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세계대전의 징조
170화 세계대전의 징조
나의 경고에 당황한 이계찰은 진땀을 흘리며 해명했다.
“나는 그동안 꾸준하게 친고구려 노선을 취했소. 지금 양국의 전쟁이 발생한다면 나는 정치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소이까.”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본국이 의연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돌궐이 알겠다고 하느냐는 것이외다. 대체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오히려 그가 잡은 동아줄이 더 튼튼해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소?”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돌궐의 잘못된 외교를 되돌릴 수가 없소.”
들을수록 대단했다.
대체 무슨 말을 어찌했길래 돌궐의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
“참으로 간사한 인물이었소.”
나의 의문을 풀어주듯 이계찰이 말을 이었다. 일단 인물평은 아예 틀린 건 아니라서 의연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했다는 말은 사실로 추정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이역만리에서 고구려의 국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의연을 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대화는 빠르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는 고구려에 있을 때도 참으로 말썽이었소.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건 없었소. 한데, 계책이 참으로 뛰어났기에 곤경에 빠진 사람이 많았지요. 막상 나도 그에게 크게 당하여 하마터면 실각할 뻔했소.”
“허. 정말이오?”
“보통 인사가 아니오. 그를 상대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외다.”
“하면, 고구려도 그를 제거하는 게 좋지 않소이까. 그리한다면 내가 다시 본국의 외교를 바로 잡을 수 있소.”
다 좋다.
다 좋은데 만에 하나 정말로 이계찰이 뜻을 이루면 의연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아무리 국익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객지에서 맹활약하는 이를 사지로 내몰 수는 없는 법이다.
고민하다가 운을 던졌다.
“좋소. 하면, 의연의 목숨을 넘기는 조건으로 수용하겠소. 그를 고구려에서 처형해야겠소.”
“응당 그리해야 하오. 내가 목숨을 붙여서 보내주겠소.”
“아니외다. 사지가 멀쩡해야 하오. 눈도 두 개여야 하오. 혀도 멀쩡해야 하고.”
“무슨 말씀이오?”
“아. 우리가 하나씩 자를 것이외다. 나는 이 기회를 공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소.”
“좋소. 그리하겠소.”
의도치 않게 밀약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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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참으로 오묘했다. 좋게 말해서 이 정도였지 사실상 미친놈 쳐다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의연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맡겼으면 내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도 몰랐사옵니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폐하. 신은 오직 진실만을 고하고 있사옵니다.”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선교사가 정치 활동한다는 건 지고한 진리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탓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거나 고양성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좋소. 이번에도 막리지에게 속아보겠소.”
“허. 참으로 서운하옵니다.”
“됐소. 하면, 돌궐에 압박을 가해서 의연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자는 건데······이리하면 너무 단조롭소.”
“묘안이 있사옵니까.”
“어차피 돌궐의 분열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니 더 확실한 수를 던지는 게 옳지 않겠소? 게다가 이번 방책은 실패해도 되는 것이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소.”
“그렇긴 하옵니다. 돌궐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건 의연의 입지가 더 튼튼해지는 것이니 본국으로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사옵니다. 하오시면 어떤 방책이 좋겠사옵니까.”
“처라후에게 전하면 적절할 것이외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묘안이었다. 만일, 처라후가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여 대카간 아사나 섭도를 압박하면 돌궐의 분열은 빨라진다.
“물론, 처라후가 호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소.”
“하오나 3차 지원을 언급하면 필시 긍정적인 반응이 오지 않겠사옵니까?”
“큭. 처라후만 좋은 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마지막 과실을 본국이 취할 것이니 어찌 고민하겠사옵니까.”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요동에 사람을 보내서 압박을 시작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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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후는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우습게도 목울대는 꽉 막혀서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몇 번을 말해야 하오? 나는 관심이 없다고 했소.”
진숙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주라후와 말을 섞기 싫다는 의지는 참으로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폐하. 지금이 아니면 북진을 이룰 수 없사옵니다.”
“내일 하면 되오. 내일. 그러니 오늘은 이만 가보시오.”
“폐하. 고구려가 수나라를 대파했사옵니다. 지금 북진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사옵니다. 부디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하!”
진숙보는 결국 언성을 올렸다. 경멸을 잔뜩 담은 눈으로 주라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보시오. 이미 천명이 본국에 있다는 게 입증되었소. 한데, 전쟁이라니요? 기어이 실성하셨소? 전쟁이 그렇게 좋으면 단기필마로 달리면 될 일이외다!”
“폐하······.”
“참으로 답답하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고함을 지르는 진숙보의 모습에서 황제의 냉철함과 과감함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명군, 성군, 암군의 범주를 넘어선 범인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고작 고구려도 감당하지 못한 나라요. 그냥 두면 알아서 자멸할 게 뻔하오. 오래 걸리지 않아 힘의 부족함을 느끼고 수나라 황제가 내게 달려와서 목숨을 구걸할 것인데 왜 힘을 낭비하오?”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다. 현실로 구현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폐하. 수나라가 비록 패배했다고 할지라도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사옵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는 것이외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데 왜 힘겹게 북진해서 싸우려는 것이오? 아니, 아직 수나라는 건재한데 어째서 지금이 결정적 시기라며 전쟁을 부르짖는 것이오?”
“······.”
“대체 무슨 속셈이오?”
급기야 의도까지 의심했다. 말을 길게 하지는 않았으나 부적절한 뜻이 담겼다는 걸 느끼지 못할 수는 없었다. 주라후는 수치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겨우 진정시키며 말했다.
“폐하. 신은 평생 황실에 충성했사옵니다. 이번 북진을 청하는 것 또한 다르지 않다는 걸 어찌 모르시옵니까.”
“거참. 그래요. 그래. 뭐. 얼마나 필요하오?”
“10만의 대군이면 수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사옵니다.”
“허. 10만 명이라고 하셨소? 그러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오. 그건 어렵소.”
“폐하.”
“일단 1만 명으로 해보시오. 내가 볼 때 수나라는 이미 국세가 기울었기에 1만 명만 보내도 대경실색하며 항복을 청할 것이외다. 그리고······.”
참으로 참담한 말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라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고작 1만 명에 불과했으나 성과를 낸다면 추가적인 병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확실하게 되새겼다.
이번 북진이 진나라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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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복잡하게 움직이는 정세였다. 그래서 지근찰은 참으로 즐거웠다.
그를 본 의연도 함께 즐거운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펼쳐진 지도를 보면서 흥에 취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걸 본 지근찰도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모든 정세가 우리 돌궐에게 이롭소.”
“그렇습니다. 어찌 일이 이토록 잘 풀릴 줄 알았겠습니까. 소승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습니다.”
“큭. 내가 할 말을 대사가 다 해주는구려.”
도무지 흡족함을 숨길 수 없었는지 지근찰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수나라가 다시 북평 공격을 꾀할 것이오. 최소한 10만의 대군이 움직일 것이오.”
“일전의 패배는 수나라가 아둔하게 행동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준비하여 북진하는 것이니 전처럼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하하! 누가 이기더라도 상관없소. 양측 모두 궤멸적인 타격을 입기를 바랄 뿐이외다.”
“그렇습니다.”
격하게 동의하는 의연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여전히 흥겹게 춤을 추던 손가락을 움직여서 요서 지역을 가리켰다.
“양국이 첨예한 대립을 이어갈 때 돌궐의 대군이 요서를 공격하면 고구려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그 즉시 남하하여 기주를 타격하면 수나라는 대경실색할 것이외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저들이 방비를 잘한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와 싸우느라 정예군을 허비했을 것이니 절대로 아군의 공세를 방비할 수 없을 겁니다.”
“바로 그것이외다!”
지근찰은 고약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수나라 황제 양견은 말로 해서 듣는 자가 아니외다. 이번에 확실하게 본국의 힘을 보여줘야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오.”
현재 지근찰의 입지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고구려 체결한 동맹을 파기하고 수나라와 손을 잡은 건 그의 강력한 주장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약조한 세폐를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 반면, 고구려가 대라편과 처라후에게 지원을 하자 수나라 외교에 대한 회의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수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해야 했다. 때맞춰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운이 다시 고조되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수나라가 보낸 물자는 대라편이 모두 가로챘다. 지근찰은 죽어도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물론, 돌궐의 공세로 고구려가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의연이 볼 때도 이번 수나라의 공세는 절대로 간단하게 바라볼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병력도 최소 10만으로 추정한 것이었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 북평 전투는 양국이 국운을 걸고 다툴 가능성이 컸다. 이때 돌궐이 군세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의연이라고 할지라도 돌궐의 공격을 아예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미 대카간과 지근찰의 의지가 단호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통치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니 의연으로서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이로운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가 북진을 감행했을 때 아파가한 대라편이 남하하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대라편의 공격에 당황한 수나라가 허둥지둥할 때 고구려가 돌궐의 공격을 막아낸다면 상황은 아예 달라지는 것이었다.
즉, 의연으로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는 따르되 운용의 묘미를 발휘하여 돌궐의 발목을 잡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아파가한에게도 사람을 보내서 미리 언질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응당 그래야지요. 아무리 아파가한의 속내가 복잡할지라도 수나라 정벌을 꾀하는 대카간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소.”
의연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여기까지였다.
‘어쩌면 이번에 천하의 모든 세력이 창칼을 휘두르겠구나.’
이는 유례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