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오해와 착각
147화 오해와 착각
처라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어려운 사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차기 지존으로서 언제든지 힘을 보태어 난관을 함께 극복할 의지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저열한 방법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돌궐의 외곽을 지탱하는 박고와 동흘라가 반기를 들었다. 제압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데, 이를 모두 내게 맡기는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명분도 참으로 불쾌했다.
고구려가 보낸 물자로 군량을 대체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고구려가 5만 석의 쌀을 지원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큰 기근이 발생한 시기였기에 한 톨도 아끼지 않고 민심을 다독이는 데 사용해야 했다. 또한, 5만 석이 절대 부족한 수량은 아니었으나 겨우 숨을 돌릴 정도였다.
한데, 이를 모두 군량으로 사용하라고 하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엄밀히 따질 때 박고와 동흘라가 반기를 든 것도 결국은 아사나 섭도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
물론, 처라후가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돌궐의 차기 지존으로서 불평불만을 토로하여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건 절대 옳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도 크게 속이 상할 수밖에 없으나 애써 웃으며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하니 조만간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게 될 것이다.
“하면, 소인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대뜸 들린 목소리에 처라후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물자를 운송해온 고구려의 관리들이었다. 그들과 자리를 만들었는데 딴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응대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분명한 결례였기에 황급히 말을 보탰다.
“아니외다. 먼 길을 왔는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요. 며칠 머물면서 여독을 푸는 게 어떻겠소이까.”
“아닙니다. 소인들은 본국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관리들은 완강했다. 처라후는 아쉬웠으나 더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요. 한데, 내가 물어볼 게 있소.”
“소인들이 아는 내용이라면 답하겠습니다.”
“고구려는 본국과 관계가 틀어졌다고 들었소. 한데, 이번에 나를 이리도 지원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송구합니다. 소인들은 거기까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고구려의 외교 방침에 관여할 위치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상기한 처라후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어떤 이유라도 내가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 고구려의 의도가 음흉할지라도 쌀 5만 석을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빌어서라도 받아야 할 상황이 아니었던가.
“다음에 올 때는 귀동냥이라도 해서 오겠습니다.”
“······다음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조만간 2차 지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처라후의 눈이 커졌다.
‘한 번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참으로 감격했소. 고구려의 의리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외다.”
훈풍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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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일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수나라 사신에게 운을 던진 적이 있었다. 상당한 헛소리였기에 효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이토록 열렬하게 반응해올 줄은 전혀 몰랐다.
“이는 참으로 위대한 결정이셨소.”
심지어 사신단의 정사로 온 장손람은 상당한 거물이었다. 단순하게 비교할 때 연자유나 고식급의 인사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까 수나라 조정은 내가 던진 덫이 아닌 덫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동방의 패권을 우리에게 허락한다는 것이오?”
“그렇소. 고구려는 황은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외다.”
오만하긴 정말 오만했다.
그나저나 이 상황이 참으로 묘했다. 장손람은 아군이 북평을 점령한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절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어차피 북평 점령 사실을 알게 되면 전면전이 발생할 건데 여기서 더 떠드는 건 입만 아플 뿐이었다. 차라리 사실을 전하고 휴전 협정을 체결하는 게 생산적이었다.
“우리 폐하께서 과거의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하셨소.”
“······.”
“또한······.”
장황하게 말하는데 별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 끝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문뜩 흥미로운 상상이 시작됐다.
어차피 어떤 결과가 나와도 상관이 없다. 세상은 이미 잘 굴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운을 던졌다.
“나 역시 참으로 안타깝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폐하께서 황은을 내리셨는데 안타깝다니요?”
장손람이 미간을 잘게 찌푸리자 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온몸으로 안타까움을 표출하는 극한의 연기력을 보인 것이다.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 같구려. 아군이 북평을 점령했소.”
“뭐, 뭐요?!”
장손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충격과 공포가 그를 완벽하게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를 진정시켰고 겨우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알다시피 본국은 참으로 긴 세월 내전을 겪었소.”
“어찌 모르겠소. 한데, 최근 고구려는 내전에서 벗어난 것 같소만.”
“수백 년의 갈등이외다. 어찌 단번에 해결될 수 있겠소이까. 아니,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오. 설마 이를 모르시오?”
“원래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싫은 법이긴 하오.”
의외로 장손람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이러면 사람이 흥이 동할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리다. 내가 패배했소.”
“뭐요······?”
지금부터 필요한 건 절륜한 연기력이었다.
그냥 던지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수나라를 제대로 낚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현재 막리지가 공석이외다.”
“그렇다고 들었소.”
“하. 그 자리를 고정의가 차지하게 생겼소. 보시오. 내가 화가 나지 않겠소? 정말로 너무나도 화가 나오.”
장손람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 왔다.
이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다.
나는 감정을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하. 우리 폐하께서도 그렇소. 그동안 우리 평양계가 근왕파로서 그토록 애를 썼는데 과실은 국내계가 가져가게 생겼소. 정치적 신의가 이럴 수는 없소.”
“허. 그건 참으로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공의 마음이 참으로 안 좋겠소이다.”
“마음만 안 좋겠소? 몸도 안 좋아지는 것 같소.”
“이런.”
“참으로 오랜 세월 우리가 강경파였고, 그들이 온건파였소.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외다.”
“하지만 고정의가 서진을 꾀했다고 하셨소. 말이 다르지 않소이까.”
“일단 들어보시오. 내가 감정이 격해져서 횡설수설하는 것이외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계속 내뱉었다.
이게 하다 보니까 제대로 몰입이 되는지라 사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오직 남진이었소. 하여, 거란족과 말갈족 그리고 고막해족까지 한수로 이주시킨 것이었소. 그런 뒤 남진을 도모하여 동방의 평화를 꾀하려고 했으나 고정의가 일을 그르쳤소.”
“일전에 귀공이 우리 사신단을 겁박했다고 들었소만.”
“원래 처음에는 기 싸움을 하는 것이외다. 수나라는 역사가 짧아서 모르지만, 우리는 천년이라서 잘 아오.”
“······.”
“아. 이게 중요한 건 아니외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의 혼을 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나는 평화롭게 약탈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려고 했소.”
“······.”
“한데, 고정의가 다 망쳤소.”
만악의 근원은 고정의였다.
“북평 점령도 마찬가지였소. 애초 밀약을 체결했는데 북평 태수가 어겼소.”
“밀약이라고 하셨소?”
대략적인 내용을 알려주자 장손람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중에 곱씹으면서 의심할 수는 있으나 지금은 확실히 믿는 눈치였다. 그만큼 나의 연기력은 절륜했다.
“어쨌든 약조가 깨진 건 깨진 건데, 국내계가 빈틈을 파고들어서 북평을 점령한 것이외다. 이것이 이번 사안의 전부이자 핵심이오. 다른 건 없소.”
“······.”
“어떻소?”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공과 벗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소만.”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벗이 될 수 있소.”
나는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북평을 원래대로 돌려놔야지요.”
“공이 도와줄 수 있소?”
“물론이오. 하지만, 나도 명분이 필요하오.”
“그 명분, 내가 만들어주리다.”
“참으로 좋소.”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되돌아보면 이미 천하는 변화하고 있었다.
전처럼 돌궐과 손을 잡고 수나라를 격멸할 시기가 아니었다. 정교한 외교가 필요한 시기였다.
나는 오늘 이를 정확하게 집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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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는 분주했다. 보기에 따라서 전운이 감돈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수나라 사신단이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수모는 잊지 않을 것이오.”
사신단의 정사 소위의 언행이 참으로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답변하는 사람은
“허.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강이식이었다.
“하! 일국의 사신단을 감금했소.”
“애초 허락도 없이 본국의 바다를 통행한 공의 잘못을 탓하시오.”
“뭐, 뭐요?”
“그리고 말은 제대로 하시오. 감금이 아니라 보호였소. 우리가 언제 귀공과 사신단에 해를 끼쳤소?”
강이식의 목소리는 참으로 딱딱했다.
아니, 행동도 자로 잰 듯 획일적이었다.
그 모습이 소위의 심기를 너무나도 자극했다.
“본국과 적대적인 백제로 가는 사신단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호했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소위는 황당했다.
정말로 황당했다.
강이식의 말에서 틀린 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나를 고구려의 인질로 삼지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었다.
“그나저나 난 이만 물러가리다. 본국의 수군이 여기까지 오니 백제가 떠들썩하니 말이외다.”
“······.”
그 말을 끝으로 강이식은 물러났다.
소위의 눈동자에는 혼란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길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곧장 대백제 외교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수군과 함께 왔소. 이를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하오?”
아니나 다를까 백제의 반응은 날카로웠다.
심지어 사비도성에 당도하기는커녕 기벌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목리문차는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소위는 고소를 삼켰다.
‘상황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의심하는구나.’
하지만, 목표한 바가 있기에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다.
“나 역시 저들의 의도를 알 수 없소.”
“말씀을 정확하게 해주셔야 하오. 이곳 기벌포가 엉망이 된 건 얼마 전 고구려 수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말이외다.”
“뭐요······?”
그렇지 않아도 기벌포가 폐허처럼 된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런 놀라운 사정이 있었다.
“묻지요. 수나라와 고구려가 우리 백제를 압박하는 것이오?”
최악의 오해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