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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39화 (139/199)

139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1)

139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1)

을지문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민족의 영웅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 넉 자는 사람을 너무나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과거 가서일이 전쟁을 제외한 영역에서 을지문덕이 하는 말은 일단 믿고 걸러야 한다고 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문덕. 도성과 요동을 연결하는 도로는 지금보다 더 확충할 수는 없네. 그러나 인력은 늘릴 것이기에 정보의 전달은 빨라질 것이네.”

“대인. 단지 앞으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싸움은 장수의 역량보다는 물자를 얼마나 빠르고 많이 운송할 수 있는가로 규정될 겁니다.”

을지문덕의 이마에서는 핏줄까지 보였다. 정말로 온 힘을 다하여 열변을 토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이래서 이름이 을지문덕인 것 같았다. 원 역사를 되돌아봐도 중국은 물량 공세를 펼쳐서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역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백만 대군이 요동을 범한다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어.

“만일, 적의 대군이 요동을 포위하고 수십만의 별동대를 꾸려 도성으로 진군하면 어찌할 겁니까. 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끔찍은 모르겠고 태연하게 여수장우중문시를 던지고 오면 될 거야. 당신은 다 막을 수 있어.

나는 흐린 눈을 하며 을지문덕을 바라봤다.

자신의 존재가 바로 논리의 반례라는 걸 꿈에도 모를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인. 요동 전선 강화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이를 넘기시면 안 됩니다.”

“나 역시 요동 전선을 더 튼튼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사실을 묵과하지 않네. 그러나 이를 당장 1년, 2년 내로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어째서 미루고자 하시는 겁니까.”

만일 내가 을지문덕에게 빙의했으면 절대 미루지 않고 목숨을 걸고 추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나는 을지문덕이 아니다. 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은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요동 전선 강화에 무리하게 국력을 투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을지문덕이 사지 멀쩡하게 있는 한 요동 전선은 이상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상대를 설득할 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가장 답답한 현실을 꺼내서 상대의 말문이 닫히게 할 생각이었다.

“이보게. 문덕. 도성과 요동의 도로를 확충하려면 인력을 어느 정도 동원해야 하는지 고려해보았나?”

“······.”

“족히 100만은 동원해야 할 일일세. 한 마디로 고구려의 국운을 건 역사가 단행되는 것일세. 이토록 거대한 일을 오직 당위성만으로 추진한다는 건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네. 내 말의 뜻을 알겠는가?”

을지문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현실론과 만나게 되니 속이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구간을 나눠서 천천히 진행해야 할 일일세. 한 번에 이뤄낼 수가 없다는 것이네. 해서, 도성과 한수 유역의 도로를 먼저 손보는 것일세. 현재 우리 고구려는 이 이상 역사를 일으킬 역량이 없네.”

“······.”

“그러니 여유를 더 가지게. 어쨌거나 자네의 제안으로 정보의 전달이 더 빨라질 것이네. 또한, 한수 유역의 도로를 정비하는 것 역시 자네의 안건 발의에서 비롯한 것일세. 이만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고 할 수 없지 않나?”

을지문덕은 잠시 고민했으나 더 말하지는 않았다. 역시 완벽하게 설복된 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더 어찌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형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는 연자유였다.

그런데 안색이 굉장히 어두웠다. 지금껏 보지 못한 다급함까지 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알 수 없는 본능이 치솟았다.

그리고

“대인. 서토에서 변고가 발생했습니까.”

을지문덕의 목소리가 들렸고

“진나라 황제가 죽었네.”

연자유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뇌의 작동이 멈춘 것만 같았다. 눈을 껌뻑이며 쳐다만 봤다. 천만다행인 건 혀가 알아서 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진나라의 후계에 대해서 말해보게.”

진나라 황제 진욱은 제법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나라를 압박하기 위한 북진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또한, 신라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판단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진욱의 죽음은 대륙의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중요한 건 차기 지존이 어떤 인물이냐는 것이었다. 만일, 암군이 예정된 인물이라면 우리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전례 없는 암군이 탄생할 겁니다.”

애석하게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괜한 말이 아닙니다. 진숙보는 정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패악하고 나약하며 탐욕스럽습니다. 그가 황제가 된 진나라는 절대로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하늘이 수나라를 바라보며 웃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진나라 황제는 암군이다. 그런데 수나라 황제는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이는 바꿔 말해서 수나라의 통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원 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기어이 수나라가 성장하고 있었다. 그토록 여러 방면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는데도 말이다.

대화를 듣던 을지문덕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어쩌면 서토의 통일이 우리의 북방 제패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필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연자유를 바라봤다. 그 역시 중국의 통일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수나라의 광폭 행보를 지켜만 볼 수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견제해야 합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요동 전선을 강화해야 합니다.”

연자유는 압박, 을지문덕은 방비를 말했다. 모두 일리가 있었다.

“수나라는 아파가한과 결탁하여 북방을 안정시킨 뒤 남진을 단행할 것이네. 하지만, 대카간은 내부의 혼란에 쉽사리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일세.”

대카간 아사나 섭도를 흔드는 건 주체가 바로 우리였다. 그런데 수나라를 견제하고자 그를 지원하는 건 지금껏 한 행동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일세.”

현재 천하에서 수나라를 타격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우리 고구려였다. 이를 인지했으니 행동으로 나서야 할 뿐이었다.

나는 을지문덕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요동 전선을 강화하자고 했나?”

“그렇습니다.”

“자네의 냉철한 판단을 듣기 전에 내가 안건을 하나 제시해보겠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이번 사안은 철저하게 을지문덕의 판단에 따라보기로 했다.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요동 전선 강화의 핵심은 요서가 아니겠는가?”

“그 말씀은······.”

“현재 무주공산 아니 허허벌판이 된 요서를 확고부동한 우리의 영토로 삼아야겠네. 하여, 확실하게 요동의 외곽으로 세우고자 하네. 어떤가.”

“요서 점령은 요동을 지금보다 백 배는 더 강화할 방편입니다.”

“그런데도 도로의 확충은 불가할 것이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금은 역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 팽창하여 수나라를 짓눌러야 할 때입니다.”

“하면, 되었네.”

연자유를 바라봤다.

“폐하께 알현을 청하겠네.”

남은 건 최종 결정권자의 동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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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의 동의를 얻어내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수나라가 아니라 돌궐입니다.”

고식은 단호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선 것입니다. 고구려의 한정된 역량을 어디에 사용할지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하는 겁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돌궐과 수나라를 동시에 상대할 역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보다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외다. 요서를 점령하고 장성을 흔들면 수나라가 반격할 건 당연하오.”

고정의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수나라와 싸우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외다. 하지만, 그들과 일전을 치르면서 북방을 도모하는 건 어불성설이오. 참으로 안타깝지만, 우리 고구려에는 그럴 여력이 없소.”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게 우리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했다.

“수나라가 서토를 통일하는 걸 막는 게 가장 중요하오.”

“대형의 말씀이 틀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서토의 통일은 재앙일지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데, 언제까지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소. 서토가 오랜 세월 분열된 이유는 통일을 일궈낼 역량을 가진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오. 즉, 내부의 문제가 컸소.”

고식의 말을 받은 고정의가 말을 이었다.

“한데, 작금의 수나라는 그럴 역량을 가지고 있소. 아니, 진나라가 알아서 무너지고 있소. 우리가 아무리 외부에서 공세를 펼치더라도 통일을 막을 수 없소. 그동안 우리는 힘을 집중하지만, 수나라는 그저 막을 뿐이외다.”

우리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흔들고 기주로 진군할지라도 통일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때 같은 시간을 보냈을 고구려와 수나라의 사정은 너무나도 달라질 것이다.

저들은 통일 제국이 되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힘만 소진하고 여전히 북방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예. 대형.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우리의 역량입니다. 그래야만 수나라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냉정해야 합니다. 요동은 적의 백만 대군을 격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적의 영토를 취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고구려의 역량은 적의 공세에 한 치의 땅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 뿐입니다.”

고정의와 고식의 합이 절묘했다. 그렇다고 미리 합의를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점차 본궤도에 오르고 있는 대 북방 외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확하게 일치한 결과였다.

급변하는 천하 정세가 고구려 내부의 노선 정리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내가 관찰자는 아닌지라 마냥 바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면, 수나라를 이대로 두자는 것이오?”

“나는 이대로 북방 외교에 더 전념하는 게 옳다고 보는 것이오. 왕 막리지. 수나라가 서토의 통일에 집중하듯 우리 고구려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하오.”

그러니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듯 우리도 동방과 북방을 통일하자는 말이었다.

결국, 수나라 견제와 우리의 통일은 본질에서는 하나의 길이었으나 동시에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떠오른 건 역시 을지문덕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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