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개발(2)
131화 개발(2)
외곽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는 올라온 적이 없었다. 이는 바꿔 말해서 조정이 파악하기로는 큰 변화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반면, 가서일의 실눈에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 보였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예측이라고 해야 할까? 그간 보여준 능력을 고려할 때 가서일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자세를 고쳐 잡고 말했다.
“서토인의 거주지에 우리 백성이 몰려갈 것이라고 했네.”
“그렇습니다.”
“아직은 뚜렷한 현상이 보이지 않아. 그런데도 이를 언급한 건 입증할만한 추론의 근거가 있다고 여기고 있네. 자네는 이를 말해야 할 것이네.”
“대인. 서토인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많습니다.”
“부정하지는 않겠네. 의도를 떠나서 잡아 온 무리 중에서 유독 장인이 많았으니 말일세. 그러나 그들의 기술 자체가 굉장히 특별한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 고구려에도 장인이 있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어느 나라일지라도 장인은 제 기술을 남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핏줄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 그런데 이역만리의 땅에 끌려온 서토인이라면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아······.”
무슨 말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포로일 수밖에 없는 중국인이다. 그들로서는 더 나은 생활 아니, 생존을 도모하고 목숨을 확실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진 능력을 과시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가 있다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이러하니 중국인의 거주지는 열린 기술의 요람일 수밖에 없었다. 복합적인 이런 상황은 결국, 고구려 본토인을 제대로 자극하게 된 것이다.
“서토인의 거주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멀쩡한 경작지를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티 나지 않게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움직인 것이지요. 대인. 추론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바로 이러한 현상입니다.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이주, 이보다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합당하군. 그래. 계속해보게.”
“일국의 대계는 천하의 패권과 직결하기에 백성 한 명의 삶까지 살필 수는 없습니다. 하여, 대계 아래에서 이뤄지는 백성의 창의적인 행동까지는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봐도 늘 그렇듯 백성이 전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건 생존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인. 이를 가볍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농업 개혁 이래 추진된 많은 정책은 고구려를 조용히 흔들었다. 이 속에서 백성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특히, 유력한 기회가 포착된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물론, 무조건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직은 여러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가서일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늘 그렇듯 역사가 진행될 때 백성의 99명은 실패한다. 오직 1명이 성공한다. 그리고 1명의 성공이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의 실패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이후 또 다른 성공이 나타나고, 조정에서 관심을 보이면서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당연했다. 어떤 시대, 어떤 나라라도 민간의 창의적인 영역을 제대로 따라가는 정책을 제때 낼 수는 없다. 일국의 정책은 늘 보수적이었기에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서일은 백성의 도전을 나라에서 제대로 보장해주자는 말을 하고 있다. 예리한 실눈과 정확한 분석을 근거로 말이다.
“이 추세로라면 족히 1,000명에 이르는 백성이 이주할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내심 불안했기 때문일까. 가서일은 구체적인 예상 수치까지 언급하며 나를 설득했다.
이를 떠나서라도 천 명이라는 숫자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경직된 고대국가에서 순수하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려는 백성의 수가 천 명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또한, 이는 도성의 도시화가 의도치 않은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대인. 이들의 이주는 도성의 외곽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아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걸 의미합니다.”
“음.”
“대인.”
“아. 오해하지 말게. 나는 자네의 말에 충분히 집중하고 있네. 그러니 계속 이어가게. 아. 아니지. 이번 일의 여파가 어찌 될지 더 정확하게 말해주면 좋겠군.”
“대인. 유학은 검약을 이르렀습니다. 소생은 진실로 이리 여기고 있습니다.”
“허. 놀라운 일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역시 대인이라면 그리 여기실 줄 알았습니다.”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 검약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네.”
진심이었다. 아니 솔직히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사대부에 대한 것이었다.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위정자, 사대부에 대해서 구체적인 평가내릴 능력이나 의지는 없었다. 한데, 내가 막상 고구려의 귀족으로 살아 보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들의 경제관이었다.
되돌아보라.
조선의 부를 확고부동하고 확보한 이들이 바로 사대부였다. 한데, 그들은 검약을 강조하며 부를 손바닥에 올리기만 했다. 그리한 결과, 조선의 내수는 지독할 정도로 고였다. 아니, 일국의 위정자라면 돈을 잘 써야 하는데 이게 안 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실학자 박제가는 말했다.
‘그릇 깨지면 재활용하지 말고 버려! 그리고 새로 사서 써! 그래야만 그릇 파는 사람도 먹고살지!’
그런데 이게 가당키나 한가? 조선 백성들은 아끼는 게 아니라 진짜 가난해서 그릇을 새로 사지 않았다. 그러한데, 그들에게 그릇을 버리라고 하는 건 손바닥에 음식을 담아 먹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 애초에 가난한데 무슨 사치를 하라는 말인가. 이건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다가 파산하라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싶었겠는가. 가난한데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박제가는 백성이 아니라 패기 있기 양반에게 곳간을 열어서 사치를 부리라고 해야 했다.
‘가식 부리지 말고, 비단옷도 입고, 금으로 된 공자상도 구하고, 집마다 서책 찍어내는 금속활자도 만들고······.’
뭐. 이래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검약은 곧 능력껏 사치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데, 어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사치는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풍조입니다.”
“암. 검약이란 결국, 물자를 아끼라는 건데, 분수에 맞춰 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여, 유학은 수기치인을 강조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파산할 정도로 생각 없이 사치를 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 분수에 맞게 말입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바람직하다네.”
“한데, 대인. 우리 백성의 이주로 외곽이 확장된다는 건 결국, 귀족의 사치가 더 커질 수 있는 세상이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었다.
고구려는 귀족이 귀족답게 살기에 너무나도 좋은 나라가 되고 있었다. 농업 개혁으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곡물을 가지게 되었다. 약탈이 부활하였기에 마음껏 물자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전쟁까지 추진되고 있었으니 그 과실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심지어
“그렇지. 지금 우리 귀족은 심지어 사치스럽기 위해서 직접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네.”
생산까지 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귀족은 투자 설명회를 거치면서 생산자까지 됐다.
시간이 갈수록 귀족은 부유해질 수밖에 없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고구려는 귀족의 유토피아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귀족의 사치를 더 조장하는 기술의 발전이라는 건 그들의 재화가 세상에 더 많이 나온다는 걸 의미합니다.”
“자네 혹시 귀족을 위한 장시의 탄생을 예상하나?”
“그렇습니다. 외곽에서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가서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종래 고구려에서 확보할 수 있던 사치품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사치품이 외곽에서 제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치품을 귀족이 위계로 확보하거나 장인을 사사롭게 부리기 전에 아예 조정에서 나서서 철저하게 관리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실로 막대한 부가 고구려의 동맥에 흐를 겁니다.”
현대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신도시라고 불렀다. 단지 거주지역 확대가 아니라 뚜렷한 성격을 가진 백성이 몰려드는 곳이니 신도시가 적합했다.
좋은 일이었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생각이군. 그들이 장차 어찌 될지 기대되는군.”
“하면······?”
“내가 이를 연자유와 논의하겠네. 그러니 자네는 실무적인 준비를 시작하게.”
“역시 대인은 참으로 탁월하십니다.”
피식 웃었다.
아. 그나저나 이왕 이렇게 대화를 나눴으니 물어볼 게 있었다.
“이보게. 문덕이 평양 도성에서 요동까지 도로를 말끔하게 새로 하자던데 어찌 생각하나?”
“······대인. 문덕의 말은 전략과 전술만 들으십시오. 문덕은 내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그렇군.”
가서일은 참으로 단호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
연자유는 문서를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서일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티 나지 않게 백성들이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허. 그런가?”
“물론, 당장 터전을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서토인 거주지 근처를 오가며 얼굴을 익히거나 괜히 막집을 하나씩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한 백성의 수가 이미 100명에 이릅니다.”
“그 100명이라는 건······.”
“최소한 50호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단순하게 인원으로 환산하면 이미 500명입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대단하군요. 조정에서는 미리 파악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눈으로 이토록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다니.”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서 세상만사를 자세히 살피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음. 일리가 있습니다.”
나와 연자유는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길게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조정이 주도하지 않은 외곽 도시의 탄생이라는 건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특이한 건 이주를 준비하는 백성은 주로 경작지 확보 따위에서 실패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조정에서 추진한 개혁의 과실을 취하는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예 새로운 길을 찾고자 눈을 돌린 것이다. 참으로 진취적이고 훌륭한 백성들이 아닐 수 없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대로 만지면 상당히 괜찮을 거 같습니다. 아니, 좋은 일입니다.”
인색하고 옹졸한 연자유의 입에서 이 정도의 평이 나왔다는 건 엄청난 극찬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투입할 재원이 있는가?”
“재원을 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괜찮은 방법이 있나?”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