긴 했다.
그런데도 처라후는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얼마 전 이계찰이 의연을 감당하지 못해서 손을 내밀었다. 이는 달리 말할 때 의연의 입지가 생각 이상으로 탄탄하다는 걸 의미했다. 하면, 자신의 요구에도 쉽사리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했다. 그래서 최대한 이 사안에서 발을 빼고자 했다.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고정의의 요구도 묘하게 바뀌고 있다. 처음에는 분명 요구만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결과까지 바라고 있다.’
처라후는 상황이 점차 불편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는 건 고구려 군량을 지원받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고정의가 손을 내저으면 수만 석의 군량이 눈앞에서 날아간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의연의 쇄환을 거부당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측근의 보고는 처라후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차분하게 물었다. 아니, 그러고자 했다.
“지근찰의 결정이었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대카간께서 결정하신 게 아니라 지근찰의 독단이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지근찰이 감히 나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건가?”
“대카간께서는 요승 의연을 쇄환하고자 했으나 지근찰이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결과, 무산되었습니다.”
내막을 듣게 되자 처라후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일이 잘 풀리고 있었는데 지근찰의 세 치 혀로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하. 이계찰은 전혀 힘도 쓰지 못한 것인가?”
“송구합니다. 이계찰은 고구려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실각했습니다.”
“뭐?”
처라후가 고정의를 쳐다봤다.
그러자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냥 흘러가듯 툭 던지듯 부정했다.
“하. 그렇군.”
처라후는 강렬한 불쾌함을 표출했다.
“지근찰이 정적을 제거하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이로군. 그러니 천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감히 내 요구를 짓밟은 것이야.”
장차 돌궐의 차기 지존이 될 자신의 권위를 지근찰이 무시했다는 결론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네 다시 다녀오게.”
“무엇을 요구하면 되겠습니까.”
“이계찰을 보내라고 하게.”
“예?”
“일찍이 그는 내게 의탁을 청했네. 즉, 이계찰은 대카간의 신하가 아니라 나의 신하가 되었다는 걸세. 한데, 이렇게 구금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만일, 사실이라면 지근찰이 돌궐 차기 지존의 측근을 정치적으로 압박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는 억지라고 할 수 없었다.
“이번 요구도 거절한다면 내가 직접 지근찰의 사지를 찢어버린다고 전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고정의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러니
‘일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풀려가는군.’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어쩌면 돌궐의 분열이 초안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출한 것이다.
-----
부여창의 손끝이 떨렸다. 목리문차가 가져온 대 고구려 외교의 결과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내가 고구려 태왕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니요?”
“폐하. 몇 번을 말해야 하옵니까? 어디까지나 형식에 불과하옵니다. 국서에서 그저 그렇게 표현할 뿐 실제적인 위계가 아니옵니다.”
“허. 이보시오. 하면, 하늘 아래 입조하는 사례도 있소? 아니지 않소이까. 하여, 위계라는 건 국서가 전부요. 한데, 실제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어찌 수용할 수 있소이까.”
부여창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목리문차의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공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고구려의 신묘한 농법을 익힐 수 있다면 손해 볼 건 없지요.”
“자고로 와신상담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구려의 농법을 익힐 수 있다면 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농법을 전해 받아 몇 년간 차분하게 국력을 키운다면 기어이 오늘의 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귀족들은 모두 목리문차의 말에 동의했다. 부여창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수군을 일으킬 수 없고, 서토와 외교할 수 없소. 이는 그간 이뤄진 백제의 대외 정책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외다. 한데, 수용이라니요! 공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노여움과 수치심이 범벅된 그의 외침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귀족은 없었다. 이미 백제의 군주로서 위상과 권위가 바닥을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힘의 우위가 확실해졌기에 목리문차는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수군을 다시 일으킨다고 해도 고구려가 이를 지켜만 볼 것이라고 여기시옵니까? 왕도의 지척에 있는 기벌포가 그들의 공격으로 송두리째 무너졌사옵니다. 한데, 대체 무슨 수로 고구려 수군을 감당하실 것이옵니까? 이러한데, 괜한 행동을 하는 건 국력을 또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옵니다.”
“백제의 신하로서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백제의 신하이기에 이리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 신들이 가장 중시하는 건 오직 백제의 국세이옵니다. 작금의 처지가 이토록 어려우니 고개를 숙이는 것이옵니다.”
목리문차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진정 폐하께서 보실 때 신들은 자존심이 없는 것 같사옵니까? 하면, 묻겠사옵니다. 작금의 백제가 이토록 초라해진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뭐요······?”
“선대왕 시절 부흥의 기치가 천하를 흔들었사옵니다. 하온데 너무나도 초라하게 ᄁᅠᆩ였사옵니다. 이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옵니까? 순간의 굴욕을 참지 못하고, 노여움을 숨기지 못하고 기어이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폐하께 있지 않사옵니까.”
“이, 이보시오!”
“폐하!”
결국, 목리문차는 고함을 질렀다. 부여창의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펼쳐졌다.
“폐하께서 일으키신 전쟁. 단 한 번이라도 승리한 적이 있사옵니까?”
없었다.
부여창은 지금껏 패배만 일삼았다.
“그 무수한 패배가 백제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사옵니다. 만일, 인내하고 버텼다면 나뉜 신라를 능히 제압했을 것이옵니다. 하온데 과연 그렇사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루한 처지이옵니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시옵니까?”
목리문차는 쐐기를 박듯이 한 마디를 더 꺼냈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 바로 폐하이시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