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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43화 (143/199)

143화 무너지는 만리장성(2)

143화 무너지는 만리장성(2)

북평 태수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에서는 진땀이 잔뜩 흘렀다.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목울대로 쉬지 않고 넘어가는 마른침은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자리에 이르렀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한 가지, 바로 결과였다.

과정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오직 결과, 두 글자가 담아낼 현상에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것이 좌우될 것이기에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때 황급히 달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부관이 보였다. 그의 입이 움직이기 직전, 북평 태수의 뇌리로는 을지문덕과 나눈 대화가 스쳤다.

*****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칼을 꺼내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은 일단 웃어야 했다. 속에 치솟는 여러 감정을 앞세울 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북평 태수는 웃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은 대화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 할 때였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라는 뜻이오?”

“그렇소.”

“그걸 말이라고······.”

“변방의 법도가 다 이런 게 아니겠소?”

태연하게 변방의 법도를 운운하는 사람은 을지문덕이었다.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다.

“적당하게 약탈하고 물러날 것이외다. 굳이 유혈 충돌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소?”

을지문덕의 요구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조만간 약탈을 감행할 것인데 묵인하라는 것이었다.

‘어찌 이토록 뻔뻔할 수가 있는가. 지금껏 이런 경우가 있었단 말인가.’

다시 곱씹어도 어이가 없었다.

북평 태수는 목울대로 무언가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은밀한 만남을 청하기에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여 나왔을 뿐이외다. 나는 수나라의 관리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내용이오. 듣지 못한 걸로 하겠소.”

“들었는데 어찌 듣지 못한 게 되겠소?”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않소이까.”

“설마 벌써 잊은 것이오? 머지않아 아군이 장성을 넘어 약탈을 감행할 것이오. 우리의 정보를 이미 들었으니 방비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오? 한데, 무엇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오?”

“그,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하. 됐소.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소이다.”

북평 태수가 결국, 대화의 종결을 선언했다. 그런데도 을지문덕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본국의 부마께서도 오셨소.”

“뭐요······?”

북평에서 수만의 대군을 격멸한 고구려의 부마 온달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에도 대승을 거두고 유유히 퇴각하는 온달을 쳐다만 봤었다.

“부마께서 오셨다는 건 큰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의 의지를 전하고 적당하게 성과만 낼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요.”

“······.”

“태수께서 협조하지 않으시면 전력을 다해서 약탈할 수밖에 없소.”

“본심이 무엇이오?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앞으로도 좋은 협력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외다. 그리만 된다면 아군은 늘 태수의 반격에 퇴각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있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변방을 책임일 수 없다. 즉, 일시적으로 약탈을 허용한다면 군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북평 태수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을지문덕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만일, 동의한다면 가끔은 장성 이북에서 격퇴되어 줄 수도 있소. 약탈을 아예 막아내는 것이외다. 어떻소?”

참으로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북평 태수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한 마디를 꺼냈다.

“약탈의 규모가 크지 않아야 할 것이외다.”

“어차피 신뢰를 기반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하오. 태수가 약조를 어기면 우리는 매복에 당할 것이고, 우리가 약조를 어기면 태수의 처지가 곤란해지겠지요. 이토록 대화가 통하기도 쉽지 않소. 한데, 어찌 우리가 무리한 행동을 하겠소이까.”

북평 태수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고구려군의 약탈을 효과적으로 방비할 방법은 우리에게 없다. 황도에서 대군이 오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심지어 부마 온달까지 왔다고 하니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가 이끄는 기병의 말발굽이 어디까지 뻗을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먼저 진군로를 알게 된다. 고구려가 먼저 신뢰를 손을 내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고구려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요?”

“2천여 명입니다.”

“······.”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다.

과거의 대승을 각인시키기 위한 수치였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을지문덕이 조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부마께서 오셨는데 구색은 갖춰야지요.”

“알겠소. 한데, 북평 이남의 성들은 어찌 되오?”

“우리는 태수 한 명과 대화하는 걸로 충분하오.”

이러하면 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손해 볼 게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전 태수께 대승을 안겨주겠소”

더욱 달콤한 말이 들렸다.

이러면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그리고

“마지막 대승은 우리 부마를 격퇴하게 해드리겠소.”

최고의 선물도 약조되었다.

*****

북평 태수는 어느새 시작된 소란으로 인하여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소란스러웠다. 이는 소음이 발생하여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공기가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부관의 입으로 향했다.

먼저 묻지 않았다.

듣고자 할 뿐이었다.

“대인!”

드디어 그의 입에서 언어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대승입니다!”

신뢰가 구축되었다.

북평 태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일이 확실하게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적은 완벽하게 물러났는가.”

“그렇습니다.”

확인까지 끝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고구려군이 진군을 시작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말했다.

“고구려는 집요한 나라다. 언제 다시 약탈을 감행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소장 역시 저들이 이대로 물러날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북평 태수는 미간을 잔뜩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매번 언제 올지 모르는 소수의 적과 싸우느라 기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시, 묘안이 있습니까.”

“약간의 피해를 볼 수는 있겠으나 남하하게 한 뒤 일거에 소탕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위험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애초 약탈을 주된 목적으로 한 고구려군을 상대할 때는 적합한 방책이기도 했다.

“확실하게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다.”

북평 태수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나의 신묘한 계책이 북방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정보가 있었고, 밀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이렇듯 북평 태수는 애초 고구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명백한 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을지문덕과 나눈 밀약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공을 나누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세울 수 있는 공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부마를 죽일 수 있다.’

온달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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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 태수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미 남하한 고구려군의 수가 현재 1천을 넘었다. 하면, 머지않아서 온달이 등장할 것이다.

북평 태수는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수만의 대군이 장성을 넘어 약탈을 감행했던 때도 있었네. 당시와 비교하면 1천여 명은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네.”

“그렇긴 합니다만 이대로 방치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려스러운 말이 들렸으나 북평 태수는 고개를 저으며 사전에 차단했다.

“잊지 말게. 우리는 적이 회군할 때 일망타진할 것이네. 약탈한 물자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일세.”

“알겠습니다.”

“대인!”

막 모습을 보인 부관이 외치듯 말했다.

“적군이 다시 남하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긴장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여유를 보이던 북평 태수는 의아하여 곧장 물었다.

“규모는 어찌 되는가?”

“5백 명입니다.”

“5백······?”

1천 명이 아니었다.

큰 틀에서는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는 분명한 변수였기에 북평 태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고구려의 부마의 깃발이 보였습니다.”

의혹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리고

“······.”

“······.”

“······.”

“······.”

부관들의 무거운 침묵이 시작됐다.

북평 태수는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수만의 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온달의 이름이 거론되었기에 두려운 것이었다. 곤혹스러움도 느껴졌다.

평소라면 북평 태수 역시 같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는 바꿔 말해서

“출병 준비를 하게.”

고구려군은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북평 태수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구려의 부마가 북평성을 우회하여 남하하면 즉각 돌격한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네.”

“대, 대인. 돌격이라고 하셨습니까?”

“물론일세.”

“다른 수를 찾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섣불리 돌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만 커질 겁니다.”

“허. 자네들은 어찌 소국의 부마를 이토록 두려워하나?”

“그게 아니라······.”

“되었네. 내가 작전을 이를 것이네. 나를 믿고 따르게. 적은 소수일세. 먼저 남하한 무리와 결합해도 2천에 불과하네.”

자신만만한 태수의 말에 부관들은 더 나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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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했다.

사람에게 꿈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기에 해몽학이 발전할 정도였다.

이중 악몽이 있다.

악몽은 모든 이가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는 막연하게 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만일 악몽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이라면 그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것이며, 피가 따가워지고, 심장이 울렁이게 된다.

그러하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한데, 악몽은 사람에게만 국한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이 만든 거대한 집단의 기록인 역사에도 악몽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지금보다는 오래전이었다.

늘 좋은 꿈을 꾸지는 못했으나 악몽을 경험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언급하였듯 악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회피할 방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그 방책을 바로 만리장성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위대한 장성이었다.

아니,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악몽을 막아낼 수 없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강대의 외세의 대대적인 공세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무려 수백 년간 만리장성의 이남은 악몽에 휩싸이게 되었다. 누구나 마음을 먹으면 마음껏 넘어설 수 있었기에 악몽은 참으로 긴 세월 이어졌다.

하지만, 북위 이래 천하의 절반이 안정되면서 만리장성의 평화는 제법 이어졌다.

그러나

“이, 이럴 수가······.”

지금

“대,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다시 악몽이 시작됐다.

북평성 태수의 목소리는 격하게 흔들렸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고구려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인가.”

북평성이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문제는 북평성을 지키는 병력이 수백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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