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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42화 (142/199)
  • 142화 무너지는 만리장성(1)

    142화 무너지는 만리장성(1)

    이계찰의 안색은 처참할 정도로 무너졌다. 아니,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휘둘러서 사지를 자르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에 휩싸여 일을 그르칠 수는 없기에 온 힘을 다해서 참아냈다. 또, 이를 꽉 악물며 의연을 노려봤다.

    “내게 해명이라는 걸 해야 할 것이외다.”

    “허. 해명이라니요? 소승은 해명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더는 나를 자극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자욱한 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의연은 태연하게 오른손 검지로 볼을 몇 번이나 긁적이면서 말했다.

    “소승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해명하라고 했소. 더는 말하지 않겠소.”

    “이런. 그렇지 않아도 당장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칼을 좀 내려놓으시지요.”

    “······.”

    “하하하······.”

    칼을 꽉 쥐고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이계찰은 참으로 위협적이었다.

    의연은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의도는 없습니다. 모두 소승의 생각입니다.”

    “하. 고구려가 돌궐의 분열을 꾀한다는 게 대사의 생각이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작은 거짓도 없습니다.”

    “하!”

    “이런!”

    이계찰의 손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자 의연은 최선을 다해서 말했다.

    “고정하시지요. 음. 우선 그 칼을 먼저 놓으셔야 진솔한 대화가 더 진하게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소승은 심장이 벌렁거려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습니다.”

    “똑바로 대답하시오.”

    “물론입니다.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나를 배신한 것이오?”

    “소승이 어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한데······.”

    “생각해보십시오. 소승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왜 거짓으로 하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으니 또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의연이 일부러 제 나라인 고구려를 헐뜯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머릿속이 차가워진 이계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면, 대사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오?”

    “고구려 조정의 속내를 어찌 모두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소승이 볼 때 돌궐의 분열을 꾀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고구려가 그리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동맹이 결렬되었습니다. 한데, 왜 그토록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겠습니까.”

    “······.”

    “결국, 돌궐을 분열시키기 위한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구려가 다시 우리와 손을 잡고자 애를 쓴다고 생각하오만.”

    “그러면 대카간께 공물을 바쳐야지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참으로 적기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대인의 말씀대로 고구려가 대카간과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뭐 하러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겠습니까.”

    일목요연한 의연의 말에 이계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만큼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는데, 이는 그 역시 고구려의 행보가 괴이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인. 고구려는 필시 돌궐을 분열시키고자 나선 것입니다. 소승은 이를 정확하게 볼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믿어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면, 대사는 대체 이 사실을 왜 돌궐에 전하는 것이오?”

    “소승은 그저 불자로서······.”

    “내 말에 똑바로 답하시오.”

    칼이 다시 슬쩍 움직이자 의연은 자라목을 하며 말했다.

    “소승은 불자이지만 입신양명을 꿈꾸고 있지요. 한데, 고구려에서는 소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늘 궂은 일만 도맡아 할 뿐 관직을 내리지 않으니 어찌 속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허. 불자가 출사를 원하오?”

    “소승은 원래 유생이었습니다. 한데, 막리지 왕고덕의 강권으로 승려가 되었을 뿐이지요. 아직도 소승의 심장은 공자를 향한 강렬한 연모를 보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유학을 책임졌다고 들었소. 이는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소?”

    “그리되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하라는데 어찌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지요.”

    “무슨 말이오?”

    “아니, 소승에게 글을 배운 이들은 과거 시험을 치르고 관리가 됐습니다. 한데, 소승의 처지는 바뀐 게 없으니 어찌 속이 상하지 않겠습니까.”

    이계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구려의 중추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지부상소의 설계자가 어찌 변방에 위치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십시오. 소승이 제대로 대우받았으면 평양에서 호의호식하지요. 어찌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분명 내게 왕명을 수행한다고 했소.”

    “하면, 왕명을 따라야 합니까?”

    이 말과 동시에 의연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그토록 홀대하는 데 왜 충심을 보여야 합니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이계찰은 멈칫했다.

    “장부로서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데 그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돌궐과 접할 기회가 있기에 나선 겁니다.”

    “······.”

    “천하의 패권에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요.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의연은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이계찰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고구려의 북방 정책은 돌궐 분열책이 맞으니 말입니다.”

    “허······.”

    “의심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돌궐에서 입지를 키워갈 겁니다. 이미 고구려에서 모든 걸 해봤습니다. 이를 돌궐에 맞춰 변형하여 도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은 고구려의 지부상소를 돌궐에 도입시킬 수 있다는 의미요?”

    “지부상소만 가져오겠습니까? 그 나라의 장점은 모두 도입할 겁니다. 취할 수 있는 건 취해야지요.”

    의연은 자신만만했다.

    실패라는 건 아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단지 한 명의 고구려인이 아니라 체계를 세워본 경험을 가진 거목이라는 걸 말입니다.”

    “내게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오.”

    “나도 누울 자리를 보면서 눕는 겁니다. 대인이 내게 호의를 베푼 건 친고구려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한데 어찌 사실을 말하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아둔한 행동이지요.”

    의연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도 덕분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은혜를 잊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조언을 드리지요. 고구려를 버리세요. 이미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멀리 왔으니 말입니다.”

    말을 다 끝낸 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계찰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만 물러가지요. 돌궐 유력가의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로 했기에 바쁩니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제라도 노선을 달리하세요. 친고구려 정책은 틀렸습니다.”

    “······.”

    “한 가지를 더 말하지요. 내가 얼마나 고구려의 정보에 능통한지 입증할 근거입니다.”

    의구심이 가득한 이계찰의 눈은 괴이할 정도로 태연한 의연을 담아냈다.

    그리고

    “조만간 고구려의 대군이 만리장성을 넘을 겁니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만리장성을 넘는다는 게 전처럼 약탈을 의미하는 뜻이 아닐 것이다. 명백한 전쟁이며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계찰은 놀라지도 못했다.

    그냥 멍하게 쳐다만 봤다.

    “때가 되면 나를 찾아올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의연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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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달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하하하! 그간 무탈하셨소이까!”

    “밤이면 밤마다 부마와 군략을 논의했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한데, 이렇게 다시 기회가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고승 역시 환하게 웃으면서 온달과 을지문덕을 반겼다. 과거 만리장성을 무력화시켰던 대업을 함께 한 세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다시 만난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가볍고 진하게 안부를 주고받은 뒤 고승이 만리장성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약탈이 아니라 점령이라지요? 소장은 참으로 가슴이 뜨겁습니다. 죽기 전에 이토록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에 깃발을 꽂고자 한다. 하지만, 참으로 오랜 세월 이뤄지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저 가슴에 품은 꿈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 기어이 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온달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지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하하하! 그렇소. 이번에야말로 만리장성을 우리 고구려의 내성(內城)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인 것이외다.”

    “과연 그렇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으나 어찌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까. 기어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역시 시원시원하시오.”

    “하하하!”

    고승은 쉬지 않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을지문덕을 슬쩍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신뢰가 잔뜩 담겨 있었다.

    “문덕. 뭐 하는가. 어서 서두르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음? 자네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러자 온달도 을지문덕을 빤히 쳐다봤다.

    “자네 왜 이러나?”

    “예? 대형까지 왜 이러십니까.”

    “허. 자네가 계책을 내야지.”

    “부마의 말씀이 옳지. 자네가 계책을 내야지.”

    두 사람의 말에 을지문덕은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면 온달은 창을 부여잡고 돌격하는 무장이었고, 고승은 후방의 지탱과 보급에 능한 이였다. 일전에도 구체적인 계책은 모두 을지문덕의 역할이었다.

    뒤늦게 이를 상기한 것이었다.

    “문덕. 지금 웃을 때가 아닐세. 서둘러 계책을 내게.”

    “이런. 이번에도 모든 걸 지원해주실 겁니까.”

    “당연한 말을 왜 하는가. 내가 다 지원해줄 것이네. 그러니 어서 계책을 꺼내 보게.”

    참으로 기분 좋은 말들이 오고 갔다.

    “선봉을 이끌고 먼저 왔으나 곧 뒤따를 병력이 무려 5만 명입니다.”

    5만의 대군이 여기까지 이른다는 건 이번 출병에 임하는 고구려의 각오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복잡한 계책은 의미가 없습니다. 전처럼 남하하여 약탈하면 저들은 성문을 닫고 방비하기에 급급할 겁니다.”

    “그렇겠지. 아마 꾹 참고 버티면 물러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니까.”

    “예. 장군의 말씀대로 당장 교전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약탈을 감행하다가 대군이 당도하면 일거에 성을 도모하자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약탈을 감행한 우리 기병으로 적의 성은 철저하게 고립될 것이니 어찌 점령에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탁월하군.”

    명쾌하고 간단했다.

    고승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온달을 바라봤다.

    “부마께서는 어떠십니까.”

    “하하하!”

    온달은 다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약탈이야말로 우리의 심장이 아니겠소?”

    진한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곧장 출병하리다.”

    드디어 남진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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