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세상은 요지경
141화 세상은 요지경
부여창의 노여움은 쉽사리 가라앉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안은 명백하게 귀족들의 정세 판단이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사안의 확대를 막고자 목리문차가 독대를 청했고, 부여창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목리문차는 고소를 삼키며 말을 꺼냈다.
“폐하. 이번 일을 단지 귀족에게 탓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허. 결국, 변명이나 하려는 것이었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이다. 아직도 모르겠소? 고구려의 계책에 넘어간 것에 불과하오. 그 어리석음은 우리 수군의 궤멸적 피해로 귀결되었소.”
사실 부여창의 말에는 어폐가 있긴 했다. 대체 무슨 수로 바다로 넘어오는 고구려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어차피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긴 했다.
아니, 애초에 고구려의 계책이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이번 외교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기벌포 타격은 아무런 영향이 없을 정도로 기습 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여창 역시 이를 모르지 않을 건데 집요하게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지금 저들이 기벌포를 공격했다는 건 외교가 마무리된 직후에 준비했다고 봐도 무방하오.”
“폐하.”
“그래요. 이번에는 또 어떻게 농락당할 생각이시오? 미리 알고나 있을까 하오.”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이르시옵소서.”
“허.”
목리문차의 말에 부여창은 미간을 찌푸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니까
“역시 말 잘 통하시오.”
이는 참으로 기다리던 말이었다.
“옳소. 자고로 군신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해야 하는 법이지요.”
“······신들이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몰라서 묻소? 나는 신라를 벌할 것이외다.”
“······폐하. 지금은 때가 아니옵니다. 아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사옵니다.”
“우리 군선이 큰 타격을 입은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신라를 압박하는 데 수군을 크게 활용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신라를 꺾을 수 있다면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외다.”
그러더니 목리문차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기벌포의 패배는 어디까지는 귀족들의 무능력함에서 비롯한 것이외다. 틀렸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를 원하시옵니까.”
“1만의 대군을 준비하시오.”
목리문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시 되돌아봐도 이 정도로 양보할 사안은 아니었다.
“폐하.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현실적인 타협책을 제시해주시옵소서.”
“뭐. 좋소. 5천을 내놓으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하온데, 폐하. 만일, 이번에도 패배한다면 백제는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것이옵니다.”
“허. 신라가 분열되었소. 하늘이 우리 백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패배를 입에 담는 것이오? 혹시 패배하기를 바라오?”
“폐하. 더는 신을 궁지에 몰지 마시옵소서.”
무거운 경고였다.
부여창은 피식 웃으면서 더 압박하지 않았다.
“하나만 묻겠소.”
“이르시옵소서.”
“고구려를 다녀온 이후 노골적으로 나와 대립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전에도 나를 오롯이 따르는 건 아니었으니 이리하지는 않았소.”
“아무래도 크게 오해하신 것 같사옵니다. 신은 폐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의견을 드렸사옵니다. 애석하게도 폐하께서 추구하는 방향과 결이 달랐을 뿐이옵니다.”
“그렇소. 내놓는 의견들이라는 건 모두 나를 반대하는 것에 불과했소. 한데, 내가 어찌 동의할 수 있소?”
어찌 군왕의 독단으로만 일국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여창은 반대 의견을 모조리 일축하고 있었다.
목리문차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신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 않사옵니다. 수백 년간 쟁투의 역사가 이어지는 천하에서 적합하지 않은 생각이옵니다. 신은 그저 내실을 먼저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옵니다.”
“······.”
“대계를 수립하지 않고 전쟁 자체에 집중하는 건 백제에게 좋은 일이 아니옵니다.”
“그렇소?”
“실은 이번 일도 반대하는 건 사실이옵니다. 고구려의 공세로 기벌포가 불바다로 변했사옵니다. 어찌 대군을 일으킬 수 있사옵니까.”
부여창의 표정은 참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눈빛 역시 낮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설마······.’
목리문차의 말을 들을수록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고정의라고 했소? 내전을 언급했다는 그 막리지가.”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수군은 왕고덕의 작품이라는 것이오?”
“신이 사료할 때는 그렇사옵니다. 두 사람은 적대관계였사옵니다.”
“음. 그렇다면 왕고덕이 정적인 고정의를 견제하고자 기벌포를 타격했다고 볼 수도 있소?”
“신은 그리 여기고 있사옵니다.”
“그렇군요.”
부여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목리문차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느새 화색이 도는 그의 표정을 말이다.
‘고구려와 내통하는구나.’
확실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목리문차는 고구려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래. 신라의 분열은 고구려에 도움이 된다. 반면, 백제가 신라를 취하면 고구려는 곤란해진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니 백제의 공세를 이렇게 반대하는 것이다. 옳다. 혹시 모를 원정을 차단하고자 고구려에서 수군까지 보낸 것이야.’
결론을 내렸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모든 정황이 일치했다.
처음에는 고구려 귀족에게 희롱당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실은 밀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물론 섣불리 내색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여 압박하는 게 옳았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병력을 준비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목리문차는 아쉬움이 가득 남기며 물러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여창의 눈은 점차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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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나 섭도의 안색은 어두웠다. 한눈에 보더라도 곤혹스러움이 넘치고 있었다.
이를 파악한 지근찰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대체 고구려는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돌궐 내부를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입니까.”
고구려가 처라후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한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심지어 수만 석의 군량이었기에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평시라도 혼란이 발생할 것인데 기근이 시작된 초원이었기에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허.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이웃의 어려움을 살펴야 한다고 한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입니다. 편히 여기십시오.”
의연이 느긋하게 말했다.
지근찰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궁금했소. 대사가 어찌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세상만사를 왜 그렇게 꼬아서 보십니까.”
“이보시오. 내가 묻는 말에 답변이나 하시오.”
날카로운 물음에 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서운함을 담아서 항변했다.
“소승은 대카칸께서 부르셨기에 왔을 뿐입니다. 뻔히 아시면서 타박하시니 너무나도 서운합니다.”
“······돌궐의 정세를 논하라고 부르신 게 아니외다.”
“소승은 그저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이보시오.”
“아니, 애초에 물자를 지원하는 게 왜 문제가 됩니까?”
의연의 화법은 묘하게 속을 긁었다.
그래서인지 지근찰의 눈이 가늘어졌고, 볼은 씰룩거렸다. 하지만, 더 나설 수 없었다. 아사나 섭도가 손을 내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기 때문이었다.
“대사.”
“이르십시오. 소승은 대카간의 주옥같은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순식간에 인자하게 방긋 웃는 의연을 바라보는 지근찰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는 이계찰은 그저 기쁠 뿐이었다.
“고구려의 의도가 대체 무엇이오?”
“허. 대카간께서도 모르시는 데 소승이 어찌 알겠습니까.”
“대사가 모르면 누가 알겠소?”
“보잘것없는 안목으로 대카간께 폐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이미 대사는 실력을 보이셨소.”
아사나 섭도가 의연을 신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보여준 활동이 참으로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대사의 설법을 들은 이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했소.”
의연의 화법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와 대화를 나눈 이들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외쳤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중요한 건 또 따로 있었다.
“듣자니 고구려 조정의 중추에 있다고 하오.”
고구려에서 의연이 가지는 위치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신뢰를 더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대사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부끄럽습니다.”
“겸손해할 필요는 없소. 모두 사실이니 말이외다.”
“사실이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지요. 관세음보살께서는 늘 이리 일러주셨습니다.”
놀라운 답변에 아사나 섭도가 다소 당황할 때였다.
“허.”
의연이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알아버렸습니다.”
“무슨 말이오?”
“고구려의 의도가 짐작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이오?”
“아파가한에게는 돼지를 보냈습니다. 한데, 이번에도 대카간을 배제한 지원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대카간과 다시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의연의 말은 참으로 묘했다.
아니, 정확하게 고구려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대사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다소 당황한 이계찰이 만류했고
“끝까지 들어보시오.”
지근찰이 그를 막았다.
괴이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 의연은 좌우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잊으셨습니까. 고구려는 내전의 본고장입니다. 한데, 지금 대카간을 둘러싼 유력 세력에 끝없는 지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마 나와 처라후를 이간질한다는 것이오?”
“이런. 이간질이었습니까?”
“대사.”
“대카간의 말씀을 듣고 보니 깨달아버렸습니다. 하여, 소승은 이를 더 정확하게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더니 대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동그랗게 변해버렸다.
“그렇군요.”
“대사.”
“돌궐에는 종속된 다른 부족이 많습니다.”
“그렇소.”
“그들을 파악하면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설마 그들이 감히 내 눈을 속이고 고구려와 내통이라도 한다는 것이오?”
“이런. 내통이었습니까.”
“대사.”
의연은 깜짝 놀랐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대카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카간을 제외한 모든 세력에 접근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허. 대사. 하면, 고구려가 대카간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이오?”
지근찰의 물음에 의연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아니, 고구려가 그리했습니까.”
“대사.”
“소승이 깨닫고 말았군요.”
상황이 지독할 정도로 기괴하게 뒤틀리자 이계찰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대사.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소승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저 정리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니······.”
“그저 관세음보살께서 일러주셨을 뿐이지요.”
의연은 그 말을 끝으로 대뜸 합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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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가 끝난 뒤 지근찰은 의연을 찾았다. 방문에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사. 내게 바라는 것이 있소?”
“허. 소승은 불자입니다. 대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니 어찌 물어보지 않겠소이까.”
의연의 눈은 더 커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격하게 저으면서 말했다.
“소승은 불자입니다. 하여, 사실만 말할 뿐입니다. 누구를 돕는 게 아니라 중생을 모두 돕는 것이지요.”
“그렇소? 한데, 내가 ‘중생’의 한 사람으로서 공양미를 좀 내볼까 하오.”
“이런. 소승은 그저 불법을 널리 퍼트릴 수만 있다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자의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의연의 의도가 대략적으로 파악되었다.
지근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한 가지를 던졌다.
“내가 대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리다.”
“소승이 오늘 귀인을 만났군요.”
그리고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유력가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게 소승의 꿈이었습니다.”
“하하하! 이런. 좋소.”
지근찰은 호탕하게 웃었다.
‘유력 가문 자제의 스승이 되고 싶다는 말이로다.’
이는 곧 돌궐에서 중추로 올라서고 싶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고구려에서는 정치적 입지가 형편없는 것이다.’
상황 파악은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