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하늘은 하나(1)
137화 하늘은 하나(1)
제해권 확보를 위한 무제한 군산 작전은 순탄하게 집행됐다. 사실 엄밀하게 따질 때 고구려에서 가장 운용하기 쉬운 인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수군이었다.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수군은 곧 평양계인데, 그들의 수장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애초 이번 사안이 전쟁이 아니라 백제를 적당하게 타격하는 것이었기에 걱정은 너무나도 과한 사치였다. 또한, 숙련된 약탈 경력이 있기에 보급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아주 아름다운 상황이었기에 강이식은 기세 좋게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곧장 출항했다.
큰일 하나 치렀으니 잠시라도 쉬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은 내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막리지가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회씨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긴장되는군요. 그래요. 무엇입니까.”
“전하. 소인이 그동안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결과, 고구려와 제후국의 관계를 다시 규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가벼운 내용은 아니겠군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문진과 나눈 대화를 되새겼다.
*****
오늘따라 이문진은 눈동자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빛이 나고 있었다. 체면만 아니면 당장 눈을 돌려 피하고 싶었다.
“대인. 이대로라면 번국의 생존을 우리가 책임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빛나는 눈빛과는 달리 상당히 엄중한 내용이었다.
이것과 별개로 이문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만큼 현재 4개의 제후국은 식량 생산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꾸준하게 농업에 전념하는 건 체질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는 그들의 유구한 전통과 풍습이었으니 섣불리 탓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식량 문제는 결국, 고구려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무역으로 과정이 이뤄질지라도 우리의 식량을 나눠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물론, 약탈을 수행하여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인. 백제와 남조 신라의 규모로 그들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나도 옳은 말이었다.
백제와 남조 신라는 우리 제후국을 모두 감당할 정도로 경제 규모가 크지 않았다. 이러하니 결국, 심각한 수준으로 식량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를 지금부터 미리 대비하는 건 참으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치, 외교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제후국 수립이었다는 걸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풍요로운 한수 유역에서 농업을 크게 일으켜 본국의 식량 사정에 도움이 되고자 한 의도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자네 제후국이 농업에 집중하는 걸 우려하지 않았나?”
“대인. 이러지 마십시오. 지금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닙니다. 고구려의 내일을 신경 써야 하는데 어찌 그러십니까.”
이문진도 관복을 입으니 정치인이 다 됐구나.
좋은 현상이라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한강 유역은 농사를 지으면 큰 성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대인. 한수는 이앙법이 가능한 곳이 아닙니까.”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한강 유역을 조사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이앙법이 이문진을 제대로 미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문진. 그들의 정확한 분위기가 어떠한가?”
“어떻다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의 손을 놓고 있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욱한 마음에 북조 신라를 지원할 뻔했습니다. 차라리 그들은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니 이론만 일러줘도 농업을 크게 일으킬 것이니 말입니다.”
지금껏 앓는 소리라고는 한 적이 없는 이문진이었다. 그러한데 이리 나올 정도라는 건 정말로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뒤늦게 사안의 심각함을 깨달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하. 대인. 이건 너무나도 큰 낭비입니다. 그들은 땅, 우리는 인력을 낭비하는 겁니다.”
“음.”
“이럴 줄 알았다면 변방에 배치하고 말이나 보급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하게.”
“소생이 너무 답답해서 그럽니다. 그런 옥토를 차지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건 반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정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겁니다.”
듣기만 하는 나도 답답할 정도인데 농업 정책을 진두지휘하는 농업부는 오죽할까 싶었다. 더욱이 이문진이라서 나는 무조건 다 이해할 수 있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문진이 슬쩍 던진 덫을 일부러 잡아보기로 했다.
“북조 신라에 이앙법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소생은 그리 여기고 있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들은 언제 등을 돌릴 줄 모르는 신라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안을 간단하게 보면 될 것이네. 생각해보게. 농업이라는 건 결국 경작하는 이들의 숙련도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일세. 그러니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방법을 전해주는 게 좋지 않겠나?”
농업은 농법도 중요하지만, 농민의 숙련도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단지 농법을 알려준다고 하여 단번에 큰 성과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앙법과 같은 첨단 농법은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미리 전해서 시도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뒤 잉여 생산물을 취하는 건 외교의 영역이니 말이다.
“대인께서 이리 결단을 내려주시니 소생은 너무나도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데 제후국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쉽지 않군. 의지가 없는 이들이니까. 그런데 그들이 농지는 어찌하고 있나?”
“농사를 아예 안 짓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이라도 하고 있지요.”
“음.”
정말 첩첩산중이었다.
약탈을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려고 했으나 이미 남방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할 때는 제후국이 제대로 국가적 기틀을 잡고 성장하는 게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하니 한강 유역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너무나도 큰 손해였다.
고민을 더 이어가다가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하지.”
“뾰족한 방법이 있습니까.”
“이런 문제는 정치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
상념을 거두고 아회씨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가져온 해결책을 제시했다.
“전하. 본국과 제후국의 통행을 아예 자유롭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국경을 개방하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대군의 이동은 예외로 해야지요. 아. 당연히 탈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서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피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음. 고구려와 한수 유역의 도로를 더 확충하겠다는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경의 완벽한 개방을 언급하니 당황스럽군요. 내가 잘 모르니 그냥 묻지요. 숨은 뜻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회씨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시도했다. 이러하면 내가 굳이 피하거나 본질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나도 속에 담은 말을 시원하게 개방했다.
“전하. 소인은 한수의 풍요로운 농지에 고구려의 백성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이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이군요. 그러니까 우리 땅에 상국의 백성이 농사를 짓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데, 전하. 어차피 지금은 제대로 관리조차 하지 않는 농지가 아닙니까. 누구라도 농사를 짓고, 조세를 낸다면 전하께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한데, 농사라는 게 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지금은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지만 때가 되면 우리 백성을 잘 설득하여 농사를 짓도록 할 겁니다.”
아회씨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자신의 계획을 언급했다.
“그러한데 고구려의 백성이 모두 땅을 차지한다면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모든 농지가 고막해국의 조정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시일을 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면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허. 때가 되었을 때 내가 고구려인을 몰아내도 된다는 겁니까?”
“적법한 절차가 있다면 그리해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때가 되면 정치로서 상황을 다시 정리하자는 말이군요.”
우리 아회씨가 정말 달라졌다. 정치적 언어를 대번에 이해하니 말이다.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느낀 것일까?
아회씨는 대뜸 피식 웃었다.
“나도 책이라는 걸 읽어봤지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제는 일국의 왕인데 통치라는 걸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조금 전에 막리지의 말뜻을 이해한 건 또 별개의 일입니다. 잊었습니까? 그래도 내가 제법 오랜 세월 고막해족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말입니까.”
“아.”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다 알겠는데 애석하게도 아회씨는 노회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냥 용맹한 장수였다. 그러니 조금 전에 한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즉, 최근에 제법 공부를 한 게 분명했다. 아회씨가 의외로 노력파였다.
“이런. 소인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외다.”
분위기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어쨌거나 이웃한 오적 왕은 부지런히 통치한다고 하길래 나도 반은 따라가야 할 거 같았소. 언제까지 약탈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여기고 있소이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개방하는 게 서로 이롭습니다.”
“양국의 백성이 마음껏 오가는 건데 썩 나쁜 건 아니겠지요.”
아회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좋습니다. 동의하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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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회씨와 회담을 잘 끝냈다. 그러면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오적은 이미 농업에 크게 관심을 두고 시비법까지 알아갔다.
이문진의 보고에도 오적은 농업을 크게 장려하고 있었다. 이른 시일 내로 제법 성과를 낼 것이 분명했다.
하면 된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뒷짐을 쥐고 한강 구경이나 하려고 할 때였다.
분위기 파악 못 한 밀정이 나를 찾아왔다. 북조 신라의 동태를 파악하던 이였다.
아니, 평양도성으로 안 가고 내게 보고하는 게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필시 가까운 거리에 내가 있으나 아주 즐거워하면 찾아온 게 분명했다.
따끔하게 원칙을 언급하려고 했는데 내용이 상당히 심각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말갈국과 북조 신라가 모종의 협상을 체결한 것 같습니다.”
제후와 제후의 외교라는 건 예상했으나 막상 현실이 되니 놀라웠다. 특히, 북조 신라가 언급된 건 더 그랬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밀정을 바라봤다.
“그 내용을 내가 더 자세히 알고 싶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열거하게. 판단은 내가 할 것이니 말일세.”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북조 신라의 병부령 김후직이 협상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김후직이라.”
“예. 그리고 그가 조만간 입조한다고 했습니다.”
입조.
그러니까 평양 도성으로 온다는 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상당히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