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전선의 구축(3)
169화 전선의 구축(3)
빤히 쳐다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서 반갑긴 했는데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거나 열렬하게 환영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내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관계였는데, 언제부터 관계 설정에 영 이상하게 흘렀기 때문이었다.
“머지않아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가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흐린 눈을 하며 쳐다봤으나 김후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고구려를 열렬하게 찬양하는 그를 볼 때마다 정말 적응할 수가 없었다.
“하하하! 그야말로 동방의 위대한 등불이 아니겠습니까.”
“······.”
“생각할수록 감탄만 터져 나옵니다. 고구려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이런 대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밥 먹고 있다가 고구려가 수나라를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헐레벌떡 오더니 계속 이런다.
다소 과하긴 할지라도 부러움이 섞인 좋은 말이기에 계속 들어도 무방하긴 했다. 하지만, 상대가 북조 신라의 상대등 김후직인지라 나로서는 다소 어색한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단지 그 말을 하고자 여기까지 달려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이제 본론을 꺼내 보겠는가?”
“하하하. 아닙니다. 소인은 정말 자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상국의 위엄이 천하를 흔들고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
“상국의 국세가 천하를 흔들어야만 소인도 지금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와.
정치인이 솔직하니까 소름 끼칠 정도였다. 완전 허를 찔려서 어색함이 얼굴을 잔뜩 덮어버릴 정도였다.
“왜 그러십니까? 대인과 소인의 맹약을 언급한 것에 불과합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지라도 속에서 욕구가 있었던 건 확실한 것이다. 내가 정말 무서운 사람의 본능을 깨어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자네의 순수한 충심에 감동했을 뿐일세.”
“과찬이십니다.”
“······한데, 더 할 말은 없는가?”
“딱히 없습니다.”
“남조 신라를 도모한다거나 이런 생각도 없나?”
“구태여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역도 제압을 포기한 것인가?”
“하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저 때가 아닐 뿐이니 말입니다.”
“갑자기 정치인이 된 것인가? 화법이 모호해졌군.”
어차피 속마음 다 말한 사인데 뒤늦게 간을 보고 이러면 서로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정말 불필요한 시간 낭비다.
“남진하면 상국에서 대군을 보태주실 겁니까?”
“그건 어렵지.”
“하면, 자력으로 역도를 제압해야 합니다. 한데, 쉬운 일이 아니지요. 병력을 떠나서 수백 년간 축적해온 남조의 역량을 제압한다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인프라의 차이가 크게 날 수밖에 없었다. 장수진을 비롯한 인재의 질적 차이와 조세를 징수하는 역량까지. 김후직의 말대로 그냥 봐도 확연했다.
“이미 남조가 신라입니다. 아쉽지만 현실이지요. 이럴 때 아군이 한 번이라도 크게 패한다면 내부의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아니, 파국이지요. 이럴 때 필요한 건 안정입니다. 그러니 굳이 무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안정을 취해야만 소인도 오래가지요. 게다가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여 만에 하나 이긴다면 소인은 어디에 위치할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난세에서 전쟁의 승리가 가져올 최고의 과실은 왕권의 강화로 귀결된다는 걸 말입니다.”
어찌하여 대승을 거두며 남조의 왕도를 점령한다면 김백정의 왕권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무수한 숙청이 발생할 때 김후직은 어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일이 그렇게 진행되면 고구려가 손을 쓸 수도 없다. 대군을 동원하여 경주까지 달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간들 김후직은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나 역시 남북조가 고착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신라의 통일은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후직이 이토록 시원시원하게 친고구려 노선을 취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국에서 과한 간섭을 하여 소인의 입지를 줄인다면 참으로 불편하겠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힘을 키워 본국에 반기를 든다면 입을 대야지. 한데, 자네는 그럴 생각이 없지 않은가.”
“우리 폐하께서는 고구려를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으시지요. 이를 중재하는 게 소인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김백정은 와신상담 중이었다. 때가 되면 모든 걸 정리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처지가 어렵기에 김후직을 매개체로 생존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러하니 김후직은 권력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미 김후직의 힘이 김백정을 넘어섰다는 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소인은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이대로 국력을 차츰 키워나가는 것이 전부이지요. 그래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본론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군. 그래. 이번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하하. 서로 좋은 일입니다. 상국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면 소인이 참으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략 100명이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소인의 위치를 충분히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볼수록 보통을 넘어선 인물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한데, 그리하면 본국에 대한 적개심이 커질 것인데 썩 내키지 않는군.”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면 북조 신라는 정치적으로 반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중재하는 김후직의 권한은 커지겠지만 고구려는 얻는 게 많지 않다.
“어떤 경우의 수라고 할지라도 자네만 좋은 일이 아닌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한데, 대인. 고구려군은 소인이 정치적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아직 군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건 아닌가 보군.”
“늘 그렇듯 변수라는 건 존재하는 법입니다. 기습이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소인을 지켜줄 병력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생각해봤는데 고구려군만큼 확실한 병력은 없더군요.”
“본국의 병력을 호위무사로 사용하려고 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네.”
“어떻습니까.”
정치 외교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크지 않다. 그러나 김후직의 말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어차피 모든 건 고구려의 국세에 따라서 북조 신라의 행보가 결정될 것이니 복잡한 정치 외교적 공학을 고려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100명은 적으니 200명 정도 추려서 보내주겠네.”
“큭. 역시 대인이십니다.”
김후직은 정말 기분 좋은 듯 너털웃음까지 터트렸다. 나도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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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직이 떠났더니 이번에는 이계찰이 왔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방문객이었기에 놀랐다. 눈을 여러 번 껌뻑이면서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공식 사신단은 아니고, 밀사도 아닌 것 같구려. 대카간과 본국이 사람을 주고받을 일은 없으니 말이외다.”
“사정이 그리되었소. 남몰래 왕 막리지를 찾아온 것이외다.”
“음. 본국과 귀국 사이에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지도 않소만. 더욱이 비밀리에 나를 찾아왔다는 건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소?”
“실은 그렇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엉망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안 봐도 훤했다. 전쟁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이런 몰골이라는 건 정말 철저하게 개인적인 판단으로 산 넘고 강 건너왔다는 걸 의미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고구려 외교를 복원하려고 했소.”
“일이 다 끝났는데 복원해서 뭐 하오? 본국은 자력으로 장성을 넘었고, 북평까지 점령했소. 지금 돌궐에서 다시 손을 잡자고 한다면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외다.”
“휴. 사정을 들어보시오. 혹시 의연을 아시오?”
의연? 당연히 알다마다.
아마 지금쯤 돌궐에서 최선을 다하여 유학을 알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연이 왜 언급되는지 의아했다.
내 표정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계찰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요승이 일을 다 망쳤소.”
요승?
의연의 행동거지가 요승에 가깝긴 하지만, 돌궐까지 가서 사고를 칠 정도로 눈치가 없거나 아둔하지도 않다. 한데, 이계찰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다.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소만.”
“하. 고구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이계찰의 말에 나는 헛기침을 할 뻔했다. 고구려 유학을 전하러 간 의연이 첩보물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서 내가 처신을 잘못할 수는 없기에 오만상을 찌푸려줬다. 태연하게 있기에는 이미 표정이 흔들렸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오만상을 선택한 것이었다.
“허. 그의 세 치 혀에 돌궐의 대외 정책이 흔들린다는 것이오?”
“그렇소.”
아니, 돌궐의 성현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이런 엄청난 활약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의연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구나.
“내가 오죽하면 홀로 여기까지 달려왔겠소이까. 요승의 세 치 혀가 본국을 망치고 있소이다.”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라도 결과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외다. 즉, 돌궐은 본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겠노라 천명했소. 또한, 돌궐이 본국과의 동맹을 파기한 건 의연과는 무관하지 않소이까.”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소. 하지만, 요승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복원할 수 있었소.”
“음.”
“한데, 그가 고구려에서 요직에 있었던 건 사실이오?”
이쯤 되면 나도 맞장구를 칠 필요가 있었다. 뜻한 바는 아니었으나 의연이 이토록 열심히 하니 도와주는 게 합당했다.
“아니외다. 그는 그냥 승려에 불과하오.”
“지부상소를 입안했다고 들었소만.”
“그것도 아니오. 지부상소는 내가 입안했소.”
“이런!”
이계찰은 화를 참지 못했다.
“왕 막리지. 부디 나를 도와주시오.”
“내가 어찌 도울 수 있소? 병력을 파견하여 의연을 잡아 올 수도 없지 않소이까.”
“고구려에서 그를 죄인으로 선포하여 쇄환하겠다고 나선다면 어떻소이까.”
“허.”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그랬다가 귀국이 응하지 않으면 본국은 체면만 구길 뿐이외다. 그렇다고 지금 정세에 대뜸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소. 허. 설마 양국의 전쟁을 바라오?”
“아, 아니외다. 내가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그렇게 생각되오.”
나는 이계찰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의도가 뭐요?”
다시 말을 보탰다.
“나를 제대로 납득시켜야 할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