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문명
132화 문명
발걸음은 경쾌했으나 눈알은 복잡하게 움직였다. 양손은 즐거워 춤을 추듯 움직였으나 손바닥에는 땀이 치솟았다. 한 명이 아니라 열 명 남짓한 수의 백성이었다.
어느새 그들의 발걸음이 멈췄고,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이곳이지?”
“암.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했네.”
무언가 정확하지 않았는지 불안함이 새어 나왔으나 묘한 떨림도 담겨 있었다. 모두 말을 아끼며 주변을 살폈다. 인생을 바꿀 기회가 바로 오늘이었기에 간절하게 인기척을 기다렸다.
그리고
“모두 일찍 왔군.”
드디어 들렸다.
인생을 바꿔줄 목소리가.
모두 화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았기에 다소 어두웠으나 확실하게 보였다. 가서일의 실눈이 말이다. 오히려 실눈이라서 더 확인하는 게 쉬웠으니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 밤새도록 기다렸습니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매복하는 줄 알았습니다.”
넉살 좋은 그들의 말에 가서일의 실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10명이라.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군.”
“선생. 소인들도 제법 배웠습니다. 눈물은 나누고, 웃음은 아끼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일단 소인들만 와봤습니다.”
“이런. 정확하게 가르침을 익히고 있군.”
최근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구려 유학이 점차 번졌다. 시대를 풍미한 학문이었기에 어찌 간단하고 쉬울 수 있겠냐마는 의연의 유학이라는 것이 고구려의 기풍과 절묘할 정도로 비슷했기에 의지가 있는 이들은 빨리 익힐 수 있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반길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이러하니 가서일도 더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더 방긋 웃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이리만 한다면 자네들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일세.”
“오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닐세.”
“그래서 소인들이 소수로 온 게 아니겠습니까. 원래 어려운 일은 먼저 해보고 괜찮으면 남에게 소개해줄지 백 번 정도 생각해보고 안 해주는 게 유학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바람직하군.”
쉬지 않고 나오는 옳은 말에 가서일은 쉬지 않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감탄만 하고 있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고, 정세는 엄중했다.
“자네들은 서토인의 기술을 익히고자 할 것이네. 내 말이 틀렸나?”
“제대로 보셨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적당하게 구슬리면 됩니다. 물론,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여기저기 몸을 좀 풀어주면 냉큼 알려주지 않겠습니까.”
“훌륭하군.”
가서일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알겠지만, 우리 백성이 서토인 거주지 근처에 민가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눈치를 살피며 접근 시기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마치 적이 방심한 틈을 노리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소인들도 그리할 생각입니다.”
“옳은 방법이지만 우리는 매복과 어울리지 않아.”
“허. 설마 약탈하듯 곧장 진입하라는 겁니까?”
“그게 적합하지 않겠나?”
가서일의 눈동자가 빛났다. 백성들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근처 거주지의 서토인이 2천여 명입니다. 그들 사이에 대놓고 들어간다는 건 참으로 설레는군요.”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약탈다운 방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좋군요.”
“사실 우리는 이게 맞습니다. 매복은 머리 아픕니다. 그냥 나가서 시원하게 들이박는 게 좋습니다.”
“예. 바로 들어가서 장인만 찾아내서 하나씩 말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루면 됩니다.”
과연 고구려인들다운 호탕함이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말을 꺼낸 이들은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실로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러하니 감동의 물결은 자연스레 가서일에게도 전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찰나, 정적이 감돌았다.
“약탈이 아니라 정착일세.”
“서, 선생.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착이라니요?”
“진입해서 그들과 함께 살게.”
“!!!”
“사이사이에 우리 민가를 짓게. 그들의 가옥을 따라 해도 좋고, 우리의 가옥을 알려도 되는 걸세.”
“그,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가서일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기술도 익히고, 그들의 말도 익히게. 그리고 그들에게도 우리 말을 전하게.”
“!!!”
다시 찾아온 정적.
가서일은 잠시 말을 멈추며 짧게라도 시간을 주기로 했다.
‘서토인은 장차 고구려의 또 다른 젖줄이 될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 고구려인이 그들의 세계에 직접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오롯이 모든 걸 취할 수 있다.’
냉정하게 따질 때 기존 고구려의 장인은 철저하게 귀족 사회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때 귀족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술 집단 혹은 생산 집단이 탄생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장시의 수립과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확장되는 세계였기에 처음부터 잘해야 했다. 또한, 자체적인 역량 강화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고구려인이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서토의 말을 익힌다는 건 새로운 능력을 얻고, 길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단기간에 수백 명의 역관을 확보할 수도 있다.’
말이라는 건 글자를 익히지 못하더라도 익힐 수 있다. 그러니 저들의 속에 들어가야 한다.
“저들은 고구려에 있으나 오롯이 고구려라고 할 수는 없네. 그러니 자네들이 직접 들어가서 익히고 알리게. 저들을 탐하고, 고구려도 알리게. 알겠나.”
“하지만······.”
“자네들이 아니면 다른 이들을 구하겠네.”
“응당해야지요. 사실 약탈이나 정착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매복만 아니면 되는 겁니다.”
대화는 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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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텄다.
아마 지금쯤 가서일은 인원을 잘 꾸려서 중국인의 거주지로 투입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제대로 잠입할 수 있다면 조정은 특별한 재원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연자유의 방책이긴 했는데 곱씹을수록 좋은 방법이었다. 아니, 내가 이를 동의한 건 거대한 역사적 실험을 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평양 도성의 외곽에서 확장된 세계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가치 혹은 관념과는 다소 이질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풍습 혹은 문화를 유지하면서 생존을 이어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과 만났을 때 고구려가 잠식되는 게 문제였다. 이건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더불어 경계할 만한 일이었다. 중국의 문화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긍정적인 전망을 그려볼 정황은 충분했다. 단적으로 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학을 아예 탈바꿈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구려의 문화 역량이 보통을 넘어선 수준이라는 걸 의미했다. 물론, 최후의 승자가 될 유학이 무엇인지는 우리와 중국이 치를 투쟁의 역사가 결정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단지 외국의 문화를 수입하는 수준이 아니긴 했다. 수천 명에 이르는 서토인의 문화가 고구려의 내부에서 숨을 쉬게 된 것이니 말이다.
나는 고구려의 문화가 중국의 문화를 흡수할 수 있다고 바라보지 않았다. 냉정하게 이건 어렵다. 아니, 애초 이런 오만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공존이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고구려의 문화적 탄력성이 다양성을 능히 이끌어갈 수 있을 수준이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미 우리는 힘의 우위로서 말갈, 거란, 고막해를 품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 동질감이나 공존을 꾀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에 훗날 돌궐까지 더해질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통치로서 그들의 문화를 억압할지도 모른다. 이건 거대한 저항에 봉착할 것이며, 결국 우리가 추진하는 제국 고구려의 수명을 단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숨이 막힐 정도로 끈질긴 중국을 고구려의 내부에 생존하게 한다면 더 확인해볼 것도 없다. 고구려는 천하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며 팽창할 수 있는 ‘문명’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랬다.
이건 바로 문명이었다.
문명(文明).
이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위대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니 이를 어찌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연자유를 바라봤다.
“우리는 저열하게 흡수하는 게 아니라 포용해야 하네.”
기본은 충분했다.
고구려는 원래도 타국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다. 늘 존중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는 수입의 차원에 불과했기에 실험이라고 불러야 했다.
“십수 개의 전통과 풍습이 다채롭게 발전할 수 있는 천하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네.”
상상한다.
거란족이 말을 타고, 고막해족이 지부상소를 하고, 말갈족이 농사를 지으며, 돌궐족이 성을 짓고, 수나라인이 동맹에서 춤을 추는 나라, 고구려를 말이다.
또 상상한다.
고구려인이 거란족, 고막해족, 말갈족, 돌궐족, 수나라인과 대화할 때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세상을 말이다.
“천하의 모든 길이 고구려로 통하는 시대를 개막하는 것일세.”
이는 실로 중요한 일이었다.
나의 진심을 느낀 것일까.
연자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길을 만들려고 하는 건 곤란하지요.”
나의 웃음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며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허.”
연자유는 헛웃음을 내뱉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하마터면 동의할 뻔했군요. 아니, 천하의 모든 길이 정말 고구려로 통하게 한다는 그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그러면서 문서를 잡아 흔들었다.
이는 실로 낭패였다.
바로 을지문덕의 도로 개발과 관련한 내용이 적힌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검토해봐야 할 문서가 연자유에게 노출된 것이었다.
“음.”
내 의도가 아니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문덕의 안건입니까?”
“어찌 알고 있나?”
“그의 글자가 아닙니까.”
“역시 눈썰미가 있군. 어떤가. 아예 어렵겠는가?”
“형님. 천하의 모든 사람이 고구려의 편히 오갈 수 있는 탄력적인 나라의 건설에 죽을 때까지 힘을 보태겠습니다.”
“이왕이면 편히 올 수 있는 길도 만드는 건 어떤가?”
“어불성설입니다.”
지금껏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불가능하다고 여긴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제시는 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네. 물론, 내가 이를 정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
“······.”
이유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말했다.
그러니까
“방법이 있네.”
지금보다 더 나아질 방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