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세계대전(3)
173화 세계대전(3)
이미 싸워 승리했으나 북평을 오롯이 점령한 건 아니었다. 분명 통치는 순탄했으나 확고부동한 고구려의 영토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큰 패배를 겪었기에 당분간은 숨을 고르겠으나 때가 되면 다시 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토록 빠르게 반응할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고구려로서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냥 놀라웠다. 정말 놀라도 되는 일이었다.
“수만 명이 죽거나 다치는 패배를 당했는데도 10만의 대군을 북상시키다니. 서토는 참으로 경이로운 땅이 분명하네.”
온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얼마 전 치른 북평 전투가 아니더라도 기주 전투에서도 수나라는 큰 피해를 봤다. 누적된 피해가 상당한데 전혀 없던 일처럼 쉬지 않고 수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능력은 정말 경이적이었다.
을지문덕 역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달의 말에 동의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번에 격퇴해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수나라의 국세가 크게 휘청하지 않는 이상 북평은 늘 전운이 감돌겠지요.”
“휴. 솔직히 답답하군. 적은 소모전인데, 우리는 갈수록 총력전이라는 사실이 말일세.”
아무리 전쟁에 최적화된 고구려라고 할지라도 상시로 수만의 대군을 주둔하여 대비하는 건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즉, 같은 10만 명이라고 할지라도 수나라와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국력의 소모는 큰 차이가 났다.
“음.”
두 사람의 근심을 듣던 가서일이 가볍게 한 음절을 내뱉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대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삼자가 육안(肉眼)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으나 그의 눈동자는 분명 가늘어졌다.
“이건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보게.”
온달은 쳐다만 보고, 을지문덕이 물었다.
“문덕. 수나라가 지속하여 대군을 일으킬지라도 패배가 지속하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네.”
“과할 정도로 간단하군. 일단 계속하게.”
“답답하군. 딱 보시게. 북평을 버릴 게 아닌 이상 이겨야지. 안 그런가?”
“······.”
“승리할수록 북평의 통치는 공고해질 것이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네.”
“······.”
절대로 반론을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었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쳐다만 보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기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네 말이 맞네. 그래. 이겨야지.”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물론,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세상만사를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온달의 반응이 이러하면 가서일의 말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을지문덕은 적절하게 개입하여 중차대한 문제를 언급했다.
“고흘 장군께서 대군을 이동시키셨습니다. 이로써 돌궐은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겁니다.”
“수나라의 대군과 전투를 치를 때 그들이 후방을 압박하면 우리로서는 곤란한 일이지. 하지만, 고흘 장군께서 진용을 구축하여 버티신다면 그들이 무엇을 하기는 어렵겠지.”
귀신도 곡할 정도로 철저하게 작전을 수립하여 방비했던 북평 전투 당시에는 돌궐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아니, 고구려는 승리가 확정적이라고 여겼기에 돌궐의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사정이 달랐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질 수밖에 없기에 돌궐을 제대로 방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수밖에 없었다.
천만다행인 건 요동에 고흘이 미리 주둔하고 있었기에 돌궐의 섣부른 행동을 막아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진군하여 압박해야 돌궐은 침묵할 겁니다. 더불어 만에 하나 수나라 군의 기세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할 경우 장군께서 원군을 보내실 수 있으니 현재로는 가장 적절한 방책입니다.”
“자네가 애를 썼네.”
온달은 낮게 한숨을 쉬면서 자연스레 손목을 움직였다.
“정찰을 강화하여 적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게.”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서일을 바라봤다.
온달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생하게.”
“예?”
온달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일이 눈을 껌뻑이면서 쳐다보자 을지문덕도 일어났다.
그렇게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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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을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이 발생했는데 늘 잘 해결했을지라도 가시밭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생명이 사라질 것이니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계찰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서 서찰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철저한 검열에 대비해야 하기에 정확한 속내까지 교환한 건 아니었다.
‘고구려로부터 정확한 사정은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황을 유추할 수는 있다.’
현재 고구려는 돌궐의 분열을 위해서 모든 수를 강구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처라후가 중요한 장기 말이었다.
그리고
“가한께서 소승의 쇄환을 요구했다고요?”
고구려가 처라후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근찰의 말에 의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 대인은 진정 악인이로다.’
참으로 고약한 방법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가한께서 어찌하여 그러신 겁니까.”
“정확한 내막은 파악해야 하오. 하지만, 고구려의 지원을 받으니 마냥 거절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니겠소?”
“음.”
“가한 측에서도 우리가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리라 여기는 건 아닌 것 같소. 그러니 대사도 크게 개의치 마시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내부에서 상당히 깊이 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계찰이 친고구려 노선을 부르짖는 것과 돌궐의 차기 대카간인 처라후가 고구려의 요구를 수용한 건 사정이 달라도 아예 다르기 때문이었다.
‘본국에서 이계찰의 요구를 수용하여 처라후까지 움직이게 한 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위함이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의연은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대인. 소승은 이 일을 마냥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이오?”
“현재 가한께서는 고구려의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훗날 돌궐의 대외 정책이 고구려로 편향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
“소승은 이를 미리 경계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담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정치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근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사. 해서, 정확한 요지가 무엇이오?”
“엄중히 경고해야 합니다.”
“경고?”
“최소한 고구려와 단절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수시로 발생하게 됩니다.”
“······.”
의연은 더 말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지근찰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치껏 잠시 말을 멈췄다.
“그동안 대사의 의견을 경청했소. 이는 대사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소. 한데 말이외다. 감히 가한을 압박하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소. 나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럽구려.”
“대인. 오해가 있으십니다. 소승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시끄럽소.”
지근찰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의연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도 되는 말이 있소. 대사는 대사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오?”
“송구합니다. 대인. 소승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간의 일을 생각하여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소. 하지만, 자중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날카로움과 단호함이었다.
‘그렇구나. 이계찰이 확실하게 몰락하니 태도가 바뀐 것이다. 지금껏 나를 정적을 제거하는 칼로 사용한 것이다.’
의연은 고소를 삼켰다. 철저하게 상황을 주도한다고 여겼으나 상황이 꼭 그러한 건 아니었다. 지근찰 역시 원하는 상황을 도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와 지근찰 모두 이계찰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니 원하는 걸 얻은 것인가.’
정적이 없어진 이상 칼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토사구팽의 느낌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더욱이 나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에 불과하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힘은 지근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언제든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자 큰 위기감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대인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않도록 처신을 잘하시오.”
“소승이 고흘 장군과 친분이 있습니다.”
“······.”
축객령을 내리려던 지근찰은 멈칫하여 의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상당히 흥미로운 말이구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압박할 때 돌궐이 군사적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그때 아파가한이 공세를 펼치면 대카간은 순식간에 몰락할 것이야.’
수나라의 행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머릿속으로 다시 상황을 정리한 의연은 자신 있게 말을 꺼냈다.
“이번 진군의 목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근찰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표정이 싸늘해졌다. 의연은 불안함이 엄습했다.
“대사는 고구려를 배신했소. 심지어 고구려 왕도에서 대사를 쇄환하라고 떠들고 있소이다. 한데, 고흘이 대사와의 사사로운 인연 때문에 군사 기밀을 전해준다는 것이오? 내가 언제까지 그 요설에 귀를 기울인다고 생각하시오?”
“대인.”
“짧게나마 기대했는데 참으로 애석하구려.”
“대인의 우려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서찰을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뒤 상황을 정리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끌. 설령 서찰을 주고받는다고 할지라도 고흘이 무슨 수를 쓸지 가늠도 할 수 없소. 오히려 본국에 혼란을 끼칠 뿐이외다.”
지근찰은 무슨 말에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대인의 오해가 풀릴 때 소승을 찾아주십시오.”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소.”
“고흘 장군의 이번 행보가 단지 돌궐만을 견제하기 위함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소승은 이를 파악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지근찰은 무시하며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의연은 침착하게 합장하며 일어났다.
홀로 남은 지근찰은 차후 정국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고흘을 제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미 기선이 제압당하여 누구도 나서지 않으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하구나.”
고흘이라는 이름에 주눅이 든 돌궐의 장수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음.”
잠시 생각을 하던 지근찰은 상당히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했다.
“가한이 나서면 참으로 좋을 것인데.”
처라후는 돌궐에서 가장 용맹한 무장이었다. 그가 출병한다면 고흘에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한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고를 거듭할 때 급보가 전해졌다.
수나라의 대군이 북평으로 진군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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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가한 대라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적기였다.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수나라의 10만 대군이 북평으로 진군하고, 진나라가 북진을 감행했다.”
이를 두고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수나라는 공세와 방어를 동시에 진행하기에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의연에게는 대카간을 공격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대카간은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또한, 고구려도 수나라와 싸우느라 대카간을 압박할 기력이 없을 것이다. 이럴 때 홀로 대카간을 공격한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대라편은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결정을 도출했다.
“수나라를 공격한다.”
승전의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과실은 참으로 달콤할 것이다.
이번 전쟁의 승리로 돌궐 전역을 도모할 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