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세계대전(2)
172화 세계대전(2)
고구려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대비하지 못한 건 참으로 큰 치욕이었다. 하지만, 진나라의 북진은 궤를 달리하는 당혹감과 만나게 했다.
지금껏 수나라는 진나라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뿐, 위협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언제든 때를 보아 대군을 일으키면 쉽사리 제압할 수 있는 허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더불어 아무리 틈이 보여도 눈치만 살필 뿐 감히 나서지 못하는 무기력한 나라였다.
한데, 그들이 공세를 펼쳤다. 심지어 북평으로 10만 대군을 출병한 이후였다. 이 절묘함은 진나라가 틈을 노려보다가 기어이 급소를 찔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이 자체가 치욕스러웠다.
양견의 불편한 심기를 느낀 신하들이 앞다퉈 나섰다.
“폐하. 적의 규모는 고작 1만여 명에 불과하옵니다. 능히 감당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병력을 급파한다면 어찌 진나라가 더 경거망동하겠습니까.”
신하들의 말은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황제의 동요를 막기 위한 절절한 충언들이었다.
소위 역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진나라의 공격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사옵니다. 지금이라도 고구려 정벌군을 회군하여 진의 공세를 방비하는 것이 옳사옵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지금 고구려 정벌을 철회한다면 더 큰 화가 미칠 것이옵니다.”
장손람이 소위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불편한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적의 군세는 고작 1만 명에 불과하옵니다. 이는 저들이 대대적인 북진을 감행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옵니다.”
“대체 그건 무슨 궤변이시오.”
“생각해보시오. 진나라가 진정으로 본국을 도모하고자 했다면 수만의 대군을 운용하여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쳤을 것이오. 한데, 1만의 병력이라는 건 그저 변방을 흔들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는 것이오.”
장손람의 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너무나도 위험천만했다. 소위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변방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절대 배제해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
“하면, 진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대군을 회군했을 때 고구려가 후미를 타격하면 어찌할 것이오?”
“그건······.”
“지금까지 그들이 무모한 점령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본국이 진나라와 혈전을 펼칠 때도 바라만 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소?”
고구려의 행보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기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대군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고구려가 틈을 노려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진나라의 북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위험천만한 가정은 결국, 소위의 말문을 막았다.
우위를 점한 장손람은 기세등등하게 주장을 이어갔다.
“폐하. 고작 1만 명에 불과하옵니다. 우리의 변방이 두려워할 규모가 아니옵니다. 하옵고 적장 주라후가 명장이긴 할지라도 본국의 장수들이 어찌 부족하다고 하겠사옵니까.”
“두 개의 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말이오?”
“폐하. 이미 두 개의 전선은 피할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하면, 어디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할지 결정해야 하옵니다.”
장손람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양견은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진나라의 병력이 허약할지라도 주라후는 명장이오. 또한, 1만에 불과할지라도 전장은 어찌 될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소.”
잠시 말문을 멈췄던 양견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따로 3만의 대군을 꾸려 진나라의 공세를 방비할 것이외다. 다소 무리가 될지라도 최대한 빨리 격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합당한 방도가 될 것이오.”
“폐하. 쉽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전선이 고착되는 건 더 난감한 일이 아니겠소?”
소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양견의 판단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가장 큰 전제가 너무 불안정했다. 전선의 승리를 가정한 판단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론을 펼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를 힐끗 본 양견이 보태듯 말을 이었다.
“천하의 정세가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소. 내가 되돌아봤는데 이는 본국의 위엄을 제대로 보인 것이 아니라 외교로 적을 움직이려고 한 일에서 비롯되었소. 비록 의도는 좋았으나 돌궐은 우리의 의도와는 다소 다르게 행동하오.”
만일, 돌궐이 수나라의 의도대로 움직였다면 북방의 정세가 이렇게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공세라는 건 존재할 수도 없었다.
“어디에서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꼬인 변방의 정세를 단번에 정리하자면 본국의 위력을 보여야 하오.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상황에서 몸을 사리면 고구려가 얼마나 더 호전적으로 행동할지 가늠도 할 수 없소. 그러하니 모두 내 뜻을 이해하리라고 여기겠소.”
황제의 뜻이 이토록 단호하니 소위는 더 나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판이라고 하기에는 수나라를 둘러싼 작금의 위기를 돌파할 다른 방책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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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라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고구려에서 이토록 노골적인 요구를 꺼내올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뇌리로 스치는 건 역시 이계찰이었다.
‘그가 성공했나 보군.’
제안을 거절하고 고구려로 달려갈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런 결과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복잡한 속을 다스리며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해서,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대카간께 의연이라는 요승을 쇄환하라고 제안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간결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사신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막리지 고정의였다. 이는 고구려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대번에 알게 했다.
“······만일 내가 거절하면 어찌 되오?”
“지금껏 고구려는 두 차례에 걸쳐서 10만 석이 넘는 군량을 가한께 지원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지요.”
“······.”
“한데, 본국과 돌궐을 이간질하는 요승의 쇄환이라는 정당한 요구조차 응해주지 않으신다는 건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해서, 이는 가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고구려의 막리지였기에 압박의 강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카간의 일에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처라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찌 고구려가 큰 도움을 준 사실을 잊겠소이까. 하지만, 이 일은 쉽게 나서기가 어렵소. 만일, 다른 걸 요구하면 내가 얼마든지 응하리다.”
“본국이 그동안 가한을 지원한 건 돌궐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데, 따로 청할 일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
“난처하여 나서기 어려우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찌할 생각이오?”
“본국이 직접 요청하지요.”
간단하고 명료한 말이었으나 내포한 의미는 달랐다. 처라후는 이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나와 잡은 손을 놓겠다는 것이오?”
“가한께서 본국의 정당한 요청을 거절하셨으니 더는 잡고 있을 이유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추가적인 지원은 없을 겁니다.”
기근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미 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군량의 지원이라는 건 참으로 달콤한 것이었다. 사실상 하늘에서 쌀이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뿌리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돌궐이 세폐에 집착한 이유가 단번에 이해될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중단된다고 하니 속이 타들어 갔다. 하북의 왕조가 세폐를 바치지 않을 때 대군을 일으켜 정벌한 이유도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고구려를 압박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돌궐의 대카간이 아닌데 그리하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다.
“군량 3만 석이 오고 있을 것인데 중단시키겠습니다.”
처라후의 눈이 커졌다.
“하면, 이만 물러나지요.”
“잠시 기다리시오.”
일어서려던 고정의가 빤히 쳐다보자 처라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과는 책임질 수 없소.”
“음.”
“생각해보시오. 내가 대카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외다. 기어이 관철하게 한다는 건 내가 가진 권한을 넘어선 것이오.”
고정의는 처라후를 빤히 쳐다봤다.
‘남에게 받는 물자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법이지.’
이미 처라후는 고구려의 지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은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본국이 어찌 가한의 입장을 모르겠습니까. 그리하시지요.”
“하하하! 참으로 다행이외다.”
“3만 석의 군량은 조만간 당도할 겁니다.”
“하하하! 영원한 우호가 이어지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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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한 이계찰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어그러진 돌궐의 대외 정책을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의연을 내치셔야 합니다.”
“.....”
“그는 고구려의 죄인입니다. 더 품으시면 양국의 관계가 심각하게 어그러질 겁니다. 의연을 고구려로 쇄환하여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해야 합니다.”
아사나 섭도는 무표정하게 이계찰을 쳐다만 봤다. 그의 눈동자나 표정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를 본 이계찰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고구려의 입장을 대변하는 걸 보니 참으로 우습소.”
조롱이 잔뜩 담긴 지근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계찰은 본능적으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뭐요?”
“아. 됐소. 본국은 고구려의 주구가 필요 없소.”
“이보시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큭. 우리가 모를 것 같소?”
“무슨 말이오?”
이계찰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고구려의 막리지 왕고덕을 만났다고 들었소. 대체 그는 왜 만난 것이며, 무슨 말을 한 것이오?”
“그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이었소.”
“됐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판단하리다.”
“무, 무슨 말이오?”
“모르겠소? 내가 공이 왕고덕을 만났다는 사실을 어찌 안다고 생각하오?”
“······.”
“의연을 사지 멀쩡하게 넘기기로 했다고 들었소. 게다가······.”
왕고덕과 나눈 은밀한 내용이 지근찰의 입에서 언급됐다. 이계찰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왕고덕은 본국에 고구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사가 있다고 언급하며 북방 정책을 수립한다고 하오. 나는 그 사람이 바로 공이라고 생각하오만.”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의연이 고구려의 왕도에서 확보한 정보요. 이 정도면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오. 계속 부정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오.”
이계찰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시오. 그래야 목숨은 지킬 수 있을 것이오.”
강도 높은 압박이 시작됐다.
“고구려의 군사 행동이 어찌 되오?”
“무, 무슨 말이오?”
“고구려의 병력이 본국을 압박할 것이라는 정보가 이미 확보되었소. 왕고덕이 공과 논의했다고 하니 모를 수가 있겠소?”
“이, 이보시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오? 하. 내가 이제 알겠소. 의연은 처음부터 이를 노린 것이었소. 그게 아니라면 나와 왕고덕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소.”
“하. 이제는 의연이 고구려의 첩자라는 것이오?”
“그렇소. 우리는 다 속은 것이오.”
“내가 너를 대우했거늘 참으로 배은망덕하군.”
아사나 섭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계찰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급보가 전해졌다.
“고구려의 병력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나라인가?”
“아닙니다. 요동의 병력이 본국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
“적장은 고흘입니다. 적의 병력은 최소 1만 명입니다.”
“······.”
아사나 섭도가 눈을 부라리며 이계찰을 노려봤다.
“이계찰. 살고 싶으면 고구려의 의도를 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