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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68화 (168/199)

168화 전선의 구축(2)

168화 전선의 구축(2)

이계찰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몇 번이나 넘어갔다. 긴장감에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여 복잡하게 움직였다.

“가한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이계찰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으나 처라후는 심드렁하게 답변했다.

“가한이 아니면 이 혼란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돌궐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기근이 발생하고 여러 소란이 발생하였으나 백척간두라. 엄살이 참으로 심하시오?”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계찰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대카간의 친동생으로 돌궐의 차기 지존인 처라후조차 날카로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카간이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처라후가 아니면 광풍처럼 몰아치는 혼란을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가한.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요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요설을 내뱉는 승려라면 요승이겠구려. 한데, 요승 한 명을 제압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오셨소?”

“그의 세 치 혀가 참으로 사특하여 쉽게 방비할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는 끝없이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 돌궐의 대외 정책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알다시피 나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했소. 진한 신뢰로 가득한 사이라고 할 수 있소.”

처라후의 짧은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카간의 일에 개입할 마음이 전혀 없구나.’

아사나 섭도와 관계가 틀어졌으나 고구려는 과감하게 처라후와 손을 잡았다. 미래 권력과 미리 돈독한 관계를 수립하여 장기적으로 북방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처라후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개입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승계는 확정적이었고, 최근 여러 일로 감정이 뒤틀렸기에 굳이 무리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가한의 출병도 요승 의연의 계책이었습니다. 그의 요설이 돌궐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결정도 그가 했소?”

“······.”

“나는 공이 왜 이렇게 애를 쓰는지 모르겠소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왜 이렇게 판세를 읽지 못하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카간께서는 방침을 변경하지 않으실 것이오.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했다가 파기하고 수나라와 손을 잡았소. 한데, 다시 고구려에 손을 내민다? 가당치도 않소이다. 그러니 대카간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재의 방침을 고수할 수밖에 없소.”

“······.”

“이때 내가 개입하면 어찌 될 것 같소? 나 역시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되고, 정치적으로 손해를 입게 되오. 이를 정녕 모르시오?”

처라후의 명쾌한 분석을 들은 이계찰은 말문이 막혔다. 상황이 급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나 너무나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요승 의연의 요설과 처라후의 미온적인 대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파가한 대라편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돌궐의 복잡한 정치, 외교 지형을 조기에 정리하지 못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도래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지 말고 공도 확실하게 하는 건 어떻소?”

“설마 가한의 편이 되라는 겁니까?”

“시원시원하니 좋군.”

“어차피 훗날 대카간이 되시면 보필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아. 물론이오. 어찌 지금 공을 나의 가신으로 둘 수 있겠소이까. 대카간께서 용납할 리도 없지요. 나는 공이 내 뜻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오.”

“······.”

“먼 길 오느라 여독이 많이 쌓였을 것이오. 그래서 작게 연회를 준비했으니 편히 즐기시오.”

처라후는 분명한 편의를 제공했다. 이계찰은 잠시 고민하더니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 이대로 간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지금은 편히 쉴 때가 아니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그래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고구려의 심장부, 평양 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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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가한 대라편의 신뢰를 얻고 복귀한 의연은 무언가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애써 확인하지 않아도 그냥 무조건 허전했다. 원인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계찰이 처라후를 만나러 갔다?’

분명한 변수였으나 기회이기도 했다. 의연은 의도적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의아하군요. 굳이 이 시점에 가한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친 고구려 외교를 주장하던 사람이오. 그러니 고구려와 가까운 가한에게 손이라도 내밀러 간 게 아니겠소?”

지근찰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냉소적으로 답변했다. 이계찰과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었다는 걸 바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의연으로서는 참으로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괜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요?”

“대사께서 고민되는 지점이 있소?”

“지금까지 본 그는 괴이할 정도로 고구려 노선을 강조했습니다. 대인 역시 그가 가한을 만나러 간 일이 대 고구려 외교에 대한 불평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시지 않습니까.”

“그렇소. 말이 통하지 않는 그의 외골수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너무 답답하오. 고구려 외교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소. 한데, 본국의 국익을 고려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유심히 살펴야 하오. 오랜 세월 적국인 고구려와 어찌 한배를 타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소이까.”

어느새 지근찰의 어조는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상당히 흥분했는지 언성도 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외다.”

“대인.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의 돌출 행동을 더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나라고 생각이 다르겠소? 하지만, 방법이 없소이다. 방법이.”

지근찰은 답답하다는 듯 토로했으나 어느새 눈빛이 은근하게 변했다. 마치 의연에게 어떤 방법이 있다면 서둘러 말해보라는 것처럼 끈적하기도 했다.

“대인. 소승은 가끔 그가 고구려와 내통하는 게 아닐지 의심이 됩니다.”

이건 예상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그래서 지근찰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돌궐의 주요 인사 중에서 그처럼 맹목적으로 고구려의 편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되돌아보면 과거 밀사의 자격으로 고구려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건 아니겠습니까.”

“음. 확실한 근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소만.”

“소승이 아직은 고구려에 인맥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소?”

“그렇습니다. 고구려에서 가장 유명한 승려이니 적합한 내용을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지근찰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빛났다. 눈엣가시 같던 이계찰을 제압할 방법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탈이 생기면 이를 제안한 의연에게 덮어씌우면 그만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빠져나갈 길도 확실하게 확보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미룰 이유는 없었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어찌 외면할 수 있겠소. 그러면 대사가 가져올 무언가를 기다려보리다.”

“소승을 믿으십시오.”

의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찰을 제거하며 돌궐은 자중지란에 빠질 것이다.’

상황이 너무나도 우호적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그 직후 아파가한이 공세를 펼치면 대카간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돌궐의 몰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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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창의 안색은 어두웠다. 쳐다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는 범인의 영역일 뿐, 귀족들의 눈빛은 싸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사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사옵니다.”

“신들은 폐하께 이 문제를 따져 묻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최근 얼마간 공세적으로 국정을 장악하던 부여창의 모습은 현재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박탈당하여 곤혹스러워하는 비루한 군주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모든 귀족이 반대하는데 기어이 대야성으로 진군하여 5천의 병력만 손해를 보았사옵니다.”

합의를 보지 않고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귀족들로부터 5천여 명의 병력을 차출했다. 하지만, 참담한 패배였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전과는 달리 신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였는데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찌하여 일언반구도 없으시옵니까?”

“······.”

“신들이 그토록 반대했으나 폐하께서는 승리를 장담하셨사옵니다. 억지로 강행하셨사옵니다. 하온데 왜 침묵을 지키시옵니까?”

목리문차는 매서울 정도로 부여창을 궁지로 몰아붙였다.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듣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의지가 보였을 정도로 맹렬한 공세였다.

“신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고 한들 본국의 국세가 더 팽창한 것도 아니었사옵니다. 무리한 원정으로 아까운 병력만 손해를 봤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대체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

“어찌하여 답변조차 하지 않으시옵니까?”

이미 몇 번의 문답을 통하여 부여창이 답할 수 없는 정치적 구조가 구축된 상황인데도 지속하여 답을 요구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옵고 폐하.”

“······.”

“고구려가 북평을 점령했사옵니다.”

“······.”

“폐하께서 동맹을 체결한 수나라가 고구려와 싸워서 크게 패했사옵니다.”

“······.”

부여창의 실책은 전쟁 실패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외교 역시 실패했으니 사상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본국과 수나라의 동맹을 알고 있사옵니다. 신과 밀약을 체결했던 고구려 막리지 고정의가 이 문제를 엄중하게 따져 물었사옵니다.”

“······고구려는 본국의 기벌포를 공격했소. 명확한 적국이었는데 내가 어찌 그들과 손을 잡을 수 있겠소이까.”

부여창 나름대로 항변이라는 걸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정국의 저울추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기울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고구려의 수군은 평양계의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이옵니다. 잊지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신이 과거 고구려 외교를 수행할 때 고정의와 모종의 약조를 했다는 것을 말이옵니다. 그가 이번에 고구려의 국정을 장악했사옵니다. 본국의 기벌포를 타격한 왕고덕을 실각시킨 것이옵니다.”

“하지만······.”

부여창의 힘없는 답변은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의 말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애초 남북으로 나뉜 신라의 상황을 이용하여 본국의 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외교전을 펼치고, 북방도 안정시켰어야 하옵니다. 하온데, 폐하께서는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드셨사옵니다.”

목리문차는 좌우를 돌아봤다.

모든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고구려와 적대해서 본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옵니까? 당장 북방을 약탈하는 무리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

“이 문제를 더 입에 담지 않겠사옵니다. 고구려와 동맹은 체결하겠으니 그리 아시옵소서.”

목리문차는 쐐기를 박았다.

부여창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편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잊지 마시옵소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백제의 국세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옵니다.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감행하거나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외교적 실책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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