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하늘은 하나(2)
138화 하늘은 하나(2)
제후국의 합종연횡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북조 신라가 이토록 저돌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특히
“협조를 기대하겠습니다.”
우리 김후직이 정말 변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봤다.
“아니, 자네가 직접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하하하! 어찌 북방 외교를 돌궐국에 국한하겠습니까. 그 외 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지요. 그래서 직접 달려왔습니다. 한데, 대인께서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요.”
내가 아주 무시하긴 했으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한반도 정세를 주도한 나라였다. 이러한 나라에서 병부령을 했다는 건 정치력이나 처세가 보통은 넘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서 현재 북조 신라의 상대등으로서 가장 적합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도왔군.”
“대뜸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자네가 제 능력을 발휘할 상황이었다면 한수를 둘러싼 정세가 지금과는 달랐을 것 같군. 진심일세.”
되돌아보면 김후직은 나름대로 적합한 판단을 내렸다. 애석하게도 우리 고구려의 대응이 상식과는 달랐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한데, 이리된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과거에는 지독할 정도로 관성적이었으나 지금은 역동적이니 말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껏 신라사에는 없던 파격적인 서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역시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이리해야만 현실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 합리화를 해야만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김후직의 변화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도와주고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네.”
“과연 어떤 건지 직접 듣고 싶군요.”
“하하하. 아군의 군선 300척이 백제로 출병했네.”
“······300척이라고 하셨습니까? 전면전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저 살짝 건드려주는 것이네.”
“다행이군요.”
“그런가?”
“만일, 백제의 힘이 상한다면 역도의 배후를 공격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이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김후직은 남조 신라를 역도라고 불렀다. 사실 북조 신라로서는 그들은 역적이 맡긴 했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 한반도 남부를 바라보는 그의 판단은 상당히 정확하고 냉철했다.
“우리로서는 역도의 힘이 약해질수록 좋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백제가 연전연승하여 남조의 왕도를 도모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끌. 누구는 백제와 안 싸워본 줄 압니까. 그들은 지금 그럴 기력이 없습니다. 몇 번의 승리를 가질 수는 있으나 남조를 멸망시킬 힘은 없습니다.”
당연히 백제의 국력이 북조를 압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남조를 도모하기 어렵지만 북조는 아니었다. 신라의 내전이 국가 대 국가의 대립으로 재편되었다고는 할지라도 신라는 신라이긴 했다.
그러니까 과거 분열 직후 김백정이 대군을 이끌고 남진했다면 완벽한 내전이었다. 판세에 따라서 김백정에게 항복하는 신라의 성이 속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상당히 복잡했다.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 김백정과 전쟁에서 패하였다고 폐위를 단행한 이들의 대립이었다. 누구도 잘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애매하게 국가 대 국가의 구도가 구축되어 있었다.
만일, 조기에 승부를 보지 못하고 한 세대만 지나면 아예 결이 다른 나라가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원 역사의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합하는 삼국 통일이 아니라 또 다른 개념의 통일 전쟁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구조였기에 백제와 단순하게 국력으로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백제가 경주를 점령하면 신라 부흥 운동이 발생한다. 반면, 북조가 점령하면 이런 수준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면 대인께서 지켜만 보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지요.”
“이런. 그토록 중요한 걸 알아버렸나?”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반면, 본국의 어려움은 무조건 해결해줄 것이니 어찌 듬직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그것도 알아버렸나?”
“그리되었습니다. 해서, 본국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겁니다. 대인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국호는 지켜줄 것이니 말입니다.”
너무 파격적으로 전향적인지라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바람직하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이걸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은 몰랐다. 감탄사가 쉬지 않고 새어 나왔다. 다시 느끼지만, 김후직이 온전히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겨뤄서 다행이었다.
“하면, 총진군을 꾀하는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백제가 먼저 총력전을 시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노릴 겁니다.”
“백제의 공세에 남조의 기력이 빠졌을 때 남진하려는 것인가?”
“그런데 왜 계속 역도를 남조라고 합니까? 참으로 서운합니다.”
“사과하겠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내 혀를 자르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면 당시 바로 남진하지 않은 건 너무나도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그 판단을 내려줬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구렁이가 백 마리였다.
이쯤 되고 보니 경직된 채로 얼굴만 빨개지던 과거의 김후직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혹시 남진할 때 원군을 바라는가?”
“하면, 좋지요. 그러나 안 보내주실 거 압니다. 그래서 다른 제후국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그들과 함께 남진하면 대가가 내어야 할 것인데?”
“그 부분은 더 논의해볼 계획입니다. 지금 당장 요구할 건 약탈입니다.”
“약탈?”
“나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방 방비 체계를 무력화시키고 순식간에 한수를 도모한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잘 배웠으니 도입해야지요.”
즉, 한수 4국에 요청하여 남조 신라나 백제의 변방을 크게 흔들고 북조의 병력을 파견하여 차츰 점령해나가겠다는 의미였다.
이건 좋은데, 담긴 뜻이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마치 적의 영토를 점령하는 듯한 모양새로 읽히는군.”
그러니까 경주로 몰아치며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땅따먹기하듯 성을 점령하는 방법이었다.
“맞습니다.”
“이런. 분열을 조기에 끝낼 생각은 없나 보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생각을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해주겠나?”
“이대로 왕도를 점령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해서, 파상 공세를 펼치되 완벽한 직할 통치로 개편하면서 ‘영토’를 ‘확장’할 겁니다.”
“허. 중앙집권체계를 꾀하는군.”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요충지를 점령하며 남진하면 신라는 전과 같겠지만, 영토를 확장하며 역도를 잠식하여 고사시킨다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내전의 승리는 왕위의 주인을 결정하는 행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는 나라의 체질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 김후직은 이번 남북조 통일 전쟁으로 신라라는 나라를 아예 환골탈태시킬 생각이었다.
정말 놀라웠다.
나는 다시 진심으로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자네 볼수록 대단하군. 어찌 이런 생각을 한 것인가?”
“음. 어차피 아실 수밖에 없으니 말씀드리지요. 조언해주신 분이 있습니다.”
“허. 누구인가? 이토록 내전에 대해서 뛰어난 식견을 보인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당장 나에게 소개해 주게.”
“스스로 정통 내전의 계승자라고 소개하더군요.”
“오만하군. 누구인가?”
“막리지 고정의 대인입니다.”
“······.”
고정의는 언제 여기까지 마수를 뻗쳤단 말인가.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서찰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그런가? 바람직한 관계이군.”
막상 이리되었으니 어찌 내가 먼 산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전의 역사를 이어온 한 축의 수장으로서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역사와 전통의 계승자가 누구인지 제삼자가 결정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첨예한 자존심 대결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잊지 말게. 오직 자네만이 외교의 통로라는 걸 말 일세.”
이는 참으로 심오한 말이었다. 지금 나는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고구려는 앞으로도 변치 않고 자네만 바라볼 것이네. 우리에게 자네가 곧 신라이고, 신라가 곧 자네일세. 명심하게.”
현재 북조 신라는 누가 보더라도 김후직이 주도하고 있었다. 반면, 김백정은 그저 왕에 불과했다. 정말 냉정하게 상황을 자르자면 그는 전쟁에 패하고, 폐위당한 뒤, 고구려의 지원으로 왕위를 연명한 게 전부였다.
만일, 북조 신라의 중흥이 이뤄진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김후직이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단지 왕이 아닐 뿐이었다.
물론, 지금 김후직이 엄한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이리 판단할 근거도 미흡했고, 그가 왕위를 탐할 정도로 우매하지도 않았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기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나는 다소 굳은 표정을 한 김후직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나는 자네를 지지할 것이네.”
만일 김후직이 아니, 미래의 김후직이 절대로 용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내 말에 대꾸해야 한다.
그는 절대로 우매하지 않기에 내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결과는
“······.”
침묵이었다.
이는 혹시 모를 미래를 내게 확실하게 화답한 것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 진한 미소로 답해주는 것이 옳았다.
지금은 딱 이 정도가 적합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과거의 김후직이 용을 바라본 바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수 차례 서사를 꿈꿨으니 말이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었다.
자고로 남의 나라에는 용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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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혼란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을 때 단호한 개혁으로 중흥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
강대한 외세가 공세를 펼칠 때 신묘한 계책으로 대승을 거두는 사람도 있다.
또한, 완벽한 정세 분석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치는 인물도 있다.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영웅’이라고 불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을지문덕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영웅도 그냥 영웅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한국사에서 을지문덕이라는 넉 자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개혁을 일궈낸 명재상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에 능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들의 재능은 내정에 특화된 것이니 말이다.
반대로 백만 대군을 격멸한 명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정치와 내정에 문외한일 가능성은 절대로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냥 하늘은 공평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이를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을지문덕이라는 위대한 넉 자가 내게 실소를 머금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