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수조권과 관료제(2)
161화 수조권과 관료제(2)
지금껏 경험하지 가장 큰 저항이라고 했다. 표현부터 상당히 거창한 서론이었다. 더욱이 불쾌함까지 자아냈다. 나는 고식을 지그시 바라보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확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네. 어찌하여 수조권의 도입이 거대한 반대와 만날 것이라는 건가?”
“대의와 이권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상 초유의 사안이기 때문이지요.”
무릇 대의를 품은 개혁이 늘 어려운 건 귀족의 이권을 잘라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귀족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니 승산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귀족의 기득권은 거대하지만 이를 대놓고 표출하는 건 어려웠다. 늘 그렇듯 기득권의 사수라는 건 대의와는 무관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하나로 일치한다는 건 사실상 존재할 수가 없다. 무조건 충돌하는 것이 법칙이었다.
하지만, 지금 고식의 말은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즉, 수조권의 집행은 대의와 이권을 모두 가진 반대를 도출한다는 것이니 화가 나기도 전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수조권은 땅이 아니라 조세를 징수할 권한을 주는 것입니다. 관리에게 이 권한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까. 한데, 말입니다. 관리에게 조세를 바치는 이들은 노비나 누군가의 사적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한데, 이 명제가 흔들리게 됩니다. 수조권을 가진 관리는 더 많은 곡식을 확보하고자 백성을 압박할 것이니 말입니다.”
“······.”
“다시 말해야 합니까? 그 백성들은 누군가로부터 생산력을 더 확보하라고 압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수조권은 이를 가능하게 할 아예 새로운 개념을 창조시키는 겁니다.”
즉, 관리가 더 많은 이권을 확보하고자 백성을 밤낮으로 괴롭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수조권은 아무런 비용도 사용하지 않고 백성을 노비처럼 부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이를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대의의 영역입니다.”
여기까지 들어도 귀족의 이권은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껏 막대한 비용으로 노비의 생계를 책임지며 부를 확보한 귀족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권한이지요. 그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할 겁니다. 이는 이권의 영역입니다.”
귀족은 엄청난 수의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의식주를 모두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조권은 이 개념을 아예 무너뜨린다. 귀족들이 이를 그냥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었다.
“대형. 지금껏 귀족들은 상당한 양보를 했습니다. 한데, 이 모든 걸 오직 대의만을 바라본 결과라고 여기십니까?”
“······.”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되기에 그저 환호하며 달려왔다고 여기십니까?”
“······.”
만일, 그렇다면 좋겠으나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귀족들이 고구려의 영광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 오랜 세월 내전을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 지금껏 나 역시 귀족의 전폭적인 협조가 오직 선의와 충정이라고만 여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관료제를 시급히 도입하고자 한 것이었다.
“귀족이 여러 개혁에 협조한 본질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이권의 확대와 직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농업 개혁과 남방 진출, 북방의 패권 그리고 서토 정벌까지 모두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수조권은 아닙니다. 이는 그들의 욕망을 충동질하는 결과로 귀결될 뿐입니다.”
고식의 신랄한 말은 나의 말문을 막았다. 차후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마땅한 반론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귀족은 늘 백성을 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백성이 몰락은 우습게도 귀족의 이권을 확대했다. 괜히 왕실이 이를 막고자 진대법과 같은 제도를 도입한 게 아니었다.
“고구려의 귀족이 백성과 가깝고 친근하다고 하여 가문의 이권을 버리는 건 아닙니다.”
“······.”
“대형. 수조권을 이대로 강행하신다면 상당한 진통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 정세가 이토록 급박하게 진행되는데 내부의 진통은 좋지 않습니다.”
고식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수조권은 철회하는 게 옳습니다.”
대안은 없었다. 절대적인 명분을 가진 반대가 내 앞에 등장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양성의 미지근한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한 것이었다. 또한, 나의 의도를 의심한 것도 같은 영역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는 나의 의도를 살핀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고양성은 내가 수조권을 통하여 지금껏 없었던 백성의 사적 지배를 구축하고자 한다고 짧게나마 의심한 것이었다.
설령 이 의심을 거두었다고 한들 고양성으로서는 관리들이 수조권을 명분으로 백성을 압박하는 걸 원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게 사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나는 왕실과 귀족,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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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식의 말대로 귀족의 반발은 강렬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그들이 집단행동을 한 건 아니었으나 심각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존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고정의였다.
평양계의 대척적인 국내계의 수장이었으나 지금껏 모든 개혁에 협조적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나와의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큰 위기며 문제가 분명했다.
나의 복잡한 표정을 읽은 고정의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 막리지도 알 것이오. 지금껏 귀족들은 많은 양보를 했소. 그러나 수조권의 도입은 그들의 거센 저항을 일으킬 수밖에 없소. 나 역시 이를 우려하고 있소.”
“다른 말을 더 듣기 전에 정확하게 물어야겠소.”
지금 중요한 건 고정의의 정확한 의도였다. 대답에 따라서 상황은 아예 달라질 것이니 말이다.
“고 막리지는 귀족들의 불만을 내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오? 아니면, 스스로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오?”
“나 역시 반대하오.”
“······지독하게 외로운 싸움이 예상되는구려.”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오?”
“그렇소.”
“고심 끝에 나온 방안이라는 걸 어찌 모르겠소이까. 그러나 이대로 강행한다면 내분을 유발할 뿐이외다.”
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는 고정의와 고식의 말대로 고구려 귀족의 거센 반발을 일으킬지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집을 보인 것이다.
고정의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다.
“단지 영토의 개념으로만 바라볼 때 작금의 고구려는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세력을 구축했소. 외부의 도전이 심대하다는 걸 인정할지라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외다. 고구려의 황금기가 다시 도래하는데 구태여 내분의 분열을 초래할 필요가 있소?”
“분열이 일어나면 위기에 봉착하오. 한데, 관리를 제대로 담보하지 못하면 통치에 문제가 생기게 되오. 농업, 광업 그리고 의술 등 새롭게 시작된 모든 영역이 통치를 관리들이 하고 있소. 귀족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외다. 심지어 지금껏 문제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순탄하오. 해서, 묻겠소. 작금의 고구려에서 무엇이 더 위기로 작용할 것 같소?”
“관리들을 담보할 방법은 수조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소.”
“무엇이오? 식읍이라도 나누자는 것이오? 아니, 이 방책을 사용하면 귀족들이 동의는 하겠소? 수백 년간 이어진 혈통과 가문의 막강한 사병도 없이 시험만 치른 관리가 식읍을 가진다고 하면 더 크게 반발할 것이오. 이는 그들의 자부심과 직결할 것이니 말이외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녹봉으로 지급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오. 왜? 처라후를 지원하고, 서토와 북방 그리고 남방까지 3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하기에 군량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니 말이오.”
“······.”
“지금 수조권을 도입하지 않으면 과거 시험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될 상황이오. 그런데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확충하지 않으면 고구려의 기층은 누가 통치하오? 설마 귀족이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은 넣어주시오.”
과거 시험으로 관리가 된 이들의 역할을 귀족은 절대로 할 수 없다. 이들은 자의적 잣대로 백성을 통치하는 게 아니었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내용으로 땅과 백성을 관할하는 것이었다. 관료제를 괜히 관료제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오랜 세월 귀족이라는 신분으로 인위적 통치를 해온 귀족이 이를 해낼 수는 없다. 그들이 관리의 일을 대신하는 순간 그 땅은 귀족의 또 다른 영지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고 막리지. 수조권을 철회하고 이번은 귀족들에게 양보하라고 하셨소.”
“그렇소.”
“이 또한 의아하오. 양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오? 수조권을 백지화하면 현상의 유지인데 대체 어찌 양보라고 말하는 것이오?”
이건 본질적인 의문이었다.
그러니까
“속내를 정확하게 꺼내시오.”
고정의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단지 수조권의 철회를 두고 양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협상안이 있소.”
“들어보리다.”
“수조권은 집행되어야 하오.”
“수조권을 집행하게 할 정도로 귀족의 구미를 당기는 일이라.”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정의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번에 확보한 북평의 농지를 귀족에게 나누라는 것이구려.”
“그렇소.”
고식은 귀족의 반발이 생길 정책을 아예 제거하고자 했다. 지금의 흐름이 이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 고정의는 이를 빌미로 요구를 해왔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허. 천하의 정세가 이토록 어지러운데 벌써 과실을 요구하다니. 참으로 대단하오.”
“지금껏 전폭적인 협조를 한 귀족들로서는 너무나도 정당한 요구라고 할 수 있소.”
“······.”
“왕 막리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껏 고구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공로라는 걸 절대 부정할 수 없소. 그럴 수는 없소.”
“······.”
“공이 왕권 강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건 알고 있소. 그 넓은 땅을 왕실이 확보하여 수조권을 집행한다면 고구려의 관료제는 완성될 것이외다. 그러나 현재 고구려를 주도하는 세력은 귀족이라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오.”
“지금 언급되는 귀족이라는 무리에 고 막리지도 포함되오?”
“무의미한 물음이오. 왕 막리지 부를 축적하고 사병을 확대하지 않소이까. 왜? 뒤처지는 순간 평양계의 수장일 수가 없으니 말이오.”
우문현답이긴 했다.
나 역시 다른 귀족이 힘을 키우는 이상으로 가문의 세력을 강화했다. 내가 도태되는 순간 고구려의 개혁은 무너질 것이니 말이다.
바꿔 말해서 고정의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어차피 의미가 없다. 국내계 귀족이 북평 일대의 옥토를 확보할 때 홀로 빠지면 국내계의 수장이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의 영광을 바라오. 그러나 국내계의 수장으로 해야 할 일을 저버릴 수도 없소.”
“뭐. 이해하오. 고 막리지가 아니면 국내계가 어디로 튈지도 모르니 말이오.”
물론, 고정의와 수조권의 일은 별개로 평가하는 게 옳다. 그래서 말했다.
“때가 되면 과실을 나눌 것이오. 한데, 지금은 아니오.”
나는 수조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북평의 옥토를 지금 배분할 생각은 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