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개발(1)
130화 개발(1)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문진의 눈동자에는 묘한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이문진은 내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나 경험이 없는 세대였기 때문이었다. 고정의, 고식, 연자유의 수준이 아니면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백제가 선대 왕 시절 중흥의 기치를 꺼냈네. 이를 알고 있는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시 백제의 위력은 동방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관산성에서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였습니다.”
“말 그대로일세. 한데, 다시 날개를 펼치고자 하지 않을까?”
“그러하니 남조 신라를 도모하고자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백제 왕의 생각이 아니겠는가.”
“예······?”
“중흥이라는 두 글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네. 하지만, 어찌 중흥을 일으킬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네.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승전을 거듭하는 거겠지.”
전쟁에서 무조건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하지만, 승리의 과실은 너무나도 달다. 추락하는 왕권을 수직 상승시킬 수 있으며, 국제적 위상도 강화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단번에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군왕이라면 이와 같은 유혹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백제는 선왕 시절 충분히 내실을 다졌네. 그러나 전투에서 패배했기에 날개가 꺾였지. 반대로 생각하면 다시 크게 한 번만 이긴다면 중흥을 일궈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실제로 지금 백제의 왕이 그리 여기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일세. 그와는 별개로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차분하게 내부의 역량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이 없겠는가?”
“그 말씀은······.”
“고구려 평양 도성의 생기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네. 이는 내가 고구려의 막리지라서 하는 말이 아닐세.”
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고구려인들이 기본적으로 호탕하고 쾌활하긴 했으나 내면에는 부상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강렬하게 일렁였다. 하지만 농업 개혁이 시작된 이후 평양 도성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실체가 분명한 생기가 가득했다.
우리가 봐도 이러한데, 백제인의 눈에는 어찌 보였겠는가. 더불어 그들의 뇌리에는 우리의 평양 도성이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구려의 생기를 탐하고자 할 것이네.”
“······백제 역시 오랜 세월 내부의 알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군요. 결국, 방향성은 심각한 문제를 도출하겠군요.”
“그리될 것이네. 그 시발점은 신라 정벌이 될 것일세.”
남조 신라를 향한 백제 왕의 대대적인 정벌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불만이 있어도 따르겠으나 결정적인 한 번의 패배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바뀌지 않는 건 다급할 수밖에 없는 왕의 전쟁 일변도 노선이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백제를 심대한 분열로 안내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떤가. 결국, 고구려를 둘러싼 천하의 모든 나라가 분열에 허덕이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문진은 진심으로 감탄하여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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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적였다.
한 번, 두 번······다섯 번, 여섯 번 긁적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렸다. 듣고는 있는데 상당히 산만하여 정확한 요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한데, 화자가 무려 을지문덕이었기에 나의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매끄러운 대화가 우선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는 손을 가볍게 내저으면서 을지문덕의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자네 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대인.”
을지문덕은 차분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평양 도성에 이르렀다.
“소장이 가리킨 곳은 우리 고구려의 17역입니다.”
“그렇지. 우역제가 시행되는 곳이 아니던가.”
우역제는 고구려의 정보 전달 체계로서 흔히 역참제라고 알려진 것과 거의 유사했다. 그리고 구도인 국내성부터 평양 도성 사이에는 17개의 역이 있었다. 여기에 두만강까지 연결하면 39개의 역으로 확장됐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구도였던 국내성을 중심으로 서안평로, 요동로, 신성로(현도로), 부여로, 동해로, 책성로, 평안로 등 7개의 거대한 도로가 있었다.
여기에 평양 천도 이후 새로운 도성을 중심으로 거미줄과 같은 연락 체계를 완벽하게 구축했다.
즉, 건안성-수암-오골성, 요동성-백암성-본계-오골성, 신성-개모성-국내성-압록강으로 연결되는 3개의 주선 도로와 여기서 파생한 간선도로들이 그것이었다.
현대 국가와 비교하면 당연히 부족하겠으나 지금이 고대라는 걸 고려할 때 이 정도면 너무나도 훌륭했다. 그래서 내가 을지문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라 을지문덕의 말이니 무조건 경청하고, 모르는 건 물어보면서 요지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천년의 위명을 남긴 사람의 말을 가볍게 듣는 건 아니라고 배웠다.
“역과 역을 이동하는 천리인은 10인 단위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고구려의 정보 전달 체계는 천리인 편재였다. 즉, 천리인 10인과 천리마 1필이 한 팀이었다. 즉, 이들이 100리 단위로 배치되어 1,000리를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사용하는 천리마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과하마보다 훨씬 뛰어난 준마였다. 괜히 천리마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이는 정보의 전달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걸 정확하게 파악한 고구려의 기풍에서 비롯한 현상이기도 했다.
을지문덕의 말은 이어졌다.
“이를 더 확대 편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겠지. 고구려의 세계가 확장되고 있네. 더불어 전보다 더 많은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한데, 어찌 전달 체계를 확충하지 않겠나. 한데, 문덕. 이는 가만히 있어도 추진될 일일세. 나는 자네의 말이 이런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확대 편성을 단지 인원의 증가만으로 둘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대인. 정보를 전달하는 건 천리인과 천리마를 더 많이 확보하면 됩니다. 한데, 이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예 허를 찔렀다.
상대가 을지문덕이라서 모든 시선을 전쟁에만 집중한 탓이었다. 나의 어색한 웃음을 무시하며 그의 말이 이어졌다.
“고구려의 확장된 세계를 유지하는 건 두 가지의 축이었습니다. 더 많은 병력이 이동하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물자가 이동하는 것입니다. 한데, 이에 대한 대비는 없습니다.”
“음.”
“특히 요동 전선이 포함된 서부와 평양 도성의 교통로는 실로 조약합니다. 장차 북방으로 진출해야 할 주된 도로인데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실제로 서부와 평양 도성을 연결하는 도로는 주로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매우 제한적이긴 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을지문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도로공사를 제대로 해보자는 말이었다.
어려운 일이다.
이게 될 수는 없다.
“음. 이보게. 문덕.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리고 나는 현재 우리의 도로가 부족하다고는 여기지 않네.”
“대인. 도성의 도로만큼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길이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데 어찌 어렵다고 하십니까.”
평양 도성의 도로는 놀라울 정도로 잘 구축되어 있었다. 또한, 현재 축조 중인 장안성은 고구려의 모든 역량이 집약되었기에 그 완성도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성은 애초 도로를 정비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닌가.”
처음부터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산과 산이 가득한 땅에 어찌 도로를 쉽게 만들 수가 있겠는가. 그간 고구려가 무수한 수레와 기병을 운영하면서도 도성과 요동의 길을 계곡길 중심으로 활용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또한, 어떻게 진행하려고 할지라도 엄청난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 고구려에 그런 여력은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조금 더 세밀하게 논의하겠네.”
나는 무조건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제안이 있다면 검토하고, 원안이 어렵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적어도 그 내용의 본질이 타당하다면 말이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도로의 확충은 늘 요구되는 것이며, 발의자가 을지문덕이다. 그러니 심사숙고의 요구는 높을 수밖에 없다.
을지문덕도 다소 아쉬운 표정은 지었으나 더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그 역시 최소한의 검토는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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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제안에 대해서 홀로 고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건 전문가와 상의하는 게 옳다. 그러나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나를 찾아왔다.
물론,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오늘따라 가서일의 실눈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혹시 나를 찾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대인. 소생이 참으로 재미난 현상을 보고 말았습니다.”
“자네의 눈에 보일 정도면 정말 재미난 게 분명하겠군. 그래서 어서 말해보게.”
“허. 대인. 어찌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비록 소생이 눈은 가늘지만, 세상의 모든 걸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천년을 그림으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실언했네. 그러나 서둘러 말해보겠나? 그 재미난 현상에 대해서 말일세.”
재빠르게 사과하자 가서일은 다소 누그러졌다.
“대인. 점차 외곽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아직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닐 텐데?”
“허. 대인. 어찌 이러십니까.”
“진심일세. 분명 백성의 터전이 외곽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가시적인 건 아닐세.”
외곽으로 백성이 뻗어나간다는 건 성과 성 근처로부터 더 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건 말처럼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버린다는 건 이미 무언가 포화상태에 이르렀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하면 자연스레 나타난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아직은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그런데도 가서일이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좋습니다. 소생이 표현을 일부 수정하고, 입장을 한 보 뒤로 물리지요.”
“자네 의외로 줏대가 없군.”
“현상은 그대로인데 표현을 두고 다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맞지. 그래. 하면, 말해보게. 자네가 볼 때는 대체 어떤 부분에서 외곽으로의 확대가 발생하는 것 같나?”
“간단합니다. 서토인의 유입이 원인입니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물론, 중국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으니 그들이 외곽을 구성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보고 확대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실무적인 요소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들의 주변에 고구려인이 몰려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서 상당한 규모의 우리 백성이 서토인 근처에 거주지를 형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소생의 예측이지만 필시 그리될 겁니다.”