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다가오는 대전(大戰)
135화 다가오는 대전(大戰)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무너지고 있었다.
“······.”
넋이 나간 주라후는 하늘만 바라봤다.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속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늘은
“하늘은······.”
참으로
“어찌 이토록 잔인한 것인가.”
야박했다.
아니, 야박한 게 아니라 잔혹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쓰러진 황제 진욱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숨소리는 옅어졌고, 온몸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주라후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황제 진욱이 이대로 세상을 떠나면 진나라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광인처럼 홀로 웅얼거리던 그의 귀로 인기척이 들렸다. 삐걱거리듯 고개를 움직여 바라봤다.
“······.”
사태의 심각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였다. 그러니까 진나라의 운명을 벼랑에 서게 할 일이었다.
그는 슬픈 듯 굳은 표정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전혀 심각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입꼬리는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막상 그를 다시 보니 주라후는 더 절망적이었다. 애써 고개를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눈동자가 마주쳤고 거대한 참담함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뭐 하시오?”
그가 오만한 표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
“허. 이보시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송구합니다. 전하. 소인이 아직 추스르지 못했습니다.”
전하라고 불린 그는 진나라의 황태자, 진숙보였다. 그는 주라후의 말에 더 미간을 찌푸리며 조롱했다.
“허. 장수가 피아 구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찌 믿고 대군을 맡길 수 있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송구합니다.”
“정신 차리시오. 천하의 정세가 이토록 좋은데 늘 전쟁을 주장하여 대단한 능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건만 이래서야 원.”
주라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진숙보의 폭언은 멈추지 않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오? 설마 아직도 전쟁을 주장하오? 그 전쟁을 무리하게 압박하듯 주장했기에 사사롭게는 부친이신 폐하께서 쓰러지셨소.”
“······.”
“내가 분명하게 말하리다. 나는 전쟁이 싫소. 굳이 하지 않아도 천명이 본국에 있다는 게 확실하오. 아시겠소?”
“전하.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아. 시끄럽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오. 어찌 하나씩 따지듯 묻소?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고, 생각할수록 불쾌하오.”
“······”
“오랜 세월 폐하를 괴롭힌 건 내가 눈감아 주겠소. 하지만, 또 북진을 언급하면 더는 용서할 수 없소. 아시겠소?”
천하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한 발언이었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주라후 역시 진숙보에게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또, 대꾸할 기력도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진욱은 한때나마 성군의 능력을 보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진숙보는 성군은커녕 황제의 자질을 단 한 순간도 보인 적이 없었다. 만인은 그가 패악한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인지 좌절이 더는 커지지도 않았다.
‘이 나라가 10년을 넘기지 못하겠구나.’
그때였다
그리고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결국, 황제 진욱이 세상을 떠났다.
주라후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수나라의 공세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펼칠 격전지를 미리 선정해야겠구나.’
최후를 결의했다.
적어도 진나라의 마지막이 초라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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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황제 양견은 흡족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돌궐의 분열을 꾀하고자 했는데, 아파가한이 먼저 사람을 보내온 것이었다.
내용도 간결했다.
“하하하. 부디 기근을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오.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소이까.”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옵니다. 저들이 알아서 분열하고 있으니 말이옵니다.”
소위의 말대로 돌궐은 사실상 분열의 길로 진입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놀라울 정도로 천하의 정세가 편하게 움직였다. 마치 약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머지않아서 돌궐은 피를 보는 내전에 돌입할 것이외다. 하면, 어찌 되겠소? 간사하게 기회나 살피던 고구려의 꼴이 웃기오.”
“과연 그렇사옵니다. 고구려는 돌궐을 앞세워서 이익을 취하고자 했사옵니다. 하오나 그들의 힘이 북방의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보시옵소서. 우리의 외교는 단번에 북방을 분열시켰으나 그들은 버림이나 받았사옵니다. 이것이 바로 역량이며, 국세가 아니겠사옵니까.”
“하하하! 바로 그것이외다.”
소위의 말처럼 고구려는 최선을 다하여 북방을 움직이고자 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이 현실로 구현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수나라가 사신단을 한 번 파견하자 모든 건 무산되었다. 고구려는 돌궐에게 비참할 정도로 버림을 받았지 않은가. 이는 천하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 한 번에 보여준 사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차대한 논의는 더 밀도 있게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잠시 숨을 고르듯 소위의 공을 치하했다.
“이 모든 건 공이 일궈낸 것이외다.”
거대한 북방을 오직 한 번의 외교로 무너뜨린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소위의 능력이었다. 이토록 뛰어난 신하를 곁에 두고 있으니 양견은 너무나도 듬직했다.
“부끄럽사옵니다. 폐하.”
“아니외다. 모든 일은 공과가 분명해야 하는 법이외다. 내 이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오.”
“신은 그저······.”
“하하하. 되었소. 이를 더는 언급하지 마시오.”
양견이 손을 내저으면서까지 말하자 소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옵고 폐하. 최근 동방의 일로 고구려가 더는 북방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보였사옵니다.”
애초 신라를 움직여서 고구려의 뒤를 완벽하게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신라 외교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신단의 보고는 참으로 걸작이었다. 이미 신라는 분열된 것도 당혹스러운데 고구려가 길목을 열어준 건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매번 느끼지만 갈수록 고구려의 간사함이 하늘을 찌르오.”
“그러하옵니다. 사신단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행동이 괴이하긴 했사옵니다.”
그러니까 사신단이 신라 외교를 마치고 다시 당항성에 이르렀을 때였다. 고구려의 막리지 왕고덕이 은밀하게 말을 전했는데 내용이 참으로 괴이하긴 했다.
-우리는 동방만 잘 간수 할 것이외다.
-······.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 천하가 참으로 태평할 것 같소만.
-······.
짧았으나 묵직한 의미가 담긴 말이기도 했다. 아니, 너무나도 간사한 언행이었다. 소위는 이를 곱씹으면서 말을 꺼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본국과 더는 다툼을 원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수도 있사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그게 아니고서는 우리 사신단이 신라 외교를 수행할 수 있게 둘 수는 없소. 어떤 내용을 전할지 모르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외다.”
“참으로 간사한 나라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북방과 손을 잡았을 때 여러 번 장성을 넘었사옵니다. 하온데, 일이 틀어지자 저리 행동하옵니다.”
그랬다.
막상 동방의 정세가 급변하자 고구려가 다른 행보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시작하고자 슬며시 접근하는 것이었다.
양견은 고구려의 이런 행보가 너무나도 불쾌했다.
“하! 심지어 제대로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오. 여전히 북방에 발을 들이밀고 있소. 이번에 우리 사신단에게 한 말도 괜히 간을 보며 상황을 살피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렇사옵니다. 만일 폐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시면 곧장 머리를 숙이고 제 영역이나 지킬 것이옵니다.”
이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판단이었다. 소위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신이 여러 번 상기했사옵니다. 오랜 세월 고구려는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제압하고자 부단히도 노력했사옵니다.”
“흥! 동방이라는 곳이 애초 작은 나라가 옹기종기 모인 것이외다. 그토록 작은 나라를 수백 년간 제압하지 못한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자리에 동석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외다.”
바라보기에 따라서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고구려는 천하의 강국이긴 했으나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제압하지 못하여 늘 후방이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공세로 큰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사례를 고려하건대 절대로 일부러 그들을 그냥 두는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힘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러하니 양견은 곱씹을수록 불쾌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격에 맞지 않다는 뜻이었다.
“폐하. 이를 잘 활용한다면 동방도 쉽게 제압하실 수 있사옵니다.”
“묘안이 있소?”
“고구려의 청을 윤허하시옵소서.”
“허. 그 오만방자한 무리를 그냥 두라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폐하. 만일, 그들이 지금이라도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제압할 수 있다면 그토록 간사하게 행동하겠사옵니까?”
“큭.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이는 상당히 위험성이 짙었으나 또 해볼 만한 계책이었다.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하여 동방을 평정하라는 황명을 내리라는 뜻이구려.”
“그러하옵니다. 폐하로부터 용서받았다고 여긴 고구려는 안심하며 요동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남진을 감행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백제와 신라를 쉽사리 제압하지 못할 것이니 엄청난 국력의 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국세가 크게 휘청인 고구려는 지금의 자리를 보존하기도 버거울 것이니 더는 요동 밖을 바라보지 못하겠구려.”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상당히 위험한 방책이기도 하오.”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역시 최악의 경우는 고구려가 동방을 완벽하게 평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큰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다시 생각했는데 고구려는 후방의 적이 있어야 하오. 백제와 신라로부터 뒤를 잡혔는데도 그토록 활개를 친 나라요. 한데, 이조차도 없으면 얼마나 오만방자할지 가늠도 할 수 없소이다. 나는 죽어도 그 꼴을 볼 수 없소.”
이는 다분히 감정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었다. 실체가 분명한 위협이었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가 힘을 보태어 고구려를 겨우 감당했소. 한데, 지금은 두 나라가 적대하니 가볍게 여길 수가 없소이다.”
이에 소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 신이 세밀하게 준비하겠사옵니다.”
고구려의 남진이 실패로 귀결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폐하. 신이 백제로 가겠사옵니다.”
“허.”
“백제의 왕을 설득할 것이옵니다. 훗날 본국의 대군이 요동을 범할 것이니 고구려 전선을 구축하라고 한다면 어찌 거절하겠사옵니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고구려를 평정한 뒤, 신라까지 도모하여 백제의 영역을 인정해준다고 이른다면 그들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유화책을 펼쳐서 신라와 손을 잡게 하자는 의미요?”
“그러하옵니다. 폐하. 천하의 정세를 살피니 오직 고구려만이 오만해질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이를 확실하게 정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신을 보내주시옵소서.”
이미 거대한 북방을 세 치 혀로 분열시킨 소위였다. 그러한데 동방을 어찌하지 못하겠는가.
양견은 흡족하게 웃으며 신뢰를 보였다.
“이보다 듬직할 수가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