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또 다른 개혁(1)
162화 또 다른 개혁(1)
연자유의 표정은 어두웠다. 묻지 않아도 현재 상황을 얼마나 불편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형님. 분란을 일으킬 때가 아닙니다.”
대외 팽창이 가속화되는 이때 내부의 분란은 엄청난 무리수였다. 나라고 하여 어찌 모르겠는가.
특히, 고정의와 대립한다는 건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정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구려 최고의 귀족이었다. 현재 고구려가 일궈낸 영광은 그가 없었다면 절대로 일궈낼 수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의 엄청난 정치, 외교적 수완을 볼 때마다 정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연자유가 가장 우려하는 것 또한 고정의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등을 돌리면 국내계가 일제히 공세를 시작할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평시였다면 만류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고 막리지가 이런 말을 하더군. ‘평시였다면 왕 막리지와 나는 첨예한 대립을 했을 것이오.’라고 말이네.”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한데, 지금은 전시일세. 이대로 강행한다고 하여 탈은 없지. 안 그런가?”
“물론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외부의 위협에 단일 대오를 형성하는 우리의 전통을 깨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쟁에만 국한할 겁니다. 형님. 평소 고 막리지와 국내계 귀족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면 어찌할 겁니까.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연자유는 평소보다 말이 많고, 빨랐다. 다소 붉어진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에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빤히 쳐다보면서 수염을 만지다가 볼도 긁적이면서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결국, 연자유가 버럭버럭했다.
“형님. 왜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아.”
“설마 이 사안을 가볍게 여기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한데,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고구려는 태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지 않은가.”
“대뜸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단기간 국력을 이토록 팽창시킬 수 있었던 건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기 때문일세. 철저하게 제 역량을 강화하려는 귀족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나는 이를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는 걸세.”
“하면, 고 막리지의 의견을 수용해야지요. 아닙니까.”
황당해하는 연자유의 말을 들으며 시원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여유롭게 손가락까지 움직여줬다.
“자네 폐하께서 왜 침묵하고 계신다고 여기는가?”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께서는 응당 왕권 강화를 원하시지. 그러나 작금의 고구려는 왕권 강화 즉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신다네. 그래서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 걸세.”
만일, 수조권 개혁이 성공한다면 고구려의 중앙집권은 엄청난 속도로 탄력받게 된다. 하지만, 잃을 게 많기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했다.
“형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중앙집권을 이루는 것보다 지금의 체계를 유지하는 게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한데, 왜 수조권 개혁을 도모하시는 겁니까.”
“오해하지는 말게. 시작은 순수하게 수조권 개혁을 시도하려고 한 것일세. 한데, 도모하자마자 각층에서 저항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네.”
“예······?”
“장점만을 취하면 좋지 않겠나?”
혼란스러워하는 연자유를 지그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켜보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까.”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뭔가.”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겁니까?”
“아. 폐하께서도 수조권 개혁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계신다네.”
“······잊으셨습니까? 평양계는 근왕파입니다.”
“평양계도 손을 떼게. 이건 내가 홀로 할 일이니까.”
“형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물러나게. 괜히 여기 있다가는 자네까지 화가 미칠지도 모르니까.”
“······.”
나는 정말로 홀로 이번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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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는 낮게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설마 왕고덕이 수조권 개혁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구나. 고구려를 둘러싼 정세가 엄중한데 내부의 분란을 유도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그간 경험한 왕고덕이 가장 중시하는 건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백 번을 생각해도 왕고덕의 심리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이번 사안은 양보할 줄 알았다. 한데,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수조권 개혁을 공식화하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표출하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선호할지라도 모든 건 때가 있는 것이거늘.’
물론, 이번에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면 왕권 강화 혹은 중앙집권의 구축은 더 어려워진다는 걸 왕고덕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왕권 강화라는 건 결국 귀족의 힘을 제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평의 토지를 식읍으로 귀족을 왕실이 어찌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왕고덕이 지금 정면으로 돌격하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지 않은가.
현재 국내계 귀족만이 아니라 평양계 귀족의 여론도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일부러 귀족을 자극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인데.’
길게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왕고덕이 이렇게 무모하게 수조권 개혁을 도모할 리가 없었다. 분명 어떤 노림수가 있는 것인데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인. 이제 장고를 끝내셔야 합니다.”
한숨을 쉬며 등을 돌리자 십 수명의 귀족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고정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상당한 진통이 발생할 것이네. 이를 각오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사병은 어찌하고 있나?”
“외부의 공세를 막아내는 건 지장이 없도록 할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무리 내부의 다툼이 치열해도 변방의 방비가 흔들려서는 곤란하니 말일세.”
무엇보다 현재 고구려는 국경의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을 시 요동까지 흔들릴 정도로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아무리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펼치더라도 요동이 위태롭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는 귀족이 이러할 줄 알고 왕 대인이 강공을 펼친다는 생각을 들기도 합니다.”
“아닐세. 귀족들의 사병이 대외 팽창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왕 막리지가 놓치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될 것이니 오히려 압박하기가 좋을 것이네.”
고정의 역시 이번 다툼이 모처럼 비상하는 고구려의 국세에 지장을 끼치지 않도록 세밀하게 준비했다.
“모두 내 말을 새기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전은 불가하네. 절대로 무력으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명심하게. 알겠나?”
“물론입니다. 소인들 역시 고구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겁니다.”
그간 왕고덕의 개혁이 엄청난 과실을 안겨줬다는 걸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또한, 이번 갈등의 원인이 된 수조권 개혁 역시 북평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무리한 분열로 북평을 상실하기라도 한다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이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매한 이들은 없었다.
물론
“하지만, 이를 제대로 막지 않으면 차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반대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고정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말을 이었다.
“대인. 국경의 철수까지 고려하면서 압박해야 합니다.”
귀족 중에서는 이번 수조권 개혁이 지금껏 이어진 고구려 귀족의 기득권을 완벽하게 흔들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아무리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하게 될지라도 취하게 되는 건 귀족의 해체라면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정의라고 할지라도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를 제압한다는 건 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휴. 이렇게 평양계와 다시 대립할 줄은 몰랐군. 아니, 평양계 귀족의 다수도 우리와 의견을 함께하고 있으니 왕 막리지와 대립하는 것인가?”
되돌아보면 왕고덕과 참으로 합이 잘 맞았다. 이번에 수조권 개혁을 관계가 틀어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쉬웠다. 고정의는 쓰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시작하게.”
“예. 대인.”
귀족들은 일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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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 역시 고구려가 흔들리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사병을 동원하여 내전을 일으키거나, 변방의 방비를 위태롭게 하는 방법은 동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고구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수를 동원했다.
“대인. 귀족들이 그간 집행된 모든 개혁의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런가?”
태연하게 답변하면서 쳐다봤더니 이문진은 표정은 참으로 어두웠다.
“농업 개혁을 보급하며 협상안으로 제시되었던 조세 제도도 모두 철회되었습니다.”
고정의가 시도한 건 개혁의 무력화였다. 애초 귀족의 전폭적인 협조로 가능했던 것이었기에 그들이 돌아서면 일제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팽창을 철저하게 귀족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개혁의 무력화라는 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는 게 아니었다. 지금껏 진행된 과실의 분배만 없어지는 것이다.
농업 개혁이라는 건 결국, 귀족이 성과를 조정에 조세를 바치면서 성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한데, 이를 하지 않겠다는 건 모든 과실을 귀족이 취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이대로라면 귀족의 힘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질 것이다.
“지금껏 고구려는 아니, 개혁 이후 고구려는 왕실과 귀족이 존재를 인정하며 힘을 적절하게 나누었네. 한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게 확실히 보이지 않나? 자신들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모든 게 가능했다는 걸 과시하고 있으니 말일세.”
정말이었다.
농업 개혁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농법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 점차 귀족의 힘은 점차 거대해질 것이고 왕실은 위축된다. 그들의 사병은 국방을 책임지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시간이 더 흐르면 북평의 토지도 귀족이 알아서 확보할 수밖에 없다. 힘이 있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정의가 나를 찾아왔던 건 정치적 합의를 일궈내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이런 과격한 방법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대인. 틀린 사실도 아닙니다.”
“해서?”
“수조권 개혁은 시기상조였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들과 협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보게. 자네는 틀렸네. 아니, 그들도 틀린 걸세.”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이문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언급해주기로 했다.
“혹시 수조권과 관련한 왕명을 들은 적이 있나?”
“그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면, 수조권 개혁이 천명된 적은 있나?”
“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대인께서 이를 강행하겠노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니 반발이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하는 말일세. 그게 틀렸다는 거지.”
“예······?”
“아무것도 바뀐 건 없네. 단지, 그들이 조세를 거부한 것이지.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